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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리 Jun 21. 2024

대학병원을 두 군데 다닌다고?

친하게 지내고 싶지만 조금은 어색한, 자주 보고 싶지만 가끔 봐야 적당한, 대학교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다. 오늘도 속이 안 좋지만, 다음으로 미뤄 봐야 그때도 속이 안 좋을 것 같아서 그냥 약속 장소에 갔다.


푹푹 찌는 더위를 뚫고 문래동에 위치한 맛집에서 만났다. 어느덧 사회인이 된 우리는 고급 안주를 잔뜩 주문했다. 에어컨 앞에서 손부채질하던 친구들은 시원한 맥주부터 들이켰다.


뭐라도 먹으면 바로 장운동이 시작될 것 같아서 그저 입맛만 다셨다. 나에게 허락된 건 오직 물뿐이었다. 친절하신 사장님은 컵에 얼음을 가득 담아 주셨다. 마음은 감사했지만, 물을 마실 때조차 입에 머금고 있다가 한 김 식힌 뒤 조금씩 끊어서 위장으로 흘려보내야 했다.


맛있는 음식을 두고 아무것도 안 먹고 있으니, 친구들이 어디가 안 좋냐고 물었다. 똥 못 참을까 봐 그렇다고 말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라 그냥 요즘 소화를 잘 못 시킨다고만 했다.


(눈앞에 맛있는 음식을 두고도 못 먹는 나를 위해 친구가 근처 편의점에서 포카리스웨트를 사다 주었다. 아픈 덕분에 느낄 수 있는 소소한 감동이다.)


“병원은 가 봤어?”

“응. 대학병원도 가 봤는데 정확한 원인을 모르겠대.”

“검사는 받아 봤어?”

“위대장내시경, 캡슐내시경, CT 다 찍어 봤어.”

“다른 병원은 가 봤어?”

“응? 검사는 어디서 하든 다 똑같은 거 아니야?”

“아니야. 병원마다 기계도 다르고, 의사가 보는 것도 다르니까 다른 병원도 가 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병원을 두 군데 가기도 하는구나. 식품영양학과를 전공한 친구, 크론병을 앓고 있는 친구가 하는 말이라 믿을 만한 정보였다. 하지만, 전에 갔던 강남세브란스병원도 연세대 의대 출신 선생님들이 있는 대학병원인데 알아서 잘했겠지- 하며 흘려 넘겼다. 그땐 제법 살 만했었나 보다.


겨울부터 아프기 시작한 몸은 봄,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도록 나을 생각을 안 했고, 지속되는 고통으로 스트레스가 심해졌다. 갑자기 배가 너무 아프던 어느 날에 그날, 전날, 전전날 먹은 걸 떠올려 봤는데 잘못 먹은 게 없었다. 이쯤 되니, 아무래도 의사가 돌팔이었나 보다, 내 몸에는 분명 문제가 있구나 싶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뭐라도 해 보기로 했다. 건방지게도 흘려들었던 친구들의 조언이 생각나서 동네의 다른 대학병원을 알아봤다.


감사하게도 서울 한복판에 사는 나는 선택지가 많았다. 지하철 몇 정거장이면 갈 수 있는 곳에 상급종합병원이 여러 개 있었다. 99점이냐 98점이냐 차이로 다들 훌륭해 보여서 어느 병원을 갈지 고르기 어려웠다. 그게 그거일 것 같아서 조금이나마 가까운 삼성서울병원으로 정했다. 그 안에서 훌륭해 보이는 선생님들 중 내 담당의를 고르는 일도 쉽지 않았다. 나이 많은 선생님을 고르자니 지식은 풍부하지만 타성에 젖어 있을 것 같았고, 젊은 선생님을 고르자니 열정은 넘치지만 경험이 부족할 것 같았다. 쫄보인 나는 선생님이 내 말을 잘 들어주는지가 제일 중요했다. 인터넷에 후기를 검색하고, 사진 속 인상이 좋은 선생님을 찾아서 병원에 전화했다. 운이 좋게도 그 주에 바로 예약이 가능하다고 했다. 나이쓰!




건강이 극도로 악화한 뒤로, 오랜만의 장거리 외출이었다. 지하철로 여섯 정거장이면 가는 거리지만, 그마저도 큰 도전이었다. 개찰구에서 카드까지 잘 찍고 들어왔으면서 지하철 탈 생각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무 일 없을 거 알잖아. 그동안 아무 일 없었잖아.’

심호흡하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배가 아프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정신만 괴로웠다. 그래도 다행히 길고 두툼한 가을 바지라 똥 싸도 티는 안 나겠다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얇고 밝은 여름옷을 떠올리니 끔찍해서 머리를 저어 생각을 털어버렸다. 무엇보다도 힘이 없어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급똥이 밀려와도 화장실까지 뛰어갈 힘이 없다. 그냥 버텨야 한다. 핸드폰으로 음악을 듣는데도 집중이 안 돼서 급하게 드라마를 틀었다. 드라마에 집중하다가도 정신이 깨면 불안했다.


지하철역에 내리니 다행히 주변에 상가가 많고 번화했다. 지하철역에서 병원까지는 걸어서 8분이지만, 버스로는 2분이면 간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보니 버스는 24분 뒤 도착이란다. 다행히 셔틀버스가 8분에 한 대씩 있다기에 타려고 했더니 이번엔 줄이 너무 길다. 여러 시뮬레이션을 돌리다가 그냥 걸어가는 것을 택했다. 길에서 싸면 숨을 수라도 있는데, 버스 안에서 싸면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할 테니 말이다. 혹시 참다못해 병원 도착 직전에 싸더라도, 병원이니까 이해해 줄 것 같기도 했다.


걱정했던 일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해서는 화장실이 많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받아온 의무기록 사본과 영상 CD를 제출하고 차례를 기다렸다. 화려한 외관과 달리, 병원 안에는 삶이 칙칙한 환자들로 이른 아침부터 북적였다. 저마다의 사연을 상상하다 보니 금방 내 차례가 됐다.


상담실에는 사진에서 본 대로 인상이 좋은 의사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미리 제출한 자료로 내 상태를 확인하셨다고 했고, 간단한 질문과 답변이 몇 번 오갔다. 선생님은 채변과 채혈 검사를 해 보자고 하셨고, 진찰은 3분도 안 되어 끝이 났다. 더 할 얘기도 없었다마는, 힘들게 온 걸 생각하니 괜히 허무했다. 채변과 채혈을 하러 다음 주에 또 와야 한다니. 그 뒤에 결과를 들으러 또또 와야 한다니. 벌써 피곤하다. 아니, 그 전에 지금 출근할 걱정부터 해야 한다. 회사와 사무실이 많이 멀지 않아서, 회사엔 조금 늦게 출근하는 걸로 양해를 구해두었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가야 해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하루의 시작부터 고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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