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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Jan 15. 2021

지상의 주민들

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문학동네, 256-258.


남자는 길로 뛰어내려, 트렁크를 내려놓고, 처녀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려 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운전사는 몸을 기울여 남자의 코앞에서 차 문을 쾅 닫아버리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남자는 두 팔을 뻗고 입을 벌린 채 홀로 길 위에 서 있었다. 그는 어둠 속으로 빠르게 멀어져가는 트럭의 붉은 등을 바라보다가는, 이윽고 비명을 내지르며 트렁크를 들고 트럭을 뒤쫓기 시작했다. 이제 눈이 본격적으로 내리고 있었다. 팔다리를 움직이며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이 하얀 눈송이 속에서 애처로워 보였다. 꽤 오랫동안 달린 끝에 그는 숨을 헐떡이며 속도를 늦춘 다음 걸음을 멈추고 길 위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눈송이가 그의 주위에서 부드럽게 춤추며, 머리 위에 내려앉았고, 목덜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는 흐느낌을 그쳤지만 딸꾹질을 멈추기 위해 가슴팍을 두드려야 했다. 그는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고 머플러 끝으로 눈물을 닦고는 트렁크를 들고 걷기 시작했다. 반시간은 족히 걷고 난 그는 문득 익숙한 형체가 자기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녀였다. 그는 기쁨의 소리를 지르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처녀는 길 한가운데에 꼼짝 않고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쪽 손을 내민 채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탐스러운 눈송이들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얼싸안았다.


"미안하다"고 그는 빠르게 중얼거렸다. "잠시나마 믿음을 잃었는데...... 어찌나 두려웠던지! 최악의 일을 상상하고선...... 다시는 널 못 볼 줄 알았단다."


분홍 비단으로 된 예쁜 리본은 풀어져 있고 화장은 뒤범벅이 된 채 립스틱이 뺨과 목 위에 번져 있었다. 스커트의 지퍼는 떨어져나가고 없었고, 그녀는 자꾸 흘러내리는 한쪽 스타킹을 어색하게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알 수 없지, 혹시 그가 네게 나쁜 짓이라도......"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처녀가 대답했다.


남자가 기운차게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그럼."


그는 손을 들어 눈송이 하나를 잡았다.


"네가 이걸 볼 수만 있다면" 하고 그는 감탄을 연발했다. "이번엔 진짜 눈이란다! 내일은 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야. 모든 게 하얗고 새롭고 깨끗할 거야. 자, 가자꾸나! 거의 다 왔을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표지판이 나왔다. 남자는 고개를 내밀고, "함부르크, 백이십 킬로미터"라고 씌어진 표지판을 읽었다. 그는 서둘러 안경을 벗었다. 놀라움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벌어진 입은 다물 줄을 몰랐다. 그 서툰 운전사는 그들을 반대 방향으로 육십 킬로미터나 더 멀리 데려다놓았던 것이다. 그는 함부르크로 가는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딱한 사내가 자신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게 분명했다.


"가자" 하고 남자는 쾌활하게 말했다. "이제 다 왔단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얼굴을 어루만져주는 하얀 밤 속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얼마 전 눈이 많이 내렸지요. 저는 그때 재택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많은 분께서 고생 많이 하셨더라구요, 다들 큰 피해 없으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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