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환대에 대한 애도
그곳은 지방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를 한참 달리고도 외진 고갯길을 두어 개 넘고서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입구 쪽을 향해 마지막 커브 길을 돌면 버스정류장이 있다. 가까운 진주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시경계를 넘어 도착하게 되는 정류장은 종점이자 회차 지점이다.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는 면회객들은 그곳에서 내려 제법 경사진 길을 100미터쯤 걸어 올라가 입구 경비실에 신분증을 보이고 용무를 말한 뒤 다시 100여 미터 비탈길을 더 오르고서야 민원실을 거쳐 수용자 면회를 할 수 있다.
조사접견을 위해 방문하던 날, 버스정류장을 앞을 지나오는데 할머니 한 분이 보였다. 시골버스 정류장, 인적 드문 그곳에서 노인은 마치 등신대같았다.
깡마르고 약간 구부정한 시골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일흔은 훌쩍 넘어 보였고, 검게 탄 피부는 어떤 삶을 사셨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내 눈에는 그랬다.
다만, 인상적인 것은 붉은색 계통의 화려한 ‘솜’ 점퍼와 챙이 조금 있는 계절을 앞선 듯한 얇고 하얀 꽃무늬 모자 아래로 화장을 한 듯한 얼굴, 특히 짙은 빨간색 스티커를 붙여 놓은 듯한 입술이었다.
그래... 정성스레 단장한 모습이었다.
다만, 허리께 뒤로 중간 크기의 천 가방을 등짐 지듯 양손으로 힘겹게 받쳐 들고 계셔 전체적으로 조금 언발란스해 보였다.
그곳 주변에는 작은 마을이 있으므로 할머니도 주민 중 한 분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짧은 순간 관용차를 타고 지나치며 본 할머니는 마을 쪽으로 이동하지 않고, 가만히 선 채 고개를 돌려 비탈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막 정류장을 빠져나가는 버스며, 이른 시간, 남겨진 할머니... 누군가의 면회객이다.
나의 용무는 수월했다. 조사를 위한 수용자 접견은 큰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다. 나에게는 일상 업무 중 하나이며 잘 묻고, 잘 듣고, 잘 기록하기만 하면 되었다.
일을 마치고 동행한 조사관과 함께 수사기록이 든 가방을 챙겨 조사실을 빠져나왔다. 민원실 앞을 지나올 때, 버스정류장 그 할머니가 다음 면회 일정을 잡으시는지 안내 데스크 앞에 서 계셨다.
그리고, 들렸다.
우리 손주가...... 영치...... 돈하고 책하고...... 멀어서...... 이번 주는 안 되는데......
민원실 바깥 입구 근처에 정자로 꾸민 휴게 공간에서 나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주변은 겹겹이 담과 벽들이다. 하지만, 그곳도 지리산 끝자락의 산세에 둘러 싸여있어 그 벽들 너머, 그 담들 사이에도 봄은 익을대로 익어 있었다.
무심한 나의 담배 연기가 그런 배경들 사이로 흩어지고, 이내 다시 민트 향을 덧입힌 연기를 빨아들이며 나는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민원 건물 1층 벽을 따라 창살로 가려진 복도 창문들을 살피며 어디쯤이 면회실일까 짐작하고 있을 때,
불쑥 할머니의 면회가 환등장치를 타고 나온 풍경이 되어
그곳 베이지색 건물 벽을 비추듯 펼쳐졌다.
10분 남짓의 면회를 위해 분명히 불편하고 성가셨을 먼 길을 몇 번씩 환승한 뒤, 두 번의 비탈길을 힘겹게 걸어 오르고서야 마침내 도착하셨을 것이다. 작은 면회실에서 먼저 입장한 할머니는 곧 반대편 문을 열고 들어 올 손주를 기다리시며 곱게 단장한 옷매무새를 고치셨을 테지.
할머니의 환대, 그 고단한 환대가 그려졌다.
손주는 미안해했을 것이고, 할머니는 손주의 미안함이 미안했을 것이며, 두 사람의 눈물이 그 말들을 대신했을 수도 있다.
문득, 몇 주 전 어버이날을 앞두고 찾아뵌 어머니가 겹쳐 떠올랐다.
구순 노모는 오랫동안 요양병원 신세를 지고 계셨다. 치매는 어머니의 모든 희노애락을 앗아 갔고, 아들과 며느리, 손주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신 지도 꽤 되었다.
면회를 하던 날은 출근하지 않는 휴일이어서 어차피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신다는 생각에 세수만 하고, 면도도 하지 않은 얼굴로 찾아뵈었다.
'엄마, 저 왔어요. 잘 지내셨어요."
무표정하게 날 보셨고, 눈빛은 허공을 응시하는 듯했다. 마음이 아팠다.
나는 아주 쉽고 간편하게 내 불효를 반성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갑자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셨다. 흐릿했던 초점이 내 눈을 응시하셨다. 가만히 내 얼굴을 쓰다듬으시며 물으셨다.
"야야. 와 요즘 힘드나......"
기운 없고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말투셨지만 순간 나는 움찔했다.
백개의 바늘 뭉치가 내 정수리부터 심장 사이를 순식간에 미싱질 하는 것 같았다.
"예? 엄마. 뭐라고요? 엄마. 하하하. 엄마가 하도 물려주신 게 없어서 힘들지요. 하하하......"
면도하지 않은 내 얼굴, 나는 마른세수를 연거푸 했다. 손바닥에서 서걱거리는 수염 소리가 나를 꾸짖었다.
"엄마. 저 괜찮아요. 죄송해요. 다음에는 면도도 깨끗이 하고, 머리도 잘 빗고, 넥타이 매고 올게요. 죄송해요. 저 잘 살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죄송해요. 엄마......"
어머니는 어떻게든 나를 환대해 주셨다.
면회실에서 손주를 환대하던 그 할머니는 내 어머니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어머니들이 피붙이를 향한 환대는 늘 이런 식이다.
늘 이렇게 마음을 아프게 한다. 기어이 죄스럽게 한다.
......
교도소 정문을 빠져나와 그곳 첫 번째 커브 길을 돌 무렵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는 그 자리의 오래된 등신대처럼 여전히 비탈길 위쪽을 바라보고 계셨다.
결국, 손주는 알게 될 것이다. 나처럼.
어머니는 내가 면회를 다녀온 한 달쯤 뒤, 코로나에 감염되셨고 가로막힌 격리실 창 너머에서 홀로 후유증을 견디시다가 그해 늦여름, 0.54평 어머니의 세계를 떠나 아기 때처럼 웅크린 모습으로 당신이 나고 자라셨던 어린 시절 고향, 울주군 서생면 바다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면회였다.
엄마. 안녕......
엄마와 내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절 포기하지 않고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엄마.
형들과 누나... 그리고 저, 엄마가 원하셨던 가족으로 살아갈게요.
사랑해요.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