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년 전에 “남편의 무덤덤 출산후기”라는 제목으로
제 아내가 모 육아 카페에 썼던 글입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날짜와 병원명은 가림처리 했습니다.)
2007년 9월 X일 (D-6)
예정일을 3주 앞둔 만삭의 마누라가 혼자 병원에 갔다.
평상시에는 늘 함께 병원에 갔는데, 이번 주 금요일은 회사일이 바빠서 휴가를 내기가 어려웠다.
몇 달 전부터 전원한 OO종합병원이 내 직장과 가까운 터라, 그날은 혼자 진료를 마치고 회사 앞으로 오라고 했다.
퇴근 시간이 다 돼 갈 즈음 마누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음 주 수요일 입원해서 유도분만 하재. 어떡하지?”
“뭘, 어떻게 해, 낳아야지.”
“무서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그러고는 징징 운다.
전화를 끊고 퇴근시간이 되어서 마누라를 만나러 갔다. 마누라는 회사 근처에 새로 생긴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징징 울면서...
마눌은 이미 카트에 식료품을 한가득 담아 놓았다. 계산 결과 평상시 장 볼 때보다 2배나 많은 12만원. 허걱. 자기 애 낳으러 가기 전에 서방 반찬 해 놓아야 한다고... 죽으러 가나?
2007년 9월 X일. (D-1)
운명의 날이 밝았다.
오후에 입원하라는 병원 측의 지시를 무시하고, 마눌은 오늘도 출근해서 정상근무를 한다.
오늘까지 일하고, 남은 연차를 다 붙여야 9월 월급을 전액 받을 수 있단다. 독하다.
그렇다면 나도 정상근무.
아침에 입원에 대비한 물품들을 차 안에 다 실어 놓고, 저녁때 만나서 병원에 들어갔다.
오후 7시에 병원에 도착해서 일반 수납창구는 문을 닫았기 때문에 응급실에서 입원수속을 하고, 00층 산부인과 병동으로 올라갔다.
샤워하고, 밥 먹고 피를 뽑았다.
간호사 혈관을 못 찾아서 두꺼운 바늘을 세 번이나 꼽았다.
으~ 불쌍한 마눌.
그러고는 진통실로 옮겼다.
“진통실” 방이름 한번 고약하다. 고문실도 아니고 진통실이라니...
여기서부터 행해진 각종 의학적인 조치들은 자세히는 모르겠다.
암튼, 난 밤 12시 정도까지 마눌 옆을 지키다가, 간호사 언니들과 마눌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진통실을 나와 입원실에서 (첫날은 2인실이 없어서 1인실에서 나 혼자 편하게) 샤워하고 잤다.
2007년 9월 X일 (D-day)
5시 반에 맞춰놓은 알람이 울렸다.
너무 졸려서 끄고 자려다가 여기가 집이 아니고 병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발딱 일어났다.
‘마누라는 진통실에서 고통받고 있는데, 남편이 늦잠을 퍼질러 자면 안 되지. 암. 그러면 안 되지... 후환이 두렵지’
세수를 하고 마눌한테 가보니, 밤새 진통을 했단다. 불쌍한 것.
그다음 할 일은 차 빼기. 병원 주차비가 입원일과 퇴원일만 무료인 관계로 차를 빼서 회사 주차장에 갖다 놓았다. 오는 길에 회사 근처에서 해장국 집을 찾아봤으나 찾지 못하고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리고는 다시 진통실로 복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진통은 참아 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 옆에서 나는 그저 기다릴 뿐이다.
오전에 장모님이 오셔서 잠시 같이 있다가 장모님의 손에 이끌려 지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밥도 못 먹고 진통하고 있는 마눌에게 미안스럽다. 하지만 어쩌랴, 인간은 먹어야 사는 것을...
진통은 빨리 걸렸는데, 자궁문이 너무 안 열렸다.
오전, 오후가 다 지나가고 다시 어두워졌는데도 여전히 조금밖에 안 열린 자궁문.
나란히 진통을 하던 산모들이 하나둘씩 분만실로 가는데, 우리 마눌은 여전히 진통 중이다.
침대에서 커튼치고 소변도 받아내고, 의사들이 수시로 내진하고...
참 거시기하다.
진통은 계속됐다.
진통이 심해지자 척추에 꽂아놓았던 관으로 무통 약 투입.
계속되는 진통.
계속되는 기다림.
나는 속으로 되뇐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순간이라도 결국 지나간다.’
‘올 것 같지 않은 시간도 결국은 오더라.’
‘참자. 기다리자.’
밤 9시쯤 되어서 가족분만실로 옮겼다.
마눌의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지고 나는 손을 잡아주고 심호흡 숫자를 세준다.
(그런데, 막판에 하라는 히- 히- 후- 는 도대체 언제 하는 거야?)
가족분만실로 옮긴 지도 한 시간이 넘어간다.
오늘 안에 낳을 수는 있는 걸까?
양수가 터지고, 고통에 몸부림쳐 머리가 헝클어지고 환자복도 풀어헤쳐졌다.
레지던트 의사들이 배를 막 누른다.
비명을 지르는 마눌. 그러기를 여러 차례.
거의 11시가 되자 레지던트 의사들이 이젠 결단을 내릴 시간이 됐다고 하더니, 담당 교수를 모셔왔다.
혼자 올라올 줄 알았는데 서너 명이 따라온다.
분만은 응급수술에 대비해서 가족분만실에서 일반 분만실로 옮겨서 진행됐다.
마눌은 힘을 주고, 담당 교수를 따라온 의사 한 명이 마눌의 배를 누르고, 교수가 아기 머리를 잡고 끄집어냈다.
허연 막에 싸인 아기가 나왔다. 몸은 빨갛다. 입과 코에 공기를 불어주고 엉덩이를 때리니까 운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길게 울지는 않고 짧게 두어 번 울고 만다.
오랜 고통 끝에 아기를 보니 목이 매이고 눈물이 핑 돌았다.
마눌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는데, 뒤에서 간호사가 부른다.
당시는 나도 정신이 없어서 마눌에게
수고했다고 했는지, 고생했다고 했는지, 고맙다고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빠, 아기 보세요.”
“9월 X일 밤 11시 18분에 태어났고요, 딸입니다.”
간호사의 부름에 뒤를 돌아 아기를 보았다.
얼굴을 보고 급한 대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세어 보았다.
양손, 양발 5개씩 다 있다.
산모는 마취를 하고 마무리 시술을 하고, 나는 간호사와 아기를 따라서 밖으로 나왔다.
신생아실로 아기를 들여보내고 나니, 긴장이 풀어지면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
잠시 후 회복실로 옮겨진 마눌 옆을 지켰다.
2007년 9월 X일 (D+1)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 곧바로 날짜가 넘어갔다.
산모는 회복실에서 병실로 옮겨졌다.
병실로 오자마자 구토를 해서 놀랐다.
살짝 걱정이 됐다.
‘아기만 낳아 놓고 죽으면 안 되는데...’
늦은 시간이지만 초유를 먹이기 위해 신생아실 간호사가 아기를 데려왔다.
목욕을 시키니까 처음 봤을 때보다는 훨씬 사람다웠다.
우리 아기는 신생아인데도 머리숱이 많아서 머리가 시커멓다.
젖이 잘 나오지 않아 초유를 먹이지는 못하고 아기를 다시 신생아실로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우리 부부도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환자 침대 밑에 있는 보조침대를 꺼내서 잠을 청했는데, 침대가 짧아서 종아리의 반이 허공에 떠 있었다. 한국 사람들도 옛날보다 평균신장이 커졌는데 보조침대 좀 길게 만들어 주면 안 되나...
출산일 다음날 낮은 바쁘게 돌아갔다.
산모 밥 먹이고, 아기 데려다가 젖 물리고, 산모는 좌욕도 해야 하고, 양가 부모님도 방문하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나는 병원생활은 이번이 처음인데, 장기 입원해 있는 환자와 그 보호자들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병원 지하에 식당과 슈퍼마켓이 있긴 한데, 물가가 시중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햇반이랑 볶음김치 사다가 산모 밥을 나눠먹었다.
2007일 9월 X일 (D+2)
퇴원하는 날이다.
당연히 아기와 산모를 내 차에 태우고 퇴원하려 했는데, 갑자기 아기를 놓고 퇴원하란다.
처음에는 동네 산부인과에 다니다가 초음파 사진상 아기의 머릿속 내실이 조금 크다는 것 때문에 혹시나 해서 OO종합병원으로 전원한 것인데, 아기 뇌 초음파 사진을 다음 주 화요일에 찍어야 하기 때문에 아기를 신생아실에 입원시킨 채로 퇴원하라는 것이었다.
마눌과 나는 발끈해서 담당 의사의 면담을 요구했다.
결국 내가 강하게 주장해서 아기는 가퇴원 형식으로 퇴원을 시키고 우리 세 식구는 예약되어 있는 동네의 산후조리원으로 옮겼다.
(( 여기부터는 개똥이 엄마가 육아카페에 쓴 글 ))
울 딸 개똥이를 난 지 어느덧 6개월을 향해 달려가고 있네요.
남편의 출산후기를 보니 출산 당일의 기억이 나면서 소름도 끼치고, 웃기기도 하고.. 참... 아기 키운다고 그 고통을 많이 있었나 봅니다.
아기엄마가 된 후 가장 큰 변화는 이 세상 모든 자식은 다 소중하고 귀하게 또 이쁘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예비엄마들!!
저 23시간 진통했는데 그 아픔은 아기 보는 순간 다 사라져요!!
무서워말고 출산 당일까지 운동 열심히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