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속에 묻은 마음
꽃이 사라지자
다른 꽃들은 다시 웃고,
마을 사람들도
예전처럼 꽃집을 찾기 시작했어요.
꽃은 상자 속에 갇혀서
조용히 시들어갔어요.
곰 아저씨는 꽃을 정원에서 파내어 상자에 넣고, 조용히 집에서 가장 안 보이는 한쪽 구석에 버려두었다.
"이제 이 고약한 냄새도 안 날 거야.
아무도 모를 거야."
그렇게 곰 아저씨는 정원의 평온을 되찾았고, 마을도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듯 보였다. 정말 모든 것은 평화를 되찾은 것일까? 감추는 선택을 하기로 한 곰아저씨의 마음은 어떤 상태일까?
상자 안에 꽃을 넣는 행위는 곰 아저씨가 아직은 자신의 그림자와 완전히 화해하지 못한 채, 임시적 억압을 선택한 방어기제의 표현이다. 아니 어쩌면 일종의 타협이었을 수도 있다. 꽃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받아들이지도 않은 상태. 그럼 우리는 이제 한 가지 질문거리가 생긴다. 과연 내가 보고싶지 않은, 인정하고싶지 않은 그 무언가를 상자 안에 넣는다면 우리는 이제 그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현실 속 우리도 곰 아저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때때로 나 자신의 어두운 면, 수치스러운 감정, 말 못 할 상처, 인정받지 못한 자아의 편린들을 마주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꺼내어 드러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방식으로 다듬거나, 아니면 곰 아저씨처럼 보이지 않는 상자 속에 아무도 모르게 감춘다. 이 상자는 곧 심리적 억압의 공간, 다시 말해 무의식의 창고다.
하지만 감춘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곰 아저씨는 냄새나는 꽃이 사라졌다고 느끼지만, 사실 그 꽃은 여전히 그의 정원 안에 존재한다.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다. 무의식에 억압된 그림자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오히려 억압된 감정은 다른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불면, 무기력, 갑작스러운 분노, 반복되는 인간관계의 어려움,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 등으로 나타난다. 상자에 감춘다고 해서 그것이 내 삶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복잡하게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감춰버리는 것이 내가 가장 평온함을 느낄 수 있는 상태일 수도 있다.
일상은 다시 정돈되고, 주변 사람들은 ‘잘 지내 보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은 그 안에서 썩고 있다. 상자 속에 갇힌 감정은 공기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인정받지 못한 채 방치된 자아는 마치 숨 막히는 공간에서 천천히 시들어가는 꽃처럼, 조용히 우리의 내면에서 잠들어간다.
누구에게도 나의 진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고립, 나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단절. 결국 상자에 넣는다는 것은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고백이며, 동시에 "나는 아직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자기부정일 수 있다.
곰 아저씨는 집 안의 한 구석, 즉 마음의 한 모퉁이에 상자를 밀어 넣었고, 그로써 자신이 계속 ‘괜찮은 존재’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존재란, 오히려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마저 껴안는 사람이다.
그림자는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수치심으로 덮인 자아의 조각이다.
우리는 사회 안에서 부끄러운 감정을 교육받지 않았고, 그것을 감추는 법만 배웠다. 수치심은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 자아와 실제 자아 사이의 간극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수치심이 드러날까 봐, 상자를 만들고 그 안에 감정을 봉인한다. 문제는 그 상자가 영원히 닫혀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상자는 언젠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시 열릴 수도 있다.
곰 아저씨가 꽃을 없애는 대신, 감추는 방식으로 선택한 건 아마도 ‘그 정도의 용기’밖에 낼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역시 진행 중인 내면의 여정 위에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다뤄야 할 무엇’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것은 작은 변화이지만, 실은 가장 중요한 변화다.
곰 아저씨가 언젠가 정원 한구석을 걷다가 그 상자를 다시 꺼내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그때 그는 더 이상 그 꽃을 ‘냄새나고 못생긴’ 존재로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 모든 그림과 글은 작가가 직접 그리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