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 이야기 47 Ukraine, Kiev
절망 속의 나를 견딜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은 그녀라는 희망이었다.
여행은 설렘을 안고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것,
동시에 추억을 간직하고 정들었던 곳을 떠나는 것.
그래서 시작과 작별이 함께 깃들어 있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곧 세계를 유랑하는 여행자의 인생이었다.
이런 여행자의 인생길에서 나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다시 또 다른 여정을 위해 호스트와 리사의 배웅을 받고서 공항으로 향했다. 곧 공항에 도착하자 나는 가장 먼저 전광판 앞에 섰고 헝가리로 가기 위해 어느 티켓 창구로 가야 하는지 살펴본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벌써 10분째 지나도록 전광판 앞에 서있는데 나의 항공편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공항에 잘못 오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 그것은 분명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국제공항은 내가 도착한 이곳 말고는 없다. 그래서 전광판을 한번 더 샅샅이 흟어보지만 헝가리로 가는 항공편 중에 내가 예약한 항공편과 시간과 회사가 같은 것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핸드폰을 꺼내 내가 예약한 내역을 확인해보니 날짜도 분명 맞을뿐더러 탑승시간이 이미 지나버린 것도 아니다. 과연 문제가 무엇일까. 예약 내역을 보고 또 봤다. 그러다 영어로 되어 있는 월(Month)이 눈에 띄었다.
나는 아직도 영어로 1월부터 12월까지 잘 알지 못해서 항상 헷갈린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이라고는 내 생일이 있는 달 June(6월)과 영화 어거스트 러쉬를 통해 알게 된 August(8월)밖에 없다. 그렇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가 예약한 날짜를 네이버 영어사전에서 검색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떠나야 하는 날보다 무려 두 달이나 늦은 항공권을 예매한 것이다. 분명 무언가 착오가 있을 거라고, 꼼꼼한 내가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을 리 없다고 현실을 부정해봤지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예약 내역과 E-티켓에 쓰인 날짜가 두 달 후의 티켓이라는 사실은 결코 변함이 없었다.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나의 카드를 정지해줬던 친구에게 급히 전화를 해서 예약된 항공권 당장 취소할 수 있나 확인을 부탁하기로 했다. 마침 전화를 걸었을 때 열심히 롤을 하고 있던 친구는 짜증이 가득 섞인 말로 확인해볼 테니 잠깐 기다려보라며 말했다. 그리고 5분 후 친구의 전화가 울렸고, 그는 내가 예약한 티켓이 환불불가이면서 변경 불가인 티켓이라고 사실을 알려주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금 상황에서는 새로운 티켓을 예약하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그렇게 해서 결국 우크라이나에서 헝가리까지 허투루 날린 항공권과 새로 예약한 항공권까지 300,000원 가까이 되는 돈을 지출하게 된 것이다.
결국 한순간의 어리석은 실수로 인해 나는 다시 이 악물고 배고픈 나날을 견뎌내야 한다. 앞으로 또 얼마나 굶주려야 하고 또 얼마나 쓰라린 고역을 치러야 할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웬일인지 다른 때와 달리 의외로 절망적이거나 치명적이지 않았다. 내가 아직 여윳돈이 많이 남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통장잔고의 위기는 계속되었고, 또한 분명 통장의 맨 앞자리 숫자는 빠르게 작아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절망 속에서 그녀라는 희망을 보았다.
사랑에 빠진 베르테르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모습이 내게서 영 떠나질 않는다! 자나 깨나 그녀의 그림자가 내 마음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다. 눈을 감으면, 이마 속으로 마음의 시력이 집중되어,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나타난다.
사랑에 점령되어 나의 시선이 오로지 그녀에게 집중된 이상, 돈이고 뭐고를 떠나서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당장 가야겠다는 것. 오로지 그 두 가지 생각뿐이다.
나는 비록 30만 원을 잃었지만 그녀와의 소중한 하루를 얻게 됐다. 그렇다면 그 30만 원은 이미 합당한 가치를 다한 셈이다. 티켓을 잘못 예약했던 것은 실수였을까 운명이었을까. 실수든 운명이든 사실 그런 것은 중요하지도 의미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이미 나의 발걸음은 그런 것들을 생각하기도 전에 그녀에게로 향하고 있었으니. 그리고 잰걸음으로 나의 움직임을 재촉할수록 오도카니 눈 앞에서 어른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선명해져 왔다.
나는 다시 익숙한 정류장에 도착해 익숙한 버스 위로 올라탔다. 두 번째 여행은 시작됐다.
또다시 만남이라는 것은
또다시 작별이 다가온다는 것.
그래서 이전보다 더 아낌없이 남김없이 내 마음을 주어야 한다는 것.
낭만 없는 여행 에세이 담고 있습니다.
글/ 사진_ Instagram@jongminz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