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 떨어져 나 자신을 보는 영성 일기
아침 시간은 등원 준비로 분주하다. 다섯 살 둘째는 부쩍 어린이집에 가는 것을 힘들어한다. 엄마가 많이 많이 보고 싶단다. 어릴 적 나도 분리 불안이 심한 아이여서 기관에 잘 가지 못했다. 엄마를 무척 그리워했고, 떨어져 있는 시간에 슬프고 불안했던 기억이 있다. 아이가 나와 떨어지기 힘들어할 때면 나의 내면 아이가 자꾸만 운다. 나도 엄마가 보고 싶다. 그러나, 어디 있는지 모르는 엄마, 그 엄마다. 본향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막연히 깊은 슬픔이 자극된다.
아침에 아이와 잘 헤어지고 싶다. 그래서 더 많이 준비하고 노력한다. 나섰어야 하는 시간에 딱 한 권 책을 더 읽은 게 실수였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40분이나 늦어졌다. 아이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들고, 남편에게 짜증스러운 감정도 넘겨 버리고 싶다. '왜 혼자 갔느냐고.' 홀가분하게 출근한 남편이 밉다. 이 감정을 남편에게 터트리고 나면 관계에 좋지 않은 흐름이 한 가지 더 생기는 것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늦어진 시간은 40분. 40분 때문에 아이에게 화를 내고 종일 무겁고, 어두운 죄책감으로 들어갈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차라리 등원을 시키고 와서 묵상을 하기로 한 시간을 줄이자. 충분한 묵상의 시간을 갖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 아이와 연결되기를 더 원하실 것 같다. 숨을 내뱉으며 아이의 마음이 되어본다.
점점 날이 덥다. 왕복 40분의 거리를 걷는 게 버겁다. 걸음 수를 확인해보니 4000보, 생각보다 적다. 가는 길에 들꽃을 사진 찍고 민들레 씨를 날려본다. 이대로 기분 좋게 가면 좋으련만,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자전거에서 내리기 싫어하는 아이를 안아 올렸다. 순간 감정을 느끼는 것을 살짝 포기했다. 내면 아이와의 만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일지 모르겠다. 나 자신과 연결을 단절해야 아이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일까.
아이가 등원할 때, 아이의 같은 반 친구도 왔다. 울먹이는 아이를 놓고 돌아서며 순간, '아이의 친구 엄마에게 집에 돌아가는 길을 태워다 달라고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은 하지 못했다. 아이랑 더 나누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으로 걸어왔는데 돌아가는 길이 힘들다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가 민망했다. 아침 시간, 부지런하고 아이와 애틋하게, 그 감정을 느끼며 돌아가는 엄마처럼 보이고 싶다. 남편에게 전화해볼까. 데리러 오면 안 되겠느냐고. 그렇게라도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었다. 휴대폰을 확인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무의식적 반응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이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자주 휴대폰을 확인했다. 어떤 상실감, 허탈함, 아이 감정의 전이, 내면의 아이가 느끼는 감정의 차단하는 수단이었던 것은 아닐까. '슬프구나. 외롭구나. 엄마가 보고 싶은 감정을 느끼는구나. 아이가 걱정되는구나.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구나.'
다행인지. 10년 전 영국에서 함께 했던 친구가 sns로 사진을 보내왔다. 휴대폰 속으로 들어가 10년 전의 나, 그리고 그녀, 그때의 은혜가 되살아나 과거로 떠난다. 아침의 따뜻한 햇살보다 그때의 연결감을 떠올리는 것이 많은 행복함을 되살아나게 한다. 이제와 돌이켜 보니 깊은 외로움이 있었던 나에게,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시간은 축복이자 내 인생의 선물이었다. 시간이 좀 더 흘러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영국으로 그녀를 만나러 간다면 어떨까, 약간의 낯섦과 불안과 기대와 설렘이 공존한다. 도피였을까. 과거의 감사했던 시간과의 연결이었을까. 어쨌든 내면에 떠올랐던 감정을 돌보기를 피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를 전환했다.
치유자로서, 순간 떠오르는 나의 감정을 돌보고 내가 들었어야 하는 말을 먼저 해주어야 한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느끼고, 돌보고. 온 우주를 다 팔아서라도 내가 나의 내면 아이를 지켜줄 수 있고 사랑해주어야 한다. 그 온전하고 완전한 사랑, 나에게 보여주신 그 큰 사랑. 그 사랑을 자주 느끼고 싶다. 순간, 지금 이 순간, 깊-이 머무르며 치유되고 회복되고 싶다.
#민들레꽃씨불기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