창의력 없는 아빠도 딸과 함께 창의적으로 놀 수 있다.
서평 의뢰를 받고 책을 펼쳤다. 토요일을 일하는데 다 써버린 아빠는 초조했다. 힘든 몸을 이끌고 과연 진심으로 딸과 즐겁게 놀아줄 수 있을 것인가. 정신 차려보니 아내는 일요일 아침 근무를 떠나고 없었다. 모처럼 딸과 단 둘이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터라 결심이 섰다.
'그래. 오늘이다.'
<오늘 아이랑 집에서 뭐하지?> 책을 집어 들고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뿔싸.......' 40개월 딸아이에겐 아직 어려운 과제들이었다. 다섯 살 이상 정도 되면 편안히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놀이들이 다양하게 소개돼있었다.
사실 <농구 골대 덩크슛>이나 <장난감 자동차 세차장> 같은 놀이를 하고 싶었지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놀이일 뿐, 딸아이가 하고 싶을 것 같지는 않았다. <동물 농장 우유 짜기>, <빨래 건조대 스피드 게임> 같은 놀이가 딱 좋을 것 같았는데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딸아이님께서 울부짖기 시작한다. 아빠가 출근하지 않는 휴일 아침인 걸 인지하고는 떼를 쓰기 시작하는 거다. "아빠, TV 보여줘." "보고 싶단 말이야~ 보여줘! 보여줘어어!!!!!"
항상 굴복했지만 오늘은 다르다. 수십 가지의 놀이가 책에 담겨있지 않은가. 마음을 단디 먹고 하연이를 안아서 식탁에 함께 앉혔다. 그리고 말했다.
"하연아, 오늘은 아빠랑 재밌는 놀이를 할 거야. TV보다 훨씬 재밌는 거야. 알았지? 잠시만 기다려."
그동안 머리가 나빠 뭐하고 놀지 떠올리지 못해서 그랬지 놀이 책이 옆에 있는데 무엇을 못하랴. 40개월 딸내미와 창의력 제로인 아빠가 함께 할 수 있는 놀이가 분명 하나쯤은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책을 빠르게 넘겼다.
'아주 간단히 할 수 있을 것', '집을 가장 덜 더럽힐 수 있는 놀이', '준비물이 많이 필요치 않을 것', 이 세 가지에 집중하며 책을 샅샅이 뒤졌고, 나는 끝내 찾아내고야 말았다.
내가 찾은 세 가지의 놀이는 <지퍼백 초상화>, <손바닥 발바닥 색종이 게임>, <도플갱어 전신 게임>, 이렇게 세 가지였다. 모두 아이 있는 집에 있을법한 준비물들로 아주 간단히 할 수 있는 놀이였다.
<지퍼백 초상화>는 정말 간단했다. 얼굴에 지퍼백을 올려놓고 매직으로 얼굴 윤곽을 따라 그리는 것이었는데, 이 단순한 걸 하연이가 그리 좋아할 줄 몰랐다. 딸아이가 그리는 모든 그림은 무조건 초현실주의의 것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딸이 좋아하는데.
<손바닥 발바닥 색종이 게임>은 하면 할수록 최고의 게임이었다. 실제 아이의 발바닥, 손바닥 크기에 맞춰 모양을 색종이로 만들고 차례대로 붙여 손 혹은 발로 터치하며 노는 게임인데, 놀이 도중 아빠의 엄청난 창의력이 발휘되니 나의 체력도 지키고 아이의 체력 또한 소진시킬 수 있었다.
그 엄청난 창의력은 이거다. 안방에 손바닥 모양을 붙여놓고 반대쪽 가장 먼 끝 방에 발바닥 모양을 붙여놓는 것. 그리고 안방에서 손바닥 한번 터치, 끝 방에서 발바닥 한 번 터치하는 시범을 보여준다. 그리고 계속 딸은 자동으로 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달려 나갈 듯 시늉만 하면 된다. 그러면 딸은 알아서 뛴다. 나는 그동안 쉴 수 있다. 푸핫.
<도플갱어 전신 게임>은 나에게 축복이었다. 아이를 눕히고 아이 몸에 맞춰 전지를 잘라주면 끝. 책에 나온 것처럼 솜도 붙여주고 하고 싶었지만 나는 더 쉬운 길을 택했다. 아이 몸 크기로 잘라진 전지를 벽에 붙여주고 크레파스를 쥐어주니 그걸로 끝. 몇 십분 동안 알아서 색칠하고 노는 딸 덕에 나는 옆에 스마트폰을 숨겨두고 간간이 놀 수 있었다. TV만 틱 틀어주는 나쁜 아빠를 벗어나는 동시에 틈틈이 나도 놀 수 있었다.
<오늘 아이랑 집에서 뭐하지?> 책을 활용하는 동안 딱 하나의 팁이 생겼다. 책에 있는 걸 너무 완벽히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재료가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창의력을 발휘하면 되는 것이다. 너무 완벽히 준비하려 하다 보면 처음부터 지레 겁먹어서 시도조차 못하게 된다. 일단 그냥 한번 해보는 도전 정신이 중요하다. 그리고 상황에 맞춰 없는 크리에이티브를 끄집어내면 되는 것이다. 나는 주로 내 몸이 편해지는 쪽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다 보니 어마어마한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
조금 하다 보니 TV 보여달라고 떼쓰던 하연이도 놀이에 푹 빠졌다. TV를 안 보여줘도 이리 좋아하니 그동안 TV에게 위탁교육을 맡긴 시간이 참 미안했다.
일요일 아침 시간이 참 금세 지나갔다. 돌이켜보니 나도 그랬다. 어린 시절 동네 전봇대를 놀이기구 삼아 했던 여러 가지 놀이들이 떠올랐다. 나이 먹기, 말뚝 박기 등을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던 그 시절 말이다. 스마트폰 따위 없어도 해가 떨어져 어두워질 때까지 시간이 어찌 갔는지도 모르게 놀았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어 동네 형, 동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뛰어갔던 그 시절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래. 애들은 이렇게 놀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