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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치부자 Oct 26. 2024

죽을 것 같아서 살려고 처음 시작한 일은

feat. "꺼져"라는 그의 말 덕분에.

이 이야기는 이혼 전 내 삶의 리얼한 기록이다.

더 이상 아프지는 않고 '그랬었구나~'하고 나지막이 되뇌는 기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냈던 나의 치열한 기록이고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해서 얻게 된 값진 용기의 산물이기에 브런치에 나누어보려고 한다.


※제 입장에서 쓴 기록이라 다소 왜곡된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운전을 못하는 아내, 쫓아내는 남편



대학교 때 운전면허를 땄지만 근 10년 동안 장롱면허였다.  

평생가도 '운전'은 왠지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처럼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전 남편이 상의 없이 갑작스레 퇴사를 하고 나와 같이 다니겠다고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나는 그의 호의를 또 쓸데없이 긍정적으로 해석했지만, 그것은 집 밖에서도 발이 묶인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24시간 거의 같은 공간에 놓였고 자동차는 그야말로 전쟁터가 되었다. 삶이 천국일 수도 지옥일 수도 있다는 말을 매 순간 자동차 안에서 경험했다. 


가장 고약한 것은 항상 전쟁의 끝이 운전대를 쥐고 있는 그가 종국에는 나에게 '꺼져'를 외치는 것이었다.

당시 화장품 영업사원이었던 나는 커다랗고 빨간 패브릭 화장품 짐가방을 들고 내려야 했다.

고객과의 약속이 있어 성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긴장되고 머릿속이 복잡한 날이면 그는 참으로 교묘하게도 알아차려 왠지 평소보다 기분이 더 안 좋았고, 나는 눈치를 살피느라 많은 에너지를 써야 했다. 


그럼에도 그와 전쟁을 피할 수 없는 날에는 목적지로 가는 도중 아무 데나 나는 홀연히 내려야 했다. 

그렇게 수없이 나는 동부간선도로 중간에서도 내려봤고, 판교 어디쯤 버스가 드문 친구 회사 옆길에서도 내려봤다. 용인~인천 가는 길 중간 어디에도 내려 네비를 찍고 대중교통으로 바꿔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걸어서 약속장소에 갔다.


그렇게 도착하면, 속이 문드러졌지만 어렵게 약속을 잡은 고객 앞에서 울상을 지을 수는 없기에, 나는 일부러 더 씩씩하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화장품을 발라주고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썼다. 일을 마치고 난 다음 나는 혼자 길가에 주저앉아 엉엉 울곤 했었다. 



이건 어쩌면 나와 같은 순간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다. You're loved.



'가화만사성'

가정이 편치 않으니 일이 잘 될 리가 있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나빴지만 더 정확히는 아픈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앞에서 누가 끼어들면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클락션을 막 누르고 램프를 껐다 켰다 하면서 쫓아갔다. 가장 싫은 건 입으로 나쁜 말들을 필터링 없이 내뱉는 것이었다. 

한 번은 첫째 아이와 어릴 적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오토바이가 뒤에서 경적을 울렸단 이유로 쫓아가서 문을 열고 싸움을 걸려고 했다. 또 한 번은 배가 산처럼 부른 만삭 아내가 타고 있어도 도로 중간에 차를 세우고 경적을 울렸다는 이유로 뒤차와 싸움을 벌였다. 그런 일들이 상당히 자주 일어났고 많은 다툼의 이유 중 하나였다. 

마치 뾰루지가 많이 나있는 피부라 손만 대도 아픈 것처럼, 그는 혼자만의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하고 상대방의 의도와 상관없이 무시하거나 제압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했다.

누구든 으레 운전하다 보면 성질을 부릴 수 있다지만, 문제는 그 후에 그는 쉽사리 기분이 회복되지 않았다.

그 여파는 언제나 그렇듯 옆에 앉아있는 운전 못하는 나에게로 전달되었다.


싸움을 피하기 위해 그에게 좋은 말로 권유도 많이 해보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다 개소리였다. 

나는 듣기 좋은 말을 하면 물도 결정이 이뻐지고, 고구마도 이쁘게 자라더라, 쌀밥에 곰팡이가 펴도 하얗게 더 이쁘더라 이런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도 해보고 

당신이 존경하는 분이 옆에 타도 지금처럼 행동하겠냐고 달려들었다. 

그에게 나는 이미 발톱의 때만도 못한 존재였는데 그에게 자비와 존중을 기대하다니 내 욕심이 너무 컸다. 


처음엔 어리석게도 전력을 다해 싸웠다. 그리고 나는 운전대를 쥐고 있는 "갑" 전남편에게 조수석에 얻어 타는 "을" 신세였기에 밖으로 자주 쫓겨났다. 


더욱 소름 끼치는 건 그 후 몇 연뒤 그가 이죽이죽 웃음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남자친구랑 싸워서 고속도로에서 내린 여자친구가 죽었데. 그 남자친구는 평생 얼마나 괴로울까." 


나는 그런 말을 하는 그의 의중이 궁금했다. 그를 한참 빤히 바라보다가 넌지시 말했다. 

"정말 기억 안 나?... 당신은 나한테 '꺼져'라고 해서 나 도로에서 엄청 많이 내렸잖아. 도로고 어디고......'

 


그런 다음 그의 대답.

"내가 그랬다고?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생각해 보면 열심히 전단지를 돌리고 고객에게 영업을 해서 돈 벌어 오는 건 나였는데, 그는 운전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백수였는데 나는 항상 그의 눈치를 항상 살피고 나라는 존재가 그에게 얼마나 쓸모 있는지 가치 입증을 해야 했다.  


'더 빨리 더 크게 성공하면 그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질 거야, 그때는 덜 싸우게 되겠지.' 

시작부터 잘못된 어리석은 믿음이었다.  




이혼은 꿈도 못 꾸던 시절, 울기라도 해서 다행이다.


매번 죽음의 전쟁을 치르고 나면 기력도 없지만 그가 나를 대하는 방식과 가시 돋친 말들에 무엇보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패잔병이 돼버렸기에, 나는 살기 위해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던 나는 이 지옥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당장 '이혼' 이런 것은 꿈도 꾸지 않았기에, 전남편의 눈을 피해 카페에 가서 구석에서 일기를 쓰며 2-3시간씩 울었다. 

전남편은 '꺼져'를 외치기 전까지는 운전기사의 명분으로 항상 옆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결혼 후에는 거의 모든 모임과 관계가 저절로 끊겨버렸다. '저절로'라는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이런 관계의 선택들이 자의인지 타의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쩌다가 일 년에 한 번 친구들을 만나면 약속이 끝나지 않았는데 그는 나에게 묻지도 않고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친구들이랑 편하게 놀다가 오라고 연락을 했다. 

그가 밑에서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맘 편히 원하는 만큼 노는 '악녀'가 되기는 참 어려웠다. 초반에는 나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내가 다른 사람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 가서 술을 먹으며 푼다든지 (그러면 정말 난리가 날 터), 전문가를 만나 상담을 받는다든지 다른 방법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카페에서 일한다고 하고 일기장에 울면서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렇게 적는 일이 내가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10년 장롱면허 탈출기


매일 죽을 둥 살 똥 정신없는 나에게 항상 자애로운 멘토님이 거의 처음으로 명령조로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운전부터 배워. 조금이라도 붙어있는 시간을 줄여야지. 살려면 운전부터 배워.'


장롱면허 운전히 두려웠던 탓도 있지만 내가 운전을 한다고 하면 난리 칠 그가 두려워 나는 머뭇거렸다. 

그가 내가 운전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운전 연수하는데 돈이 나가서라고 했지만(당시 그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민감하고 인색해서 나는 모든 지출에 그의 허락을 맡았다), 실상은 내가 그의 시야를 벗어나서 마음대로 돌아다는 것이 불편했던 것 같다. 


뒷 일은 모르겠고 이렇게 취급받으며 죽는 것보다는 운전해 보는 게 낫겠다.

용감하게 운전 연수를 시작했다. 당시 사무실이 강남쪽이었기에 첫 운전연수를 강남~신사에서 시작했다. 

첫날은 빵빵! 다른 차들의 클락션 세례를 받는 민폐 운전자였지만, 이후 놀랍게도 나는 운전에 빠르게 능숙해졌다. 운전 연수 3일 만에 옆 좌석 선생님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그와의 분리를 위해 아득바득 운전을 배웠고, 이후에도 몇 차례 그가 겁주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이렇게 까지 왔는데 멈출 수 없었다. 굴하지 않았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숨통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이후 3년간 20만 킬로를 달렸다. 당일치기로 전남 광주, 남원을 영업을 위해 달렸다. 

운전실력이 일취월장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감사하게도 단 한 번의 사고 없이 운전을 하는 베테랑 드라이버가 되었다.  


절벽으로 밀면 살려고 뭐든 하게 되어 있다. 고난이 곧 은혜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덕분에 '운전'이라는 아주 유용한 스킬을 갖게 되었으니 말이다. 

'꺼져'라는 그의 말 덕분에 나는 무사고 베테랑 운전사가 됐다.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다닐 때마다 운전해서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이 모든 순간을 미리 연습시키셨던 것 같다. 



선과 악이 조화롭게 맞물려 빚어내는 삶의 빛을 누가 덮을 수 있겠나.  

가끔 너무 아픈 삶의 최악의 순간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삶'은 선과 악이 맞물려 빚어내는 최고 예술의 경지






어떤 상황이 오든 수용하고 감내하며 감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생을 살아냄이 가장 재밌는 이유기도 하다.

최악을 아름다움으로 창조하는 일이 참으로 고통스럽지만, 의미가 있다.

모든 의미 있는 이 씨들은 어렵고 힘들다. 


이제 과거 기억들은 그저 삶의 한 조각으로, 그리고 그 순간을 딛고 베테랑 운전사가 된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이 되었다. 그때 저항할 힘도 없어 그 안에서 충분히 슬퍼하고 울고 표현했던 것이 도움이 된 것 같다. 

삶의 오묘한 수수께끼에 당황하고 슬퍼해도 괜찮다. 모든 감정은 항상 옳다. 슬픔을 고이 느낀 다음에서야 내려놓는 일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수용도 일어난다. 그리고 그 속에 반드시 숨겨둔 선물이 있다.  


오늘은 또 어떤 감정의 역동이 펼쳐질까. 

하나님이 정하신 오늘 계획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오늘 나의 하루를 충실히 계획해 본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지켜주소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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