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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Apr 20. 2019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두목님,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아시오? 터어키 놈들의 목을 얼마나 자르고, 터어키인들의 귀를 얼마나 술에 절였는지 - 이건 크레타의 풍습이오만 - 뭐 그런 이야긴 줄 아시겠지만. 천만에요, 그 이야기는 아니오. 하고 싶지 않아. 창피하니까. 무슨 놈의 미친 지랄을 한 걸까요? ...오늘 같은 날 약간 제정신이 든 김에 나 자신에게 물어 봤어요. 도대체 무슨 지랄이 도져 우리에게 별로 나쁜 짓도 안 한 놈들을 덮쳐 깨물고 코를 도려 내고 귀를 잘라 내고 창자를 후벼 내면서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를 도우소서! 글쎄 전능하신 하느님이 남의 귀와 코를 도려 내어 작살내 버리기를 바란 것일까요!

그렇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그때는 내 피가 뜨거웠어요. 도무지 '왜'라든지 '어째서' 같은 걸 생각해 볼 수가 없었으니까요. 사물을 제대로 보고 생각하려면 나 남 없이 나이 처먹어 분별이 좀 생기고 이빨도 좀 빠져야 합니다. 이빨 하나 없는 늙은이라면 '안 돼, 얘들아. 깨물면 못써요.'하고 소리치긴 쉽습니다. 그러나 이빨 서른 두 개가 말짱할 때는.......사람이란 젊을 동안은 아주 야수 같은가봐요. 그래요, 두목님, 사람 잡아먹는 야수 말이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요, 젊은 것들은 양도 처먹고 닭도 처먹고 돼지도 처먹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처먹지 않으면 배가 차지 않는다는군요."

그는 담배 꽁초를 커피 접시에다 처박으며 말을 이었다.

"안 차지, 배가 안 차고말고. 그래, 늙은 올빼미들은 도대체 뭐라고 하고 있읍니까?"

그러나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뭐라고 할지 궁금하군요." 내 눈치를 살피며 그가 말을 계속했다. "내가 보기에는, 두목은 배고파 본 적도, 죽여 본 적도, 훔쳐 본 적도, 간음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세상 돌아가는 꼴을 알 수 있겠어요? 당신 머리는 순진하고 살갗은 햇빛에 타 보지 않았어요."
그는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나는 내 섬약한 손과 창백한 얼굴, 피투성이가 되어 진창을 굴러 보지 못한 내 인생이 부끄러웠다.

"좋아요!" 조르바는 스폰지로 닦아 내듯이 그 큰 손으로 식탁 위를 닦았다. "좋습니다요! 하지만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소. 당신은 수백 권의 책을 읽었을 테니까 아마 해답을 알고 있을 거요......"
"말해 봐요, 조르바, 묻고 싶은 게 뭐지요?"
"두목님, 여기 기적 비슷한 게 일어나고 있었읍니다. 참 웃기는 기적이어서 기가 막힐 지경이오. 우리는 반란군이 되어 그 지랄을 했는데, 사기치고, 훔치고, 죽이고 했는데, 그 때문에 게오르게 왕자가 크레타로 왔답니다. 그리고는 자유라니!"

그는 놀라움으로 휘둥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가 중얼거렸다. "신기해도 예사로 신기한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 더러운 놈의 세상에서 자유를 누리고 싶으면 살인을 저지르고 사기치고 해야 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말이 났으니까 말이지, 내가 죽이고 사기친 이야기를 다 한다면 두목님 아마 털 끝이 송두리째 설 겁니다. 그런데도 그 결과 웃겨. 자유라니! 우리 같은 것들에게 벼락을 내리지 않고 자유를 주신 하느님이라니,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는 도움을 구하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 문제로 꽤 오래 고민해 보았으나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던 괴로움이 그의 표정에 역력했다.

"두목님은 이해할 수 있겠어요?" 그가 괴로운 듯이 내게 물었다.

이해한다니 뭘?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인자라고 부르는 것, 나쁜 짓이라고 부르는 것도 세계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는 필요한 것이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또 한 가지 어려운 것은 조르바를 위한 단순한 설명을 찾아 내는 것이었다.

"식물이 어떻게 돋아나고 똥과 진흙 속에서 어떻게 꽃으로 피어나지요? 조르바, 당신 자신에게 똥과 흙은 인간이고 꽃은 자유라고 말해 보지 그래요?"
"그럼 씨앗은?" 조르바가 주먹으로 식탁을 치며 외쳤다. "식물이 싹으로 돋아나려면 씨앗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내장 속에 그런 것을 집어넣은 건 누구지요? 이 씨앗이 친절하고 정직한 곳에서는 왜 꽃을 피우지 못하지요? 왜 피와 더러운 거름을 필요로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소." 내가 대답했다.
"누가 알까요?"
"없을걸요."
"그렇다면," 조르바는 절망적으로 부르짖으며 야수 같은 시선을 주위로 던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그 배와 기계와 넥타이로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바다에 진절머리를 내던 승객 두엇이 옆에서 커피를 마시며 힘을 차리고 있었다. 그들은 신나는 말싸움이나 벌어진 줄 알고 귀를 세웠다.
조르바는 이게 역겨웠던지 목소리를 낮추었다.

"화제를 돌립시다." 그가 속삭였다. "그 생각만 하면 옆에 있는 것 - 의자고 램프고 내 대가리고 모조리 벽에다 찧어 버리고 싶다니까. 하지만 그래봐야 뾰족한 수가 있나요. 손해배상이나 하고 의사에게 달려가 대가리에 붕대만 감을 뿐이지. 하느님이 살아 있다면 이건 더 고약해. 우리가 피를 흘리는 짓은 웃겨도 많이 웃기는 겁니다. 이 양반은 하늘 위에서 날 내려다보고 배를 잡고 웃을 테니까."

그는 귀찮게 구는 파리를 쫓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렇지만 너무 걱정 마시오." 그가 후회스러운 듯이 말했다. "내가 하려던 말은 이겁니다. 왕당파의 군함이 깃발을 달고 몰려와 한참 포격하고 나서 이윽고 왕자가 크레타의 땅을 밟았을 때 이야긴데........ 섬 사람들이 자유를 찾았다고 미쳐 날뛰는 꼴 본 적 있어요? 없어요? 두목님, 그럼 당신은 눈 뜬 장님으로 살다 죽을 팔자시군. 내가 천 년을 산다 해도, 내 육신이 썩어 한 주먹 재로 남을 때까지 나 그날 본 건 잊지 못할 겁니다요. 우리가 입맛대로 하늘나라 낙원을 선택할 수 있다면 - 낙원이라면 마땅히 그런 것이어야 하겠지만 - 하느님께 말씀드릴 겁니다. '오 하느님, 내 낙원은 비너스의 신목과 깃발이 나부끼는 크레타 섬이게 하시고 게오르게 왕자가 크레타의 흙을 밟던 순간이 세세년년 계속되게 하소서.' 그것뿐입니다요."

조르바는 다시 한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수염을 거두고 찬물을 한 컵 가득 부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조르바, 크레타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겁니까? 이야기 좀 들읍시다."
"그 길고긴 이야기를 꼭 해야만 되는 겁니까?" 조르바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봐요, 내 말씀 드립지요만, 이 세상은 수수께끼, 인간이란 야만스러운 짐승에 지나지 않습니다.

야수이면서도 신이기도 하지요. 마케도니아에서 나와 함께 온 반란군 상놈 중에 요르가란 놈이 있었읍니다. 극형에 처해야 마땅한 진짜 돼지 같은 놈이었답니다. 아, 글쎄 이런 놈까지 울지 않겠어요. '왜 우느냐, 요르가, 이 개새끼야.' 내가 물었지요. 나도 눈물을 마구 흘리고 있었답니다. '너 같은 돼지 새끼가 뭣하러 다 우니?' 그랬더니 이 자는 내 목을 안고 애새끼처럼 꺼이꺼이 우는 게 아니겠읍니까. 이 개자식은 지갑을 꺼내어 터어키 놈들에게 빼앗은 금화를 주루룩 쏟아 내더니 한 주먹씩 공중으로 던지는 겁니다.
두목, 이제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 역, 고려원,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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