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 75(하야카와 치에, 2022)

by NYX


모 평론가께서 사회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뜨거운 영화와 차가운 영화로 분류한 바 있다. 그러면서 한국은 뜨거운 영화는 잘 만들지만 차가운 영화가 약하다는 평가도. 그렇다면 <플랜 75>는 그 사이, 굳이 표현하자면 '미지근한' 영역을 정통으로 겨냥한다. '국가에 의한 죽음'이라는 살벌한 주제, 노인과 청년이라는 세대 갈등적 요소라는 폭탄을 잔뜩 껴안고도 그 어느 쪽으로도 발화시키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치가 낯선 컴퓨터를 더듬더듬 사용할 때 주변의 청년들이 그걸 보고 비웃지 않고, 노인들이 모여 '요즘 젊은 것들은 쯧쯧'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노인들이 연금이나 일자리 등으로 청년들을 착취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모두 비슷한 소재의 영화를 만들 때 특정 집단에 대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사려 깊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 함정들이다. 덕분에 <플랜 75>에서 그 누구도 착취당하지 않고 착취하지도 않는다. 그 누구도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그 총합의 결과는 이러한 비극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 아이러니가 더욱 부각된다. '우리가 이렇게 고생한 걸 후손들이 알까 모르겠네', '모르면 호X 자식이네' 이런 대사 쓰는 각본가들 싹 다 엎드려 뻗쳐 진짜.


감정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비극적인 이슈를 다루면서 그 누구도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는다. 감정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 장면이래 봤자 곧 안락사를 당할 노인이 마지막 식사를 한 뒤에 먹은 것을 게워내는 장면, 안락사 대상자와 정이 들어 버린 상담사가 마지막 안내사항을 고지할 때 들릴 들 말 듯한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 정도이다. 눈물로 슬픔을 표현하고 웃음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것은 삼류 디렉션이다. 울지 않고도 슬픔을 표현할 수 있어야 일류 연기라고 할 텐데 미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서 자신의 일을 '노인들에게 마지막 말동무가 되어 드리는 것'이라고 포장하는 사내 신입 교육을 주워듣는 요코의 침묵은 일류 연기로 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담으로, 또 다른 모범 사례에는 <진저 앤 로사>에서의 엘 패닝이 있다.


이와 같이 인물들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음 미묘한 위치를 시종일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인 액션이 아니라 리액션 중심의 인물 조형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치는 친구들이 신나게 떠들 때 혼자 침묵을 지키면서 카메라에 옆모습을 비친다. 집에 혼자 있을 때에도, 안락사 장소에서 죽어 가는 이름 모를 동료 노인을 볼 때에도, 중요한 분기점마다 미치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표정으로 이를 대신한다. 이를 수동적인 인간으로 볼 것은 아닌 게 죽음이라는 거대한 숙명에 직면한 인간이 능동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라는 게 오히려 비현실적인 기대다. 결국 이 테마를 다루기 위해서는 리액션하는 인물이 담겨야 했던 것이 어찌 보면 필연적인 귀결이다.


미치 외에도 요코, 히로무 모두 특정한 집단 속에 융합되지 못하고 부유하는데 카메라는 얕은 심도를 이용하여 배경과 인물의 초점을 다르게 잡는다. 이렇게 원자화된 개인들은 성별, 연령, 경제적 계급, 직종 등 특정 사회집단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예를 들어 미치는 같은 '노인 여성' 친구들과의 교류에서 근본적인 위안을 얻거나 히로무가 '젊은 남성 공무원'에게 삼촌과의 일을 나누지 못한다. 요코가 미치와의 마지막 통화를 마친 뒤에 식당에서 보인 공허한 표정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모습이 죽음이라는 숙명을 앞에 두고 각자만의 방식으로 대면하고 있는 외로운 개인의 초상들이다. 마치 죽은 외삼촌을 태우고 화장장으로 가는 길 히로무의 차창 앞에서 흩날리다가 유리에 닿자 하릴없이 녹아 버리는 눈송이들처럼.


그렇다면 안락사를 다시 거부하고 저녁 노을 아래로 사라지는 미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예정된 죽음을 잠시 유예한 것일 뿐이다. 생물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플랜 75는 여전히 건재하고, 이를 만들어 낸 고령화라는 사회 구조도 여전하고, 플랜 75가 '내가 죽을 권리'가 아니라 '네가 죽을 의무'가 되어 버린 것 역시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죽음 권하는 사회'는 언젠가는, 아마도 조만간 확실히 미치를 죽이고야 말 것이다. 이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서 우리는 종말을 겨우 얼마간 미룰 수 있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하지만 미치가 플랜 75를 선택한 것은 사회에 떠밀려서였으나 거기서 다시 나온 것은 온전히 자신의 선택이었으니, 항상 세상에 떠밀려 다니기만 하던 사람이 유일하게 잠깐 주체적일 수 있었단 것만으로도 그 잠깐의 유예가 나름 의미 있지 않았겠는가. 적어도 입에 마스크를 쓰고 죽기 전에 끊어질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노래 한 곡조 뽑을 시간은 벌 수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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