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뜻한비 May 21. 2021

서툰 배려를 고맙게 여기는 연습을 하고 싶습니다.


 좁은 골목길에서 운전하다 보면 난처한 일이 생길 때가 있다. 앞에서 차가 오고 있고, 뒤에도 차가 줄줄이 따라오고 있는데, 길이 좁아 서로 비껴 지나갈 방법이 없는 상태로 마주 서고 말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며, 머리를 굴려보지만 차는 점점 많아지고 운전수들이 내 차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식은땀을 흘리며 앞 뒤 바퀴를 굴리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웠는데, 마주 선 차의 운전자가 무슨 운전을 이따위로 하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어쩌라는 건지.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어느 모임에서 지인이 나에게 말했다. “너는 네가 배려했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더라. 근데  그게 상대방도 원하는 일이었을지 생각해봤니?”라며 오래전 헤어진 남자 친구와의 일화를 전해주었다. 내용인즉슨, 자신은 상대방을 위해 했다고 한 배려들을 두고, 헤어지던 날 결국 너 편하자고 한 일이 아니냐며 이별을 선언했단다. 곱씹어 생각해보니 납득이 갔다며, 나에게는 ‘개인적인 이야기고 너는 아닐 수도 있지만...’으로 끝을 맺었다. 그 말을 듣곤 속이 아려왔다. 고개를 떨구다 슬그머니 화장실로 나와 빨개진 눈을 비비고 비볐다.


 나의 서툰 배려도 이기심이었을까. 더 큰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굳이 언급해서 탈을 만들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배려라고 생각했다. 어떨 때는 위가 조여 오는 것 같을 때도 있었고, 억울할 때도 있었다. 서툴지만 내 배려가 상대에게도 닿길 바랐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순간 눈물을 왈칵 집어삼켜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건 어렵다. 나를 위한 배려인지 너를 위한 배려인지 그땐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었겠다. 어설프지만 딴에는 배려한다고 했던 걸 몰라주는 것만큼 서운한 일도 없다. 난처함에 동굴로 숨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다시 홀로 들어가 나만이 왕으로 남는 세계에 우뚝 서고 싶어진다.


 서툰 배려란 때에 따라 안 씻은 손으로 찢어주는 잘 익은 김치 같은 맛이기도 할 것이다. 받아먹고 안 받아먹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곰삭은 김치를 꺼내는 씀씀이에 고마워하는 마음은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모멸 차게 손을 걷어 치운다면 주고받을 마음은 이미 남아 있지 않은 거다.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가 직접 내린 커피라거나 우리 집에 커피밖에 없다며 내 얼굴을 살피는 듯하면 주저 않고 커피를 달라고 한다. 남긴 커피를 보며 상대가 속이 상했을까. 몰랐다. 그랬다면 정말 몰랐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투정을 받아주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