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부산국제영화제 후기

by NYX

집으로(차이밍량)

드르렁일 거 뻔했지만 밍량이 형님 한번 영접해 보려고 예매했다. 대사가 거의 없고 간간히 있는 대사도 감독의 요청으로 번역이 되지 않았는데, 새가 지저귄다고 그 지저귐이 무슨 뜻인지 알려고 하지는 않지 않느냐 하는 감독님의 말씀. 롱테이크가 어쩌고 픽스드 샷이 저쩌고 하기 전에 그냥 있는 그대로를 찍었을 뿐이라고 하시는데 더 이상 말을 더하기도 구차하다. 66분짜리 영화니까 한번 '매우 슴슴한' 평양냉면 한번 맛보는 셈 치고 도전해 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96분이었으면 후회했을 듯. 그런데 이렇게 대사 적은 영화를 만드시는 분이 어떻게 GV 때는 투머치토커셔서 말이 끝이 없으시다. 차이밍량 감독과 이강생 배우(본작에서는 제작자) 뵌 기념으로 사진 한 장 투척.



알파(줄리아 뒤쿠르노)

칸 영화제에서 평이 아주 박았다고 해서 걱정을 했는데 <티탄>보다 낫다. 그 정도는 아닌데? <로우>에서 식인, <티탄>에서 금속과 신체결합이 나온 것처럼 <알파>에서는 신체가 돌로 변하는데 이 그로테스크한 신체 묘사가 상당히 매력적이다. 이 감독님은 되게 차가운 톤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중후반부 어드메쯤부터 갑자기 시점이 섞이면서 가족가족 감성감성 쪽으로 방향을 확 틀어 버리는 게 아쉽다. 이전까지는 '음 좋아좋아' 끄덕거렸는데 이를 기점으로 '와 이게 맞는 건가' 생각이 든다. 나에게 최고작은 아직까지는 <로우>.


드림스(미셸 프랑코)

실패하지 않는 미셸 프랑코. <뉴 오더>나 <썬다운>에서처럼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충돌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주된 테마다. 사회과학적 언어로는 계급 갈등. 사운드트랙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데서 오는 청각적 압박감, 거리두기를 강요하는 듯 예상보다 한 템포씩 일찍 끊기는 샷, 극도로 절제되는 클로즈업과 관조적인 롱샷의 대비 등 미셸 프랑코의 인장은 여전하다. 다만 <뉴 오더>가 난잡하지만 대담했고 <썬다운>이 매우 독창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드림스>는 해당 테마에서 모두가 생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안전하게 풀어냈다는 인상이 강하다.


사운드 오브 폴링(미샤 쉴린스키)

개막식 이후에도 계속 취켓팅의 늪에서 허우적대게 만든 원흉. 그런데 관람하고 나서도 내 머리 터져나가게 만드는 원흉. 일단 4개의 시간선이 돌아가면서 진행되어 입력해야 할 순수 정보량이 너무 많다. 수입은 확정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인물들부터 완전히 암기하고 재감상 달리면 좀 더 호평할 수도 있겠는데 일단 아직까지는 잘?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2회차를 달린다면 올해의 아트하우스 베스트가 되거나 워스트가 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로스트 버스(폴 그린그래스)

<광야시대>가 보고 싶었지만 앞뒤로 딱 봐도 어려운 영화들이 있어서 중간에 쉬어가는 격으로 예매. 현장감 핸드헬드 GOAT셔서 다른 산불영화들과는 보법을 달리한다. 물론 그 현장감을 빼면 어디서 너무 많이 본 레퍼토리긴 한데 이게 애플티비+ 영화라서 스크린에서 볼 기회가 지금밖에 없었을 것이니 이걸 큰 화면에서 본 것만으로도 만족.


사랑이 지나간 자리(흘리뉘르 팔마슨)

무려 <갓랜드> 감독 차기작이고 미수입인데다가 힙하디힙한 아이슬란드 영화인데 부국제까지 왔으면 이거는 주워먹어줘야지. 뚜렷한 줄거리랄 게 없이 한 가족이 이혼한 뒤의 일상을 약간의 초현실적 터치를 곁들여주는데 처음에는 정신나갈 뻔 했다. 그러다가 '그래 차이밍량 형님이 대사가 있다고 해서 그 의미를 모두 알려 드는 건 우리의 강박이라고 하신 게 바로 이틀 전인데, 앞뒤의 내용이 꼭 연관성이 있으리란 법은 없지' 싶더라.(에이젠슈타인, 쿨레쇼프 오열) 그래 감독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나 한번 두고 보자 심정으로 흐름에 눈을 맡기니 의외로 재미지긴 하다. 뭐 하나 뚜렷한 게 없는 속에서도 특정 인물이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시퀀스는 기어코 애수를 자아내고야 만다. 처음에는 갸웃했지만 가면 갈수록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될 만한 그런 영화. 부국제 일정을 모두 마무리한 현 시점에서 <사랑이 지나간 자리>가 올해 best.


시크릿 에이전트(클레버 멘돈사 필류)

<바쿠라우> 너무 잘 봐서 이번에 기대했는데 무엇보다도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이름이 안 외워졌다. <사운드 오브 폴링>이 정보량이 폭발해 어려우면서도 이거 물건일지도 모르겠다는 어렴풋한 느낌은 들어서 2회차를 할 생각이 있다면 <시크릿 에이전트>는 '꼭 다시 봐야 할까' 하는 생각.


쓸모 있는 귀신(랏차품 분반차촉)

올해 아시아 영화의 새로운 발견. 처음에는 코미디로 시작해 사회 드라마를 터치하고 종국에는 B급 좀비 영화를 연상케 한다. 소재의 측면에서도 노동, 성 지향성, 민주화의 역사를 '쓸모'와 '공존'이라는 테마로 모두 아우르려 한 감독의 야심이 강하게 엿보인다. 일견 이들이 말 그대로 '터치'만 되고 지나갔다고 볼 여지도 있겠으나 오히려 조금 더 경험이 쌓인 뒤에 이 감독이 어떤 차기작을 내놓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본작이 장편 데뷔작이던데 특히 신인 감독일수록 모든 면에서 매끈하기만 한 '웰메이드'보다 울퉁불퉁하고 흥미진진한 실패작의 미래가 훨씬 더 기대되는 법. 물론 본작이 실패작인 건 아니다.


(사족)

일정 마지막 날 야외극장 옆을 지나가는데 아니 왜 양조위 형님이 거기 계세요? 이럴 줄 알았으면 배우 방문 일정을 좀 미리 체크해 보는 건데. 원래 이 정도 아니었는데 30주년이라고 부국제가 확실히 라인업에 힘을 쓰기는 했구나. 먼발치에서나마 영접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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