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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못그림일기 May 03. 2021

코로나 백신 접종하는 날

(feat. 할머니, 할아버지의 봄 이야기)


“10분만 있다가 출발해요”


코로나 백신 접종의 날. 

어제 담당 주무관님이 “아침 일찍 오셔도 대기할 곳이 없으니 안내 시간에 맞춰 10시 정각에 도착해주세요.” 하고 손수 전화주셨지만 그깟 전화 한 통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부지런함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백신 접종 장소는 차로 15분 거리에 있었지만 이미 120분 전부터 정장에 베레모 착장까지 준비를 완벽히 마친 할아버지, 지난주에 일찌감치 파마를 다시 말고 아침밥을 먹자마자 가장 반짝이는 상의를 차려입은 할머니의 출발을 늦추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런 저런 핑계로 “할아버지 10분만 있다가 출발해요”를 수십 번 반복한 끝에 9시 30분쯤 출발할 수 있었고, 9시 50분쯤 지정장소에 도착했다. 



긴장된 한 시간


바깥 천막에서 대기한지 10분 남짓 지났을까, 우리 번호가 호명되었고 바깥 대기장소에서 건물 안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로부터 30~40분 정도 줄을 뱅글뱅글 돌면서 체온, 기저질환 등 이런 저런 검사를 진행했고 마침내 백신 접종 차례가 왔다. 대기부터 접종까지 약 한 시간이 걸렸다. 


온갖 미디어에서 백신 접종 관련해 무수한 기사를 쏟아낸 덕에 당사자인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보호자인 나 조차도 참으로 신경쓰이고 긴장된 한 시간이었다. 큰 일을 무사히 치른마냥 안도감이 몰려왔고, 그제서야 문 밖 화단에 만개한 꽃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 할머니 사진 찍고 갈까요?” 


아까 들어올 때는 이 많은 꽃을 왜 한 송이도 못봤지? 화단 한가득 피어 있는 철쭉의 선홍색이 참으로 예뻤다. “할아버지~잠깐 꽃 구경하고 갈까요. 여기서 꽃 배경으로 사진 찍고 꽃놀이해요!” 하면서 잠시 놀다 가자고 할아버지를 졸랐다. 집에나 빨리 들어가자고 ‘버럭’ 하실걸 각오하고 물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래 좋지.” 하시며 화단에 걸터 앉으셨다. 이때다 싶어 두 분 나란히 선 오붓한 사진을 찍어 드리고, 셋이 셀카도 찍으며 봄 햇살을 즐겼다.



“하나 둘 셋, 김치”


화단을 둘러보시던 할아버지께서 앞 화단 ‘하얀색 철쭉꽃’ 앞에서 독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셨다. “하나 둘~셋!” 사진 구령을 붙이던 순간 할아버지가 “김치~” 하고는 함박 웃음을 지으며 점잖은 포즈를 잡아서셨다. 별 단어 아닌 그 “김치~”에 나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빵 터져 한 참을 깔깔 웃었다. 이어진 할머니의 독사진 순서, ‘다 늙어서 얼굴도 메주같은데 뭘 찍냐'며 부끄러워 하시던 할머니는 이윽고 철쭉보다 희고 환한 웃음을 지으셨다. 그렇게 우리는 별 데 아닌 구민회관 앞 화단에서 봄 기운을 한 참 느끼며 사진을 찍고 또 웃었다.



코로나, 그리고 봄 나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김치 스마일’ 사진을 한참 바라보았다. 백신을 접종한 오늘은 구청 주무관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이겠지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특별하게 ‘기억’될 하루였을지도 모르겠다. 한 시간 남짓, 긴장된 외출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어제부터 목욕재계 하고, 멋지게 차려입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봄 꽃을 반갑게 구경하고 오랜만에 만난 동네 분들과 안부를 전할 수 있었던 특별한 시간이었다. 매일 매일이 똑같아 심심하다고 노래를 부르시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그런 두 분의 오늘은 어제와 조금 다른 시간이었지 않았을까.



“할머니, 누워있어야 한다니까 쫌!!!”


감상에 젖어있는 시간도 잠시, 백신접종 직후 3시간은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댔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사부작 사부작 움직이는 할머니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할머니를 쫓아다니며 할머니의 모든 일(빨래널기, 빨래하기, 청소하기 등등)을 한참 대신한 뒤에야 비로소 할머니가 낮잠에 드셨다. 물론, 호기심왕 할아버지를 낮잠 들게 하는 건 대 실패였다. (내 힘으로 주식시장을 닫을 순 없었다.) 


어쨌든 전쟁 같았던 3시간이 지나 비로소 엄마와 이모에게 ‘이상 무’ 보고 완료!



3000만큼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 요즘이다.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처음만난 할머니네 집 사정까지 얘기하는 TMI 할머니 덕에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은 순간도 있고, 호기심왕 할아버지의 “왜?” 공격에 지치는 순간도 있지만 할무니댁 냄새가 친근하고 두 분 투닥거리는 소리가 좋다. 


"나는 너보다 니 엄마가 더 좋다”고 말하는 우리 할머니지만, 나는 우리 할부지 할무니를 3000만큼 사랑한다.


2차 접종까지 건강하게 완료해야지, 화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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