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 이야기 46 Ukraine, Kiev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저녁놀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사월의 소나기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리.
그 모두는 그냥 아름다운 것인 까닭에.
- 스티븐 태프의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현지인들이 여행자들에게 무료로 숙박을 제공할수 있도록 호스트와 게스트를 연결해주는 카우치서핑이라는 것이 있다. 가난한 여행자들에게는 돈을 아낄 수 있는좋은 방안임과 동시에 현지인의 생활을 잠시나마 해볼 수 있다는 이점까지 있어 나같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좋은 플랫폼이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300달러를 잃어버린 이후로 조금이라도 재정을 아끼고자 계속해서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시도해왔는데, 막상 매번 돌아오는 답은 본인이 다른 도시에 있다거나 이미 게스트가 있다는 답변뿐이었다.
공채 시즌이 되면 일단 한번 이력서를 이곳 저곳 뿌리 듯, 일단 되던 안 되던 적절한 수정을 해가며 복사-붙여 넣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 비슷 비슷한 메시지 안에는 결코 대충 씨부리는 것들로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에 대하여 사실과 소설에 적당한 경계를 넘나들며 탄생시킨 일종의 자기소개설이었다.
굶주린 예술가에게서 역작이 탄생하듯 아무래도 돈이 부족했으니 그 절박함은 문장 하나 하나에 녹아들며 내가 봐도 J.K 롤링에 버금가는 멋진 글이었다. 하지만 나의 정성 들인 요청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왜 호스트들은 꼭 내가 여행하는 날만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것일까. 참 씁쓸하다.
계속 거절당하는 것이 일상이 되자 그 다음부터는 아무런 기대감 없이 그저 호스트의 이름만 바꿔서 메시지를 보내기를 반복했고, 그러던 중에 뜻밖의 행운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처음으로 나를 초대할 수 있다는 답장을 받았다. 거의 마흔 번째 시도 끝에 느껴보는 짜릿한 성공의 순간이었다. 역시 인생은 일단 버티고 보는 것이었다.
내가 가게 된 집은 키예프의 중심가와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포근하고 깔끔한 집이었다. 호스트는 간단한 집 소개와 주의사항을 하고 내가 자게 될 방은 안내를 했다. 그리고 거실에는 호스트의 딸 정도로 생각했던 여자가 한 명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호스트의 딸이 아니라 나와 같은 여행자였다. 그녀의 이름은 리사였고 나처럼 혼자 세계 곳곳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그런 그녀에게 혹시 괜찮다면 같이 시내를 둘러보자고 묻자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처음에 체르노빌 투어를 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왔었는데 투어를 취소하는 바람에 나는 마땅히 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나보다 이틀 먼저 키예프에 도착해 관광지와 대중교통을 잘 알고 있는 그녀의 여행에 편승하여 따라나서기로 했다.
유독 건축물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나를 이끌고 먼저 오랜 역사를 지닌 거리로 데려갔는데 그 속을 걷다보면 무언가 옛 사회주의 시절의 고풍스러운 투박함과 우아한 발레의 모습처럼 섬세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리고 시내 곳곳에 위치한 러시아 정교회풍의 성당모습은 아기자기하면서도 알롤달록하여 꼭 아기들의 장난감처럼 생겼고, 그런 이유로 나의 주머니 속에 꼭꼭 담아두었다가 어린 조카들을 위해 선물하고 싶게 생겼다.
그녀와 가장 자주 갔던 곳 중 한 곳은 독립광장이었는데 이곳은 2014년에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피를 흘려가며 투쟁한 끝에 승리를 쟁취한 시민혁명의 현장이었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에게는 매우 의미있는 역사적인 곳이면서 동시에 음식점과 술집 등이 많아 관광객과 연인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마침 우크라이나의 큰 행사 중에 하나인 독립기념일 덕분에 먹음직스러운 음식과 다채로운 공연들이 가득해 나와 리사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먹고 마시며 함께 즐겼다.
그렇게 둘 만의 시간이 길어지며 서로에 대해 알아갈수록 우리는 각자가 꽤 닮았다는 사실을 느껴갔고, 그래서일까 우리는 일상적이면서도 마음 속에 있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점점 가까워졌다. 가족, 사랑, 미래, 인생, 꿈.
여행자들이 만나면 주로 어디를 여행했는지 다음에는 어디를 여행할 건지에 묻거나, 혹은 어느 곳이 좋았다거나 어느 곳이 별로였다는 얘기를 주로 나눈다. 간혹 일정이 맞는 경우라면 동행을 하기도 하고, 같이 먹고 마시며 놀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비슷한 만남과 비슷한 헤어짐이 계속해서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점점 깊은 관계에 대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연인으로의 관계가 아니라 정말 나를 말할 수 있고 누군가의 마음에 담긴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그런 면에서 리사는 여느 여행자들과는 달랐다. 리사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 중에 한 명으로 즐거움과 기쁨을 공유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나의 아픔과 슬픔까지도 털어 놓고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내가 떠나기 전인 마지막 날에도 우리는 독립 광장 근처에 있는 바에서 많은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공항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비워진 술잔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 떠날 채비를 위해 방 안에서 나의 짐을 정리하고 있던 중, 리사는 내 방에 찾아와 맥주를 사러 근처 슈퍼마켓에 같이 가는 게 어떻냐고 물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우리의 시간이었기에 나는 그녀와 함께 다시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녀와 나는 맥주를 한 캔씩을 사서 가로등이 비추는 벤치에 잠시 앉았다.
-“리사, 나 내일이면 헝가리로 떠나는데 이제 너는 뭘 할 거야?”
-“잘 모르겠어, 계획을 가지고 여행을 떠난 게 아니라 그냥 그날그날 마음에 따라서 정하거든. 아마 네가 없었을 때처럼 평범하게 지내지 않을까?”
-“맞아, 나도 그럴 것 같아. 네가 없는 헝가리는 정말 재미없을 거야. 너랑 함께여서 정말 행복했어.”
-“나도 그래.”
우리는 맥주를 들이켰고 그동안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후에도 한 동안 말이 없자 대화의 부재 속에서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도 나를 바라보았고, 우리 둘의 시선은 서로에게 고정되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늦저녁에도 그녀의 눈은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따라서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가 초점이 흐려지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녀 입술 위에 나의 입술을 포갰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가진 보드라운 입술의 끝자락에서 온기를 느꼈다. 도대체 내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 느꼈던 단 한가지는 이 순간만큼은 그녀와 입을 맞춰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눈빛을 도저히 끊어낼 수 없을 거 같았다.
그런 그녀는 따뜻한 품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내 어깨 위에 머리를 살포시 기댔고, 갈 곳 없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은 손깍지로 꼭 붙잡았다.
하지만 이제 해가 떠오르는 이른 아침이 되면 나는 떠나야 한다. 지금 이 순간 함께 있어도 그리워지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온기도, 향기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새벽바람이 잔잔히 불어올 때 다시 한번 그녀를 꼭 껴안았다. 바람이 리사의 온기와 향기를 느끼지 못하도록, 오직 나만이 그것들을 느낄 수 있도록.
모든 건 끝이 있어. 그래서 시간이 더욱 소중히 느껴지는 거야. - 영화 '비포선셋' 중에서
영화 비포 선셋의 한 대사처럼 만약 끝이 없었다면 그녀와 함께 머물었던 시간이 그저 평범한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끝을 알고 있었기에 행복하면서도 아팠고 그녀에게 더 진하게 물들어 버렸다. 그리고 끝을 알고 있었기에 함께 흘러가는 시간 전부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제 곧 빈자리가 되어버릴 그녀의 옆자리는 소중한 추억으로 채워질 것이다. 오늘만큼은 그 추억이 조금이라도 늦게 찾아오기를 바라본다.
여행자의 사랑은 갑자기 찾아오고 사라져 버리는 한 여름의 소나기와 같았다.
하지만 장대같이 내린 소나기 탓에 그만 온몸이 물들고 말았다.
낭만 없는 여행 에세이 담고 있습니다.
글/ 사진_ Instagram@jongminz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