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당구비로 삼성전자 주식을 샀더라면

by 와룡선생

담배 연기 자욱했던 1990년대 대학가 당구장.

나는 1년 반이라는 소중한 청춘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강의가 끝나면 약속이라도 한 듯 동기들은 당구장으로 몰려갔고, 나 역시 그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큣대를 잡았다.


사실 나는 당구에 별 소질이 없었다.

입대 전까지 1년 반이나 당구를 쳤는데 당구 레벨은 고작 80에 불과했으니까.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당구장에서 시켜 먹었던 짜장면이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맛있었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해보니 아무도 당구를 치지 않았고, 모두들 PC방으로 몰려가 스타크래프트를 했다.

그보다 더 허무한 사실은 그때 소외되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쓰며 어울렸던 동기들 중, 지금까지 연락이 닿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때 당구를 치지 않고 도서관에서 고시 공부를 했더라면, 지금쯤 부장판사 정도는 되어 있지 않았을까?

아니, 공부는 노력해도 머리가 모자라면 안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접어두고,

그때 당구비로 삼성전자 주식을 사뒀더라면 지금쯤 꽤 큰 부자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왜 그토록 꼭 필요하지도 않은 일에 귀한 시간을 쏟으며 남들을 따라 했던 걸까.

아마도 무리에서 배제되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난 영화를 보면 흥미로운 법칙이 하나 발견된다.

거대한 재난이 닥쳤을 때, 공포에 질려 다수가 도망가는 방향으로 휩쓸려 가는 사람들은 대개 비극을 맞이한다. 반면, 다수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길을 찾아가는 주인공과 그 주변의 소수만이 끝내 살아남는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도 결국 나를 지켜주는 건 대세를 따르는 안도감이 아니라, 스스로 내린 선택에 대한 확신이다.


요즘 우리 딸아이를 보면, 나의 젊은 시절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아이는 또래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나 스마트폰 게임을 좋아하지 않고, 뮤지컬 음악이나 보드게임을 즐긴다.

문화의 우열을 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수와 다른 자기만의 취향이 있다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이다.


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명품을 사는 이유는 자기만의 취향이 없기 때문이다.”

내 안이 텅 비어 있으니, 남들이 정해준 가치를 빌려와 그 빈자리를 메우려 한다는 뜻이다.

취향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좋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이나 유행이라는파도 앞에서도 휩쓸리지 않는 자기만의 단단한 중심을 가진 셈이다.

나는 심리학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그것을 ‘자존감’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원래 정상의 자리는 외로운 법이다.

또래 집단에 끼지 못한다고 불안해할 필요 없다.

내가 가는 길에 확신이 있다면 고독을 즐겨야 한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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