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이 교수님의 축사 중에서
수학계에 노벨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상이 있는데, 혹시 알고 계신가요? 바로 필즈상입니다. 이전에는 한국계 사람들 중에서 필즈상을 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2022년 허준이 교수님이 수상하며 수학계 역사는 새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박사과정 중에 수학계의 유명한 난제였던 리드 추측을 증명하였고, 이후에도 다양한 학문적 성과를 이루어냈다고 합니다. 참 대단하신 분입니다.
허준이 교수처럼 수학계에 큰 획을 그은 사람이라면, 어렸을 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수학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본인의 재능에 대한 의심 없이 좋은 성적을 거두며 승승장구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허준이 교수가 이야기해 주신 본인의 삶은 이와 달랐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건강에 문제가 있었고, 입시에 속박된 생활에도 염증을 느껴 자퇴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시인이 되고 싶어 도서관에서 문학 공부를 하고 글 쓰는 연습을 했지요. 하지만 본인의 글쓰기 능력이 시인이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껴 결국 새로운 꿈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과학과 수학에 관심이 생겨 수학과 물리학을 복수 전공하고, 박사과정에서 수학을 전공하며 비로소 수학계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수학자와 시인은 비슷한 직업일까요? 논리와 이성의 학문인 수학과 은유와 감성의 학문인 시는 겉보기에는 서로 접점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허준이 교수가 왜 시인을 하고 싶어 했는지에 대해서 나름의 고민과 추측을 해보습니다. 하지만 사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본 것도 아니니 제가 이유를 확실하게 맞출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가 2022년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졸업식날에 연자로 나와 말해주었던 축사 내용을 살펴보면, 적어도 삶에서 우선시하는 가치관을 느껴볼 수는 있습니다. 당시 허준이 교수의 축사는 그 자리에 함께하던 학생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문학적인 울림을 주었습니다. 여기서는 축사 중 일부만 끌고 와서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제 대학생활은 잘 포장해서 이야기해도 길 잃음의 연속이었습니다. 똑똑하면서 건강하고 성실하기까지 한 주위 수많은 친구를 보면서 나 같은 사람은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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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그리고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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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심을 가득 담아 마음에 닿았던 부분들 위주로 골라보았습니다. 나머지 내용들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이라 생각됩니다. 여러분이 혹시 기회가 되신다면 축사 전문을 따로 살펴보셔도 좋겠습니다.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포장, 아니 표현해도 괜찮을 사람이 이렇게 자신의 부끄러울 수 있는 과거를 기꺼이 보여주며 다른 사람들에게 진실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멋져 보였습니다. 그는 '길 잃음의 연속'이라고 표현한 대학생활이, 제게는 '길 찾음의 연속'으로 보였습니다. 만약 허준이 교수가 그때 정말로 길을 잃었더라면 이러한 축사는 나올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방황하며 인고의 시간을 보낸 사람이 꾸며내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표현했기에 당시에 함께한 학생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수학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 시인을 꿈꾸게 되는 계기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시인을 꿈꾸었던 사람이 수학과 과학으로 돌아오는 이유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길을 잃었다고 표현한, 그 시기를 보내면서 그가 자신에게 친절해져야 한다는 말을 떠올렸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자신에게 친절해져야 한다는 말은 반대로 그간 나에게 친절해지지 못했다는 자기인식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보다 잘난듯한 주변 사람들을 보고, 사회에서 제시하는 규칙에 순응해야만 하는, 그러한 과정에서 나에게 친절해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루의 아침을 시작할 때 '나에게 친절해져야지'라고 생각하다가도, 어쩌다 실수가 나오면 혹은 비판을 받는 일이 생기면 '나는 친절함을 받아도 되는 사람일까'라고 의심하기 마련입니다.
한 사람이 스스로의 인생 전체를 바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설령 가슴이 벅차오르는 꿈을 꾼다고 하더라도, 내적인 이유로, 외적인 이유로 꿈이 부풀다 못해 먼 하늘로 날아가기도 합니다. 날아가버린 꿈을 보며 '어차피 나는 안될 사람이야'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도 허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될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에게 친절해져야 합니다. 꿈은 바뀔 수 있지만, 나에 대한 믿음은 놓지 않아야 합니다. 나에게 친절해질 수 있어야, 타인에게 내가 친절함을 받는 것이 불편해지지 않습니다. 나와 나 사이에서 내적 갈등이 있더라도 화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타인과의 외적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좋은 말이라 제가 고칠 수 있는 부분이 없을 것 같습니다. 때문에 허준이 교수님의 글을 다시 인용하며 마무리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