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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리 Jun 11. 2024

[프롤로그] 반려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난치병 환자가 된 뒤로는 매 순간이 괴로웠다. 삶을 부정하고 싶었다. 정말이지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내본 적이 없다. 아침에 눈뜰 때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항상 예민하게 날이 서 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웃어 본 게 언제더라.


그렇다고 해서 암이나 백혈병처럼 생사를 논하는 거창한 병은 아니다. 그저 말 그대로 치료하기 어려운 병일 뿐이다. 다만, 일상에 괴로움이 스며들었달까.


병을 앓으면서 사소한 행복을 포기해야만 했다. 테이크아웃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했지만 차가운 음식을 끊었고, 빈속에 마시는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좋아했지만 카페인을 끊었다. 몇 달간 준비했던 자격증 시험을 앞두고는 시험장에 갇혀 있기가 힘들어서 접수를 취소해야 했고, 차에 타면 안전벨트에 몸이 눌리는 게 힘겨워서 손으로 쥐고 있어야 했다.


병을 얻은 지 1년이 넘은 지금, 여전히 삶은 삐그덕거린다. 하지만 불닭볶음면은 못 먹어도 김치찌개는 먹을 수 있다. 고속버스는 못 타지만 시내버스는 탈 수 있고, 등산은 못 하지만 산책은 할 수 있다. 야구장은 아직도 못 가지만 그나마 영화관은 갈 수 있다.


‘오히려 좋아’라며 정신 승리를 하는 여유도 생겼다. 자극적인 음식을 끊은 덕분에 피부가 좋아졌으며, 커피를 끊은 덕분에 차의 매력을 알게 됐다. 친구를 못 만나는 덕분에 미루던 영어 과외도 받기 시작했다. 한참을 고통에 몸부림치고 나니, 어느 순간 ‘이만하면 다행이지’ 하며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울 때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시는 당연한 일이 얼마나 감사한지, 졸릴 때 바람 쐬러 나갈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달았다.


기약 없는 고통은 어느덧 나와 하나가 되어 ‘반려질병’처럼 함께하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토록 괴로웠으면서도 요즘은 고통의 시작조차 가물가물하다. 지난 시절을 떠올리면 ‘그땐 죽을 만큼 아팠는데 벌써 까마득하네’ 싶다가도, ‘아픈 지 1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안 낫네’ 싶기도 하다. 어쩌면 나는 이 병을 완전히 극복하겠다는 생각이 없는 걸까?


내가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까? 불안하지 않은 하루를 보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무 걱정 없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외출을 하고, 여행을 떠나는 날이 올까? 건강해지기만 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불안함 없이 살게 되었을 때, 어쩔 줄 모르겠는 행복을 느끼고 싶다. 그런데 나는 안다. 변화의 순간은 드라마틱하지 않다는 것을. 여러 날, 여러 달에 걸쳐 서서히 좋아져서, 어느 시점에는 ‘아 맞다, 나 아팠었지?’ 하며 제대로 기억도 못 할 거라는 것을.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지만, 그렇다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대한 추억마저 영영 놓아버리고 싶진 않다. 병과 함께하는 동안, 아프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것들을 많이 경험했다. 타인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되었고, 가까운 사람들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건강해져서 감사함을 잊었을 미래의 나를 위해 기록한다. 그리고 동시에 세상을 위해 쓴다. 젊고 아리따운 여성으로서 내 병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어디에도 말 못 하고 혼자 끙끙댔던 과거의 나처럼, 어디에선가 혼자 끙끙대고 있을 사람에게 힘이 되었으면 한다.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하는 위로를 얻길 바라고, 그냥 어쩌다 이 글을 보게 되었다면 '그럼에도 저렇게 긍정적으로 살아가는구나' 하며 그저 남 일처럼 읽길 바란다.


@Milos Costant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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