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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Jan 15. 2021

스케치 - 종전 이후

"그러니까, 졸라 똑같앴다고. 평소랑 똑같았어, 퇴근하고 와서 슈퍼에서 맥주 피처 하나 사다가 유튜브 틀어놓고 요기요에서 카레 시켜가지고 먹다가 게임 좀 하고, 게임도 재미없어서 친구랑 카톡 좀 하다가 보일러 때고 잤어. 새벽에 미사일 떨어지데. 일어나보니까 재난문자 와서 몇 시까지 어디로 와라, 이래서 회사에 전화하니까 안 받고, 집에다 전화하니까 안 받고. 할머니도 안 받고. 

씨발 전날까지 스팀으로 게임 하고 있었다고. 퇴근해서 유튜브 보면서 졸라 낄낄거리고 있었다고.


사람 죽여 봤어? 뭘 봐, 씨발, 살인자 처음 봐? 개새끼들아. 내가 어쩌다 이 꼴이 났는데.


술 하나 더 시켜.


하튼 그래서 갔지. 어쩌다보니까 학교 선배랑 같은 분대에 들어갔는데 밤에 담배 피우다가 대가리가 날아갔어. 삼성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돈도 졸라 벌었다고. 어린 딸도 있었고. 좀 깝죽대는 어린 새끼 하나 있었는데 미필이었어. 미필이 뭘 알겠냐고, 대체. 짬찌새끼가. 근데 싹싹하데. 맨날 지 여자친구 사진 보여주면서 '형님, 군대에서 원래 전화 시켜주지 않아요?' 이 지랄 하던 새낀데, 양구에서 배꼽 아래가 날아가서 내장 질질 흘리면서 엄마 보고 싶다고 질질 짜다가 죽었어. 그걸 어떻게 잊어?


내가 어떻게 잊겠냐고, 대체. 외다리 병신이 되가지고는 다니던 회사는 폭격 맞아서 통채로 날아갔지, 개씨발 쥐꼬리만한 연금 받아가지고 술이나 처먹는데 내가 달리 할 일이 있겠어? 잊어버릴 수 있겠냐고?"


- 2029년 서울 종로의 한 술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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