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 이야기 37 Egypt, Cairo
인생은 예측불허, 좌충우돌의 연속
- 김연수의 '시절일기' 중에서
지갑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에 간식을 사 먹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가방을 뒤집어 다 털어 보고 침대 위의 모든 이불을 들춰보고 혹시나 침대 밑에 떨어졌을까 확인해 본다. 그러나 숙소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오는 길에 흘리지 않았는지 왔던 길을 차근차근 다시 걸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갑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평소 여행할 때는 가방을 앞으로 메는 습관이 있다. 워낙 철저하게 소지품을 챙기는 습관이 있어서 가방을 앞으로 메지 않으면 뭔가 불안하고 초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방을 앞으로 메고서 출출함을 달래기 위해 어느 작은 슈퍼에 가서 감자칩과 자몽주스를 샀다. 하지만 계산을 다 마치고 나서 무의식적으로 가방 앞주머니 문을 닫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가방을 뒤로 멨다. 그때 뒤로 멘 가방의 앞주머니는 지갑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 가방문이 열려있다는 것을 나는 깨닫지 못했다. 전날 피라미드에서 심한 더위라도 먹었는지 가방이 열려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나는 이곳저곳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길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마치 지갑을 가져가라며 유세를 떠는 사람처럼 내 발걸음 힘차고 당당했다. 그러는 동안 덩그러니 열려있는 가방은 누군가의 눈에는 매우 매혹적이고 탐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끝내 지갑은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갑이 있던 자리에는 공허한 여백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가방을 뒤로 메고 숙소까지 걸어오는 동안 누군가 훔쳐간 것이 틀림없었다. 인생 살면서 단 한 번도 지갑을 잃어버려 본 적이 없어서 충격은 컸다. 물론 지갑에 들어있는 것이 많아서 충격은 더 컸다. 당시 지갑에는 300달러와 체크카드와 나의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의 정신가출은 300달러라는 무의미하면서도 거대한 출혈을 일으켰다. 혹여나 나의 카드가 도용될까 무서워 서둘러 친구에게 메신저를 통해 카드 정지를 부탁했다. 정말이지 거지같이 아껴가며 절약했던 돈인데 써보지도 못하고 생이별을 하게 됐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지난날에 왜 그리도 가난하게 여행했을까 하는 허탈한 감정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미 떠나버렸고 돌아오지 않을 것에 집착할수록 마음은 더 착잡해질 뿐이다. 호텔 직원이 분명 어딘가에 있을 거라며 희망적인 말을 해주었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닥친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태만적인 위로일 뿐이었고 그가 주는 희망이란 단지 희망고문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암울한 감수성으로 가득 찬 내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해준들 쇠귀에 경을 읽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불행 중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권만큼은 그대로 있었다.
- ‘그래, 사지 멀쩡하고 여권만 있으면 됐지. 그래 그거면 된 거야.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다고 되네지만 그와 동시에 18 섞인 욕설을 연신 반복하며 허물어진 마음의 분노를 거센 음성메시지로 표출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며 긍정의 말습관을 강조하지만 그냥 뭣 같은 마음 욕 한 사바리 시원하게 내뱉고 응어리 풀어주는 게 차라리 화병을 막아주는 길일 것이다. 물론 이래나 저래나 마음이 풀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긍정의 말이든 부정의 말이든 그런 것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자꾸만 300달러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동안 한 푼 한 푼 아끼기 노력했던 내 불쌍한 과거의 모습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까 그 친구는 카드 정지를 해주고 나서 내가 러시아에서 비행기를 놓쳤던 것을 말하며 “너는 항상 개같이 아껴서 개같이 쓰는구나.”라며 놀려댔다.
친구의 말이 마치 칼날의 끝처럼 날카롭게 날아와 나의 가슴 중앙에 꽂히는 듯했다. 그때의 사건을 상기시켜 준 친구 덕분에 갑자기 러시아에서의 551,885원의 악몽도 같이 떠올랐다. 551,885원 그리고 300달러는 한화로 약 36만 원이니까 둘이 더해보면 91만 1천8백8십5원이구나. 자그마치 911,885원
박막례 할머니 曰 "추억은 돈으로 만든다." 그런데 이번 일이 과연 추억이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무언가의 기억을 돈으로 만들긴 했다.
거의 100만 원에 육박하는 돈으로 다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나열해 보니 너무 많아서 도저히 오늘 안에는 잠에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100만 원의 가치는 너무도 컸다. 사실 친구 말이 맞았다. 나는 항상 천 원, 이 천 원씩 개같이 아끼다가 단 한 번의 실수로 몇십 만원씩 날려버렸다.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은 아니었다.
짧은 한 숨과 함께 돈의 행방을 찾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생각도 그만하기로 했다.
하지만 생각의 소멸은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911,885원의 악령이 머리맡을 계속 맴돌며 내 머릿속을 들쑤셨다.
선암사의 어느 화장실에는 이런 말이 쓰여있다고 한다.
"대소변을 미련 없이 버리듯 번뇌와 망상도 미련 없이 버리세요."
하지만 번뇌와 망상을 버리는 일은 단지 힘만 주면 쏙 하고 빠져나가는 배변활동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마음이 참 아팠다.
좋으면 추억이요,
나빴으면 경험이라.
다만 너무 비싼 경험이라
마음이 아팠을 뿐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