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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아니스트 박가영 Jun 29. 2024

나는 우울할 때 그냥 우울함을 받아들여

클래식음악 힐링에세이_ 드뷔시 - 내 마음에 비가 내린다

가끔 우울했다. 별로 이유가 없어도 우울한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정말 감사하게 부족함 없이 살고 있는데, 나는 왜 이럴까 싶었다. 이유가 뭘까 파악하면 조금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어 우울한 이유를 찾으려 했지만, 생각은 끝도 없이 이어져 나를 더 우울함의 늪으로 끌고 갔다.







“Triste et monotone” (슬프고 단조롭게)이라는 지시어로 시작되는 이 곡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기본 원형(모티브)으로 한다. 장 3도 음정의 반복되는 16분 음표는 마치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 같다. 토독토독. 창 안에서 비 오는 밖을 바라보는 듯하다. 내리는 비는 감정이 없기에, 무심하고 단조롭게 계속 빗소리 모티브는 반복된다. 이 모티브는 음형과 음정이 변하기도 하지만, 16분 음표 리듬은 계속 진행된다.




https://youtu.be/cv0ElesGa0c?si=8JOoJnVpwUVnyZTy





이 반복적인 리듬 패턴은 일정한 박(pulse)을 형성한다. 일정한 박은 연주자와 청자 모두에게 같은 박을 느끼게 하여 그다음 박을 예상하게 한다. 연주자와 청자를 동일한 시간의 차원에 존재하게 하며, 같은 시간의 차원에서 둘은 안정감을 느낀다. 마치 연주자와 청자가 같이 창밖의 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 일관된 패턴이 깨지면, 시간의 흐름은 갑자기 바뀐다.




46마디 동안 반복되던 빗소리 음형이 갑자기 멈춘다. 반복되던 16분 음표의 빗소리가 사라지고, 긴 음가와 쉼표가 등장한다. 마치 슬로모션이 걸린 듯, 계속되던 비가 멈추고 시간이 멈춘 듯하다. 연주자와 청자가 같이 느끼던 시간적 차원에서 나만 혼자 시간이 멈춘 듯하다. 리듬의 확대, Rhythmic Augmentation가 일어난다.



흐르던 시간을 멈추고 깨달음을 준다. 이유가 없는 슬픔도 있다고.

“Quoi! Nulle trahison? 뭐라고! 아무 배신도 없다고?"

"Ce deuil est sans raison 이 슬픔에는 이유가 없다"






시의 마지막 연에서 결국 화자는 이유를 모르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이 음악과 시에서, 이유 없는 슬픔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로 다가온다.









많은 작곡가들이 상징주의 시인 베를렌의 시 ‘Il pleure dans mon coeur’ (내 마음에 비가 내린다)에서 영감을 받아 성악곡,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했다. 포레, 데리우스, 슈미트, 코다이. 그중 드뷔시의 성악곡은 내 마음을 제일 울린다.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투르 하트만은 이 곡을 듣고 바이올린으로 편곡해 달라고 울부짖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하트만은 드뷔시의 허락을 구해 바이올린 곡으로 편곡했고, 드뷔시는 무척 만족해했다. 둘은 처음 만나 이 편곡본을 몇 번씩 연주했다. 바이올린 편곡 버전은 가사 없이 바이올린의 선율로만 진행되어 또 다른 매력을 준다. 가사 없는 바이올린 편곡버전은 이 시집의 제목이 떠오르게 한다. “Romances sans paroles”, 무언가, 가사가 없는 노래.



https://youtu.be/vWgNdVO_s4w? si=938 VqsYqtgZbcelO

Ariettes oubliees: No. 2. Il pleure dans mon coeur (arr. A. Hartmann for violin and piano)







이 곡을 알게 되고, 아 이유 없이 슬플 수도 있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굳이 애써 슬픔의 이유를 늘 찾을 필요는 없구나. 그냥 그럴 때도 있구나. 신기하게도 우울함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가끔은 그냥 이유 없는 우울함도 있다고 스스로를 토닥여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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