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살에 챙기는 책가방

여보,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by 공원의 서쪽




아줌마가 된 지금 독일에서 학교에 간다.



정식 학생이 된 것도 아니고 Gaststudium,

수업 하나만 듣는 청강생인데 떨리고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은 똑같다. 첫 초등학교 입학 때도 이렇게 안 떨었던 것 같은데 33살이 되어 학교에 가려니 왜 이렇게 떨리고 손에 땀이 잔뜩 나서 흐르는 걸까?



가방에 드로잉북과 색연필 한 세트를 챙기고 정말 오랜만에 필통을 넣었다.



첫 수업.

강의실에 도착하자 나 혼자만 아시안이고 독일인 25명이 날 쳐다본다. 네모나게 책상을 붙여 서로 마주 보고 앉는 자리들. 이미 서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아있고 시끌시끌 거리던 강의실에 내가 등장하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빈자리가 하나 있어서 옆에 앉아있는 학생에게 멋쩍게 웃으며 "ㅎㅎ 이 자리 비어있으면 나 앉아도 될까?"를 물어보자 독일인 특유의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떡 거리며 "Ja"라고 대답한다.



속으로 '쫄지 말자, 쫄지 말자!!'를 백번을 외친다.



여기는 독일이고 나는 이방인이고 이 사람들이 나에게 말 한마디 안 걸어도 난 괜찮아. 여기 학생들은 다 같이 1학기때부터 수업해 온 아이들이고 나는 청강생인걸 뭐...! 괜찮아 괜찮아! 를 수없이 되네이며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필통, 드로잉북을 하나씩 꺼내 자리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Hallo~~" 하며 말을 건다.

맞은편에 앉은 단발머리 여학생. 17살, 18살밖에 안되어 보이는 소녀가 나에게 밝게 인사하며 먼저 이름을 물어보자, 주변에 다른 친구들도 모여들어 내 이야기를 듣는다. 꼭 전학생이 되어서 첫날 자리에 앉자마자 친구들이 몰려들었던 초등학생 시절이 생각난다.



"내 이름은 디아나. 나는 한국인이야"

"나는 이 학교에 Gaststudium으로 왔어"

"독일에 산지는 2년 넘었지만 독일어는 잘 못해, 이해해 줘"

"나는 미술을 전공했고 미술치료로 마스터를 했는데, 지금은 동화책을 그리고 싶어서 이곳에 왔어"

"심리학적인 내용을 동화로 그려보고 싶어"

"나는 주로 색연필로 그림을 그려"



몰려든 친구들 앞에서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정수리에는 땀이 송골송골 솟아난 채로 소개 아닌 소개를 마치고 나자 긴장이 탁 풀려버렸다. 드디어 남편소개가 아니라 내 소개를 해냈다. 더듬더듬 독일어로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자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조금씩 내가 내 것을 찾아가고 있는 느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어려웠던 걸까?



이제 매주 월요일

나는 학생이 되어 학교에 간다.

일요일 밤이면 초등학교 1학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책가방을 싼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 어렵고 부끄러웠던 독일어도, 나는 외국인이니까 독일어 잘 못하는 게 당연하지 뭐~ 하는 마음으로 하다 보니 이젠 큰 스트레스도 아니다. 나를 계속 증명해 낼 필요 없이 같이 그림 그리고, 그림으로만 이야기하는 시간. 이렇게 즐거웠던 때가 또 있나? 싶을 정도로 행복하다.



오늘도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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