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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못그림일기 Jan 11. 2021

걷는 대신 누워서 세계속으로

나의 슬픔을 흡수하고 있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코로나 시대 여행법

왜 여행을 떠나고 싶은걸까

김영하 산문집 <여행의 이유> 중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라는 글을 좋아한다. 유난히 와닿았던 이유는 '나는 왜 여행 가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까?' 하는 궁금증의 실마리를 이 글에서 찾았기 때문이었는데, 글 중에서도 그가 인용한 아래 내용이 정답에 가까웠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데이비드 실즈-

우리가 여행을 떠나고 싶은 이유는 나의 인생에서 잠깐, '달아나고 싶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회사원 시절에는 하루에도 수 십번 씩 '아 여행가고 싶다'를 되내이며 어떤 주문처럼 이 말을 마음에  품고 살았다. 당장 여행을 떠나지는 못했지만, 수시로 항공사 공홈 특가를 확인하고 누군가의 여행 블로그를 읽으며 여행의 기분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프로 집콕러의 우울한 일상

그러다 휴직을 하게 되었고 '오늘 당장 떠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얄궂은 코로나는 1단계를 시작으로 2단계를 거쳐 2.5단계까지 끝없이 격상되어갔다. 뉴스에서 매일같이 질병관리청 담당자 분들 머리가 하얗게 세어 가는 모습을 보는데 나 혼자 잘 놀아보겠다며 산으로 바다로 신선놀음을 떠날 수는 없었다. '국민 여러분, 제발 집에 계셔주세요.' 라는 간절한 발언에 결국, 나는 이번에도 말 잘 듣는 모범생이 되었다.


휴직을 하고 가장 하고 싶었던 '여행', 조금 더 정확하게는 '지친 일상'에서 '달아나겠다'는 목표를 놓아버리니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마주한 프로 집콕러의 현실은 끝없는 집안일(빨래, 설거지, 요리, 청소 등등)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쓴 휴직인데 이러고 있나' 싶은 마음에 세상에 화가 났고 억울했다. 어떤 식으로든 '나의 우울감과 슬픔을 흡수하고 있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게 필요한 여행이란

그러던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 빨래를 널면서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보는데, 햇살 좋은 유럽 어느 마을의 어머니 한 분이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빨래를 널고 있는 모습이 TV에서 방영되고 있었다. 순간 나는 '빨래'를 널고 있는 그녀와 내가 같은 시공간에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고 그 순간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위로'를 받았다. 마치 누군가 나의 등을 쓸어주면서 고생 많았다고, 괜찮다고 따뜻하게 이야기 해주는 느낌이었다.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주는 묘한 위안이 있었고 나는 그 느낌이 좋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여행은 여행 책자 1페이지에 나오는 '죽기 전에 가봐야 할 Top 100' 같은 시그니쳐 핫 스팟이 아님을 깨달았다. '걸어서 세계속으로'에서 내게 위로를 건네준 장면은 '파리의 에펠탑, 바르셀로나 구엘공원'이 아니라, 어느 거리 위에서 웃는 모습으로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힘겨운 삶 속에서도 두 볼에 깊게 패인 웃음 자국을 보며 나는 말 그대로 무장해제가 되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나의 일상은 슬프지 않았고, 우울하지 않았다.  


걷는 대신 누워서 세계 속으로

그 이후로는 일상에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울때마다 '방구석 프로 여행러' 시간을 갖는다. 지난주에는 <길 위의 셰프들 -방콕 편>을 봤고, 이번주에는 '영화 <카모메식당-핀란드>'를 볼 예정이다. 이렇게 누군가의 일상에 위로 받고, 그들의 일상 곳곳에 스민 현지를 구경하는게 내가 찾은, '코로나 시대'에 내게 맞는 여행법이다. 그리고 이 여행이 나의 일상에 건네는 위로는 힘이 있다.


방 불을 희미하게 켜고, 주전부리를 한 소쿠리 가득 담고, 침대에 엎드려 노트북을 켜면 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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