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아리 Jun 18. 2024

아픈 건 둘째 치고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

사람들은 병원 가기를 꺼리는 것 같다. 약 먹기 싫어서 버티는 사람도 있고, 큰 병을 진단받을까 봐 무서워서 피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에 나는 병원 가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 수준을 넘어 즐겁기까지 했다. 병이 더 커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치료하기 위함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고난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이 좋았다. 고작 환절기 감기로 이비인후과에 가면서도 말이다. 이렇듯, 병원에 거부감이 없던 나는 ‘큰 병원에 가서 대한민국 최고 박사님들께 치료받으면 한 방에 낫겠지!’ 하며 가볍게 생각했다.



1월 26일 목요일

오후 반차를 내고 처음으로 대학병원을 찾았다. 1분 남짓의 짧은 상담이 끝나고, 의사 선생님은 검사 예약을 잡자고 했다.

[연차] -0.5

[병원비] -120,370원



2월 8일 수요일

첫 삽을 뜨는 것으로 기나긴 여정의 시작을 알렸다. 비록 공사장이 아닌 화장실이었지만, 갈색의 무언가를 푸는 건 비슷했다. 채변 검사를 위해서는 똥을 손가락 한 마디만큼 덜어서 병원에 제출해야 한다. 그런 수치스러운 행위는 60년대에나 존재했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대변통은 내 눈앞에서 여전히 건재함을 뽐내고 있었다.

평소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바깥세상을 탐하던 대변이, 그 위용에 기가 눌렸는지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우여곡절 끝에 나의 작고 소중한 똥을 챙겼다. 잔뜩 움츠러든 녀석을 누가 볼까 봐서 가방 깊숙이 넣었다. 아침 일찍 병원에 들러 대변을 보내 주고 부지런히 사무실로 향했다.




2월 10일 금요일

내시경 3일 전부터 흰쌀밥만 먹으며 식단 관리를 했다. 주변에는 병이 있다는 말 대신 단순 건강검진이라고 했더니, 다들 나를 보며 유난 떤다고 했다. 술 마셔도 검사 잘만 해 주더라며.


검사 전날 밤에는 장을 깨끗이 비우게 만드는 ‘장정결제’라는 것을 먹어야 한다. 처음 먹어 보는 거라 인터넷에 후기를 찾아보니 잔뜩 겁주는 글이 많았다. 맛이 역하더라, 마시는 것 대신 알약으로 받아야 한다, 차갑게 먹으면 그나마 낫다 등등. 그런데 의외로 상큼하니 맛있었다. 게토레이 맛이랄까?

맛도 맛이지만, 화장실을 계속 가야 해서 힘들다는 후기가 많았다. 이번에도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잘 버텨낼 줄 알았다. 처음 몇 번은 변의를 느낄 때마다 ‘신기한 기분이네’ 하며 재미있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6시간 동안 스무 번 넘게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나니 그냥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한낱 가루 따위가 인간을 이렇게까지 무력화시킬 수가 있구나.


다음 날 아침,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장은 눈치 없이 혼자만 난리법석을 피웠다. 병원은 집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지만, 그냥 택시를 탔다. 그날 무슨 정신으로 위·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연차] -1

[병원비] -502,170원




3월 2일 목요일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오후 반차를 내고 병원을 찾았다. 이제 병원이 제법 익숙해져서 대기 시간에 읽을 책도 가지고 갔다. 책에 빠져 들어 주변 소음이 희미해질 무렵, 내 차례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의사 선생님은 소장에서 염증이 관찰됐다며, 더 큰 검사를 해 보자고 하셨다. 신이 나서 알겠다고 했다. 병의 근원에 가까워져서 기뻤던 걸까, 인생에 서사가 생겨서 기뻤던 걸까.

[연차] -0.5



3월 13일 월요일

의사 선생님의 권유대로 복부 CT를 촬영하기로 했다. 3일 전부터 식이조절을 하면서도 말로만 듣던 CT 촬영이라 설렜다. 촬영 당일에는 두 가지 준비 단계를 거친다. 먼저, 장정결제를 먹고 화장실을 참아야 한다. 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기 위해서다. 다음으로는 혈관이 잘 보이도록 ‘조영제’라는 약물을 맞는다. 인체에 투여하면 몸이 뜨거워지면서 오줌을 싸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들 한다. 내 경우에는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진짜 지리고 있는 줄 알았다.



똥을 못 참아서 병원에 갔더니, 되레 똥 마렵게 만들어 놓고는 참으라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다 큰 여자가 병원 한복판에서 바지를 더럽히는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화장실 가는 걸 택했고, 간호사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했다. 선생님은 이미 갔다 왔으면 어쩔 수 없으니, 지금부터는 무조건 참으라고 했다. 못 참고 또 화장실을 갔다. 선생님은 어떻게 할지 담당 과에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또 화장실에 갔고, 검사 안 받겠다고 떼를 썼다. 간호사 선생님은 순서를 바꿔서 지금 바로 들어가게 해 줄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했다. 울고 싶었다.


조금 뒤 내 차례가 왔다. TV에서나 보던 동그랗고 커다란 기계에 누우라고 했다. 평소라면 너무 신기해했겠지만, 그럴 정신이 없었다. 방사선사 선생님은 30초면 끝나니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며 방을 나섰다. 그새를 못 참은 나는 내보내 달라며 발버둥을 쳤다. 촬영이 끝나고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들락거리며 속을 완전히 비워내고 나니, 그제야 쪽팔림이 몰려왔다. 단숨에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 1위’로 등극했다. 죄송스럽고 감사하고 수치스럽고 해서, 병원 편의점에서 과자를 사서 간호사 선생님께 가져다드렸다.



너무 집에 가고 싶었지만, 다른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몸에 장비를 부착한 뒤 캡슐 크기의 카메라를 먹으면, 카메라가 몸 안을 돌아다니며 영상을 찍는 캡슐 내시경 검사다. 하루 종일 촬영하는 거라 장치를 몸에 달고 터덜터덜 집에 왔다.

[연차] -1 

[병원비] -633,980원



3월 14일 화요일

밤새 착용하고 있던 캡슐 내시경 장비를 떼고, 출근 전 병원에 들러 제출했다. (참고로 캡슐은 나중에 변과 함께 배출된다.)



3월 22일 수요일

검사 결과를 들으러 이른 아침부터 병원에 갔다. 소장에 염증이 있는 게 맞았단다. 그 외에 새롭게 알게 된 건 없다. 아, 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수치스러워야 했나. 어느덧 아픈 지 세 달이 지났는데,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의사 선생님은 경과를 지켜보다가 석 달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큰 병이 발견되지 않은 게 어디냐며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서 정확하게 진단해 주지 않는 상황이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병원비] -20,600원



두 달 사이에 병원을 7번 갔고, 연차 2개와 반차 2개를 사용했으며, 1,277,120원의 병원비를 썼다. 그래도 병원과 회사가 가까운 편이라, 출근 전에 병원을 들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병원에 자주 다니면서 지름길을 발견하는 게 기뻤다. 병원에 다니는 사이 봄이 찾아왔다. 날씨가 맑아서 좋았고, 병원 가는 길에 보이는 롯데타워가 예뻐서 좋았다. 이 시기에 회사 업무도 바빴는데 견뎌낸 게 기특할 따름이다.




Note.

대변을 참지 못하는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장이거나, 정신이거나. 장이 문제라면 대장암, 크론병 등을 의심해 볼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검사에서 이상 소견이 발견된다. 검사에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정신적인 문제일 수 있는데, 과민대장증후군이 대표적인 예다.

이전 02화 어쩌다 이렇게 아파졌냐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