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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리 Jun 25. 2024

선생님, 제 병명은 무엇인가요


그로부터 한 달 뒤. 병원 갈 생각에 전날부터 머릿속이 복잡했다. 궁금한 게 많지만,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1분 남짓. 의사 선생님들은 내가 질문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기에, 그 시간을 알차게 사용하려면 미리 준비해 가야 했다.


크론병이나 대장암인 걸까요? 단순 염증인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꾀병인가요? 저 같은 환자가 많나요? 배 아플까 봐 끼니를 자주 거르는데, 속이 비어있는 것보단 뭐라도 먹는 게 낫다더라고요. 진짜예요? 매운 거랑 차가운 것 중에 뭐가 더 나쁜가요? 그나저나 도대체 언제 나을까요? 약을 처방받을 순 없나요? 아, 저는 어쩌면 좋을까요!


나름대로 병원에 갈 준비를 했는데,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최근 들어 컨디션이 많이 나빠져서 하루에도 서너 번씩 화장실을 갔다. 몇 분이나 참을 수 있으려나 싶다가도, 이내 나에겐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병원은 가야 하니까 일단 집을 나섰다.


버스에 타자마자 미리 다운 받아 둔 핸드폰 게임을 켰다. 머리 쓰는 건 힘들 것 같아서 단순한 퍼즐 게임으로 준비했다. 평소에 게임을 안 해서인지 역시나 몰입이 되진 않는다. 그 와중에 옆에 있는 꼬마 아이가 떠든다. 가뜩이나 예민한데 옆에서 시끄럽게 구니까 신경이 쓰인다. 집중이 안 되니 다시 배가 아파진다. 버스에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점점 피곤해진다.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선생님의 말씀은 알듯 말듯, 뻔하면서도 애매했다.


“소장에서 염증이 관찰됐는데”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장에 문제가 있었던 거야. 크론병인가?

“일반인도 드물게 소장에 염증이 있어요.”

엥? 그럼 문제없다는 건가?

“그리고 대변도 깨끗해요.”

아… 정상인가 보네.

“근데 크론병 환자 중에서도 예외적으로 대변이 깨끗한 경우도 있어요.”

뭐야, 그래서 크론병이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의사 선생님은 2030 여성에게는 장 문제보다 불안장애가 더 흔하다며, 과민대장증후군일 것 같다고 했다. 크론병으로 발전할 수는 있지만 드문 일이라나 뭐라나. 크론병일 가능성은 희박하니 계속 원인을 찾기보다는 일단 지켜보자고 했다. 선생님은 원인을 몰라서 스트레스성이라고 하는 거라며, 과민성이니까 그냥 신경 쓰지 않고 지내는 게 제일 좋다고 했다. 밥을 잘 챙겨 먹고, 필요하다면 심리상담도 받아보라고 했다. (세브란스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다’며,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어서 뭘 먹었을 때 탈 나는지 테스트해 보라’고 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했는데, 듣고 보니 같은 얘기인 것 같다.)


의사 선생님은 경과를 지켜보자며, 1년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명확한 답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실패다. 병명을 알려 주고 수술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그건 그만큼 심각하다는 얘기니까 차라리 아무 치료도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 1분짜리 결과를 듣자고 왕복 2시간을 쓰다니. 물론 내가 없는 사이에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끼리 많은 대화를 나눴겠지만, 그래도 허무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오랜만에 낮에 외출한 김에 뭐라도 하려고 했는데, 피곤해서 그냥 집에 가야겠다.




Note. 강남세브란스병원 vs 삼성서울병원


홈페이지 UI는 둘 다 비슷하게 불편했고, 셔틀버스는 둘 다 비슷하게 편리했다. 대학병원을 고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보통은 담당의의 전문성일 텐데, 연세대 기반의 세브란스, 성균관대 기반의 삼성병원, 둘 다 비슷하게 훌륭한 것 같다. 나에게는 접근성이 제일 중요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주기적으로 방문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삼성병원이 우세했지만, 내 경우에는 접근성 면에서 세브란스가 훨씬 좋았기에, 이후로도 세브란스를 다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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