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비존재, 그 모든 이름
H, 아주 오랜만의 인사… 잘 지내셨어요?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몇 마디 덧붙이는 그런 아쉬움 담은 인사조차 없이 작별했던 오래전 그날로부터 이후로도 저는,
어찌어찌 살다 보면 약속 없이도 우리의 재회는 이루어질 것이고 안부는 그때 나눠도 좋을 거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이 편지는 당신이 나를 영원처럼 떠났던 날과 당신의 작별, 일종의 작별 방식에 대한 미루어 둔 기념이며 제가 드리는 당신에 대한 결국의 작별 인사입니다.
H, 기억하시겠어요? 아니 눈치채셨어요?
그 무렵 저는 항상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였고, 고개는 왼쪽으로 살짝 기울여 세상을 곁눈질로 보곤 했었죠.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 ‘광야를 달리는 말’처럼 어린 저를 떠나셨고, 15살 터울의 각성바지 형에게서 물려 입은 소맷단이 닳아 나일론 안감이 드러난 낡은 가죽점퍼와 유행 지난 통 넓은 고동색 골덴바지, 가난한 어머니를 졸라 겨우 얻어 신은 프로스펙스 검정 농구화가 세상에 맞서는 저의 방식이었습니다.
폐허더미 위에 내팽개쳐진 그런 저를 누군가 눈치챌까 항상 경계했고 또 주눅 들어 있었죠.
H, 기억하시겠어요? 어느 날 제게 했던 말?
‘그거… 거지근성이야. 노예본성.’
내 안에서 들려온 것인지, 바깥 먼발치에서 들려온 것인지 그 말…
아득했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결핍을 마침내 들켜서 창피했고, 경계하고 주눅 들어 있던 눈빛이, 실은 동정해 줄 사람과 장소를 찾던 탐색이었단 사실이 발각되어, 지키지 못한 내 자존심은 바닥을 딛지 못한 발걸음처럼 휘청이다 무너졌었습니다.
H, 기억하시겠어요? 제게 건네줬던 책?
제목이 ‘내 인생 내 지게지고’였어요. 그 무렵부터였던 것 같아요.
나는 어쩌면 홀씨일지 모른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했었던 때가 말이죠.
책 내용요? 그게 중요한가요. 제목에서 저는 읽어냈는걸요.
H, 당신과 마지막 작별한 날, 1987년 6월의 그날.
그 후로 서원(誓願)을 담은 ‘마지막’이라는 기도들을 ‘자주’했던 것 같아요.
‘이번만 도와주세요’, ‘한 번만 붙잡아주세요’, ‘마지막 소원입니다.’
신묘(神妙)한 하늘의 기적이 내 앞에 펼쳐지길 바랐고, 그것은 황금 옷을 입은 의인이거나
밝은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의 열린 문의 모습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기적 없이 가능하지 않다는 두려움, 이 느려터지고 볼품없는 인생에서 단박의 기적 말고는 뭐가 있겠어요?
H, 저의 조바심은 그런 식이었어요.
기적 없는 저는, 버려질 것 같은 낌새면 먼저 도망쳤습니다.
편하고 영예로워 보였던 곳을 미련 없이 떠나보기도 했습니다.
환대 앞에서 예고 없이 숨어버리기도 했고, 두려워하며 들어선 곳에서 위로를 받기도 했죠.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 항로에서 곧은 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만큼씩,
저는 모든 장소에서 그리고 그 사이에서 부유물(浮遊物)로 존재하는 것과 비슷했죠.
H, 저는 결핍 덩어리였나 봅니다.
조금,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죠.
조금, 선교사가 되고도 싶었습니다.
조금, 군인이 되어 보라고도 하더군요.
조금… 사람 구실 하겠냐고도 했습니다.
H, 생의 완성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니… 완성이란 있을까요?
지나온 모든 곳에서 실패했고, 부질없었으며, 지웠다고 생각한 자취들이 실은 고스란히 남아,
지금 저는 조금 선생님 같고,
조금 종교적이며,
조금 제복 입은 직장인으로,
조금… 사람 구실하며 살고 있습니다.
H, 저는 여기 남겨졌으나, 남기로 한 것이기도 합니다.
성패(成敗) 없는 한낱 경험조차,
나를 우울하게 했던 온갖 부정문 또한,
도려낸 프레임 바깥의 조각까지도,
나를 이룬 세상의 절반이기에 그런 기적 없이도 기적같이 살아지는 인생이더군요.
H, 당신의 이 긴 부재는 당신 탓이 아니었어요.
당신의 출석불응이 아닌 당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나의 불소환이므로,
말하자면 우리의 작별은 나로부터 기원합니다.
다시 뵐 일은 없을 겁니다.
H, 회답 없는 기대를 보냈던 나의 당신. 모든 이름의 당신.
청구서처럼 내밀며 요구했던 나를 위한 당신의 채무들,
이제 전부 탕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