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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May 16. 2019

포로수용소

옛날 글 털기 - 1

1.     

아무도 포로수용소(임시)의 담당을 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략 스무 명 정도가 수용되어 있던 헌병대 한 켠의 철조망 안은 언제나 개판이었다. 몇 되지 않는 헌병들은 이미 남한군 병사들을 잡아다 관리하는 데 바빴다. 이번 주만 해도 벌써 탈영만 네 건이야, 그 중 두 명은 잡아다 지금 총살할까 말까 고민중이고, 두 명 잡는다고 지금 헌병대 인원 반이 나갔단 말요, 하고 헌병대장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빨갱이들 밥 좀 굶는 게 좀 대수요. 도망만 안 가게 잘 가둬 놓으면 그만이지. 우리 군 병사 - 이 개 잡 반란군 놈의 새끼들 - 은 내가 끝까지 잘 지켜봤다가 머리를 날려 버릴 테다, 이 겁쟁이 놈의 새끼들, 탈영에, 약탈에, 강간에, 이런 정신머리로 어떻게 싸우겠다는 거야, 하고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덕분에 빨갱이 새끼들은 배식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고, 아무도 양동이에 물을 떠다 바치고 똥구덩이를 청소하려 하지 않아서 언제나 끔찍한 냄새가 났고, 그 와중에서도 눈깔만이 독기로 번쩍번쩍 빛나서, 심지어는 불굴의 의지로 무장한 외신 종군 기자들마저도 지레 질려 발걸음을 돌렸다. 헌병대에게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무도 도망가려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주린 뱃가죽에 남조선 자본주의 짬밥이 들어가면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묘한 행복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북한군 특무상사 김원철은 정신없이 숟가락을 입에다 밀어넣으며 이 죄스런 행복감에 고뇌하고 있었다. 그 때 특무상사 동무, 하고 상급병사 리병훈이 옆에서 말을 붙였다.      


우리, 여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검메?      


그게 무슨 소리간, 하고 김원철은 눈을 부라렸다. 요 간나새끼가 왜 남 밥 먹는데 옆에서 고만 줴쳐댄다지, 오랜만에 이밥이 나와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그 부분에서 김원철은 잠시 부끄러워져 숟가락을 놓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 무슨 일이나.      


아 글쎄, 우리 동무들은 아직도 저 밖에서 싸우고 있지 않습네까. 수령 동지와 당을 위해서 말입네다. 근데 우린 여기서 이래 배불리 이밥이나 고기반찬이나 먹고 있으니......      


그래서, 무얼 하겠다는 말이네?      


무엇을 하긴 무엇을 합네까, 날래 날아야지요. 저 보라, 요새 저 남조선 제국주의자 놈들이 코빼기라도 한 번 비춘 적이 있간?      


맞소, 맞소, 하고 주변에서 동의의 웅얼거림이 일었다. 자신감을 얻은 리병훈이 말을 이었다.     


저 보시라요, 아침에 밥만 달랑 던져 놓고는 벌써 해가 중천인데 얼굴도 한번 안 비치지 않소. 고조 야밤을 틈타서 싹 빠져나가면 아무도 모를 것이 아니오.     


요 간나새끼, 주둥이 고만 다물라, 하고 김원철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글쎄, 내 말이 뭐가 그르오? 방금 상사 동무가 벽력같이 소리를 내질러도 아무도 들여다보지도 않으니 말요. 안 그렇소, 동무래?     


이 불온한 민주주의의 움직임에 김원철은 접근 방법을 바꿔야 할 필요를 느꼈다.     


야야, 고조 가만히 한 번 들어 보라. 우리가 만약 야밤에 쏙 날래 날아 나간다고 치자. 그럼 저 위병소는 어떻게 통과할 터이냐? 보라우, 여기야 경계가 허술하다 치더라도 저 정문만 해도 경비가 삼엄하다 이 말이네. 뭐, 도갱이라도 팔 생각이나? 삽은 또 어디서 구하구. 애차제차 나갔다고 치더라손, 거기서 인민군한테까지 또 어떻게 돌아갈 생각이네? 손전화도 없지, 무전기도 없지, 하다못해 총도 다 뺏겼으니.      


고거야 저 헌병대 건물 가서 빼오면 되는 게 아닙네까?     


방금 게 뉘기야?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아새끼들, 거 말을 할 거면 쥐새끼마냥 숨어 있지 말고 앞에 나와 하라. 거 숟갈도 좀 내려 놓고.      


모두가 내키지 않는 듯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잘 들으라, 물론 언젠가는 달아날 게야. 위대하신 수령 동지가 이끄는 인민군이 팔매질로 단박에 요 기지 전체를 폭삭 무너뜨릴 거란 말이야. 그렇지 않더라고 해도 충분히 채비가 되면 요까짓 담장이야 얼마든지 나갈 수가 있어. 내 말은 그까지 힘을 충분히 기르고 대비를 하자는 거지. 자 보라, 동무들은 이북에서 요런 밥 먹어본 일이 얼마나 되나. 이래 적의 심장 속에서 식량도 축내고 안에서 이간질을 열심히 해서 분열을 하고 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라 이검메. 안 그렇네? 그러니 고만 고대고 내 말만 믿으라. 발면발면 토끼는 것보다 주요한 과업을 우리는 맡고 있다구, 당과 수령 동지를 위해.      


횡설수설 늘어놓은 말에 특무상사 휘하의 포로들은 사뭇 탄복한 듯 보였다. 누군가 입을 열었다.     


요샌 그나마도 아이 주지 않소?     


요번엔 또 어떤 새끼네?     


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고만하라, 고조 입 닫고 밥이나 먹으라우. 그리구 말이야, 눈깔 똑바로 뜨라. 남조선 돼지들의 밥을 먹어도 우리는 자랑스러운 북조선 인민군이니. 절대 기죽지 말라. 얕보이면 안 된다.     


험하게 말을 내뱉기는 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쌀밥에 고기반찬이라도 배식은 갈수록 뜸해졌고, 때론 하루를 밥 없이 꼬박 지낼 때도 있었다.      


이런 제기, 김원철이, 너도 자본주의에 찌들었구만 그래. 하고 씁쓸히 되뇌면서도 김원철은 밥알 한 톨마저도 싹싹 핥아 먹었다.          


2.     

충성, 병장 이 원 호입니다. 잠시 들어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하고 헌병대장 김창원 중령은 씹듯이 내뱉었다.    

 

충성! 병장 이 원호, 대장실에 용무가 있어.....

.     

됐고, 뭐야. 탈영병은 잡았어? 위에서 난리가 났어, 이 새끼야. 바짝바짝 좀 하란 말이야.     


아닙니다, 아직 쫓고 있습니다.     


그럼 뭐야, 빨리 말해.     


저, 그것이......     


뭐야, 임마.     


그게 왜, 저희 건물 옆에 포로수용소 있지 않습니까, 그 북한군들 있는,     


그게 뭐. 빨갱이 새끼들 중에 누가 나갔대? 니새끼들 요새 거기 관리 안하더라. 내가 슥 지나가면서 봤는데 앞에 아무도 없어. 니도 영창 가고싶냐?     


죄송합니다. 근데 말입니다.     


뭐야, 뭔데. 히스테릭하게 김창원 중령이 소리를 질렀다.     


그게 말입니다, 저 그,      


아이 씨발, 너새끼 말 똑바로 안할래?


그게, 오늘 아침에 말입니다, 저놈들 중 한명이 와서 데모를 하겠다는데 말입니다......     


뭐?     


잘 못들었습니다?     


들었잖아, 이 새끼야.     


데모를.......     


데모는 염병, 무슨 얼어죽을 데모야, 저 빨갱이 새끼들이 데모하는 법을 알기나 하냐.      


한번 직접 와 보시는게 좋을 것 같으시지 말입니다.......   

  

뭐 임마?      


.....     


뭐라 그랬어?     


아니, 저쪽에서 자꾸 대장님과 이야기하겠다고 말입니다.......     


하........     


대답 대신 헌병대장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빨갱이 새끼들 뭐가 부족해서 지랄들이람. 밥을 안 줬어, 옷을 안 줬어, 침낭을 안 줬어. 저 북에서는 이런 거 구경이나 했을지 몰라. 처음 밥을 줬을 때 눈알이 휘둥그레져서 정신없이 침을 질질 흘리던 첫 포로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발, 숟가락이고 나발이고 맨손으로 처먹더만. 개중에는 목이 막혀 켁켁거리던 병사도 있었다. 흙바닥에 떨어진 밥알도 주워 먹던 새끼들이...... 데모? 데모 좋아하네. 오라, 가만 보니 아주 데모가 빨갱이들 종특이구나. 아주 종북세력부터 뿌리를 뽑았어야 하는데. 그걸 제때 못하니까 지금 요 사단이 난 게 아니야. 몇 년만 있었어도 그는 전역을 했을 터였다....... 간신히 연금 받을 때 되니까 이 지랄이 나잖아. 좆같은 인생이야, 정말.      


대장님?     


뭐, 새끼야.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용무 마치고 돌아가 봐도 되겠습니까?     


어, 가. 그리고 방금 얘긴 못 들은 걸로 하겠다. 알아서 처리하도록.     


옛슴다.     


3.     


그러나 못 들은 체 할 수 없었다. 건방진 빨갱이 새끼들은 보다 적극적인 노선을 취하기 시작했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빨간 띠를 이마에 두르고 - 밤낮도 가리지 않고 – 시끄럽고 어지럽게 각종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강성대국, 평화통일, 식료보장, 어쩌구, 저쩌구.      


결국 배가 고프다 이거지, 하고 김창원은 생각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포로들은, 경비를 서던 한 상병 머리 위로 똥구정물을 쏟아 붓는 것으로 더욱 투쟁적인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아니, 대장님, 흑, 그 빨갱이 새끼들이 제 머리 위로 똥구정물을 쏟아 부었습니다,     


하며 눈물인지 똥물인지 모를 액체를 얼굴에서 질질 흘리며 하소연하는 그 병사를 우선 사무실에서 쫓아내고, 야, 너 가서 대걸레 들고 내 사무실 청소 좀 해놔라, 하고 명령을 내린 뒤에,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김창원 중령을 권총을 뽑아들고 건물 뒤의 포로수용소로 뛰어갔다.     


이 빨갱이 새끼들아, 뭐가 모자라서 이 지랄들이냐, 엉?     

당신이 여기 대장임메?      


하고 오만불손하게 묻는 중년의 군인을 보며 헌병대장은 그쪽으로 성난 눈길을 돌렸다.     


그래, 이 새끼야. 그럼 니는 여기 대장이냐?     


누군지 먼저 이름부터 대는 게 예의 아니오? 남조선 예법이 기래 가르쳤소?     


뭐라, 이 개.......     


나 특무상사 김 원철이요. 그쪽은 함자가 어떻게 되오?     


알 거 없다. 이 총 보이냐? 이게 곧 니들 대가리에 총알을 박을 거거든. 13발 들어가는데 어디 보자, 총알이 모자라면, 야! 너 이리 와봐.     


똥물을 뒤집어쓴 병사 대신 보초를 서던 병사가 쭈뼛쭈뼛 물었다.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 이 새끼야. 빨리 안와? 관등성명 안 대지?     


일병 이 민 준.     


그래, 여기 민준이가 모자란 총알을 보충해서 니들 대가리에 꽂아 줄 거다.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특무상사는 말을 이었다.    

  

아 글쎄, 대가리에 총알을 어디에 꽂던 어쩌던 밥은 주고 꽂아야 하지 않갔소? 남한에서 포로 대접을 이렇게 하나?      


아니, 니들 다 즉결처분이라니까? 어딜 감히....... 어안이 벙벙해진 헌병대장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왜 남조선 속담에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하지 않슴메. 그리고 제네바 협약 모릅네까?   

   

뭐?      


제네바 협약 말입네다. 포로 죽이게 되어 있간?     


그렇다. 제네바 협약이 있었다. 안 그래도 옆 부대에서 독단으로 포로를 처형했다가 사단이 난 일이 있었다. 외신 보도로 인해 난리가 난 상층부에서 아래로 공문을 쫙 뿌렸기 때문이다. 친절하게도, 제네바 협약의 전문과 함께.      


부상 등으로 전투력을 잃은 군인이나 적대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인도적으로 대우해야 하며, 다음 행위는 금지된다.     

. 모든 종류의 살인, 상해, 학대 및 고문

. 인질로 잡는 일

.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침해, 특히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대우

. 정상적인 재판 없이 형을 언도하거나 집행하는 것.

부상자 및 병자는 수용하여 간호하여야 한다.     

의도적인 살해, 고문, 비인도적인 대우 (생물학적 실험 포함).

의도적으로 중상을 입히거나 심한 고통을 주는 행위

적을 위해 복무하도록 강요하는 행위

전범으로 기소했을 때, 의도적으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박탈하는 행위.’     


저 간사한 빨갱이 새끼가, 하며 헌병대장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아랑곳않고 북한군 특무상사 김원철은 주절주절 제네바 협약의 포로관리조약을 읽어댔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침해, 특히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대우, 정상적인 재판 없이 형을 언도하거나 집행하는 것......     


알았다, 알았어, 이 개새끼야.      


개새끼라니 거 말이 좀 심하시구만 기래. 이거 굉장히 모욕적인데, 안 그렇소 동무래?     


기리티, 기리티.     


됐고, 뭐야 그래서.    

 

에헴, 하고 김원철은 목을 가다듬었다.     


먼저, 삼시세끼 배식을 정량 맞춰서 배식할 것. 둘째, 모자란 침구류와 베개를 보급해 줄 것. 셋째, 밤이 추우니 석유난로를 들여놓을 것. 넷째, 남조선 잡지와 신문을 보급할 것.     


마지막 조항은 오로지, 어디까지나 남조선의 정황과 세태를 파악하기 위함이라고 김원철은 애써 힘주어 말했다.     


어이가 없군, 어이가 없어. 협상 결렬이다. 우리 애들도 지금 모자란 판에, 니들 먹이고 입히고 재울 것까지 우리가 부담하라고? 가서 니네 돼지새끼한테나 달라고 해라.     


그건 동무가 내보내 주면 기리 하디요.      


한바탕 웃음이 터졌고, 대한민국 육군 헌병대장 김창원은 시뻘게진 얼굴로 발걸음을 돌렸다.     


동무!     


뭐야!      


이름을 못 들었소.     


시발, 시발, 시발....... 하고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며 그는 간신히 이름 석 자를 내뱉었다.     


김창원이다.      


어디 김씨요.     


이 개......해주 김씨다.     


아 기래? 우리 먼 친척뻘 되지 않소? 동무들, 뭣들 하네, 저 우리 친척 어르신 가신다. 바래다 드려라.     


스물 남짓의 북한군 포로들이 얼굴 가득 비죽거림을 품고 친절하게 입구까지 그를 안내해 주었다.      


그럼 잘 가시오, 좋은 소식 기대해도 되겠소?      


하고, 한 걸음만 나가면 철조망 밖인 것을, 마치 그 사실을 알고도 약을 올리듯 특무상사 김원철은 딱 멈춰 서서 우스꽝스럽게 경례를 붙였다.     


분노로 비틀거리며 김창원은 대장실로 돌아왔다. 아직도 공기 중에서 희미하게 똥내가 떠돌았다.           


4.      

그 후 몇 명의 병사가 더 똥물을 뒤집어쓰고, 병사들의 귀가 북한 군가로 딱지가 앉을 무렵, 마침내 김창원 중령은 병사들을 모아 용감한 자원자를 뽑았는데, 당연하게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요 며칠간 잔뜩 짜증이 난 대장이 그 아래 간부들을 갈구고, 간부들은 그 아래 선임병들을 갈구고, 선임병들이 후임병을 갈군 끝에서도 차라리 얼차려를 서면 섰지 시도 때도 없이 똥물을 뿌려대고 군가를 불러대며 악독한 눈빛으로 쏘아보기나 하는 빨갱이 새끼들의 수발을 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적군에 대한 반감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우리도 이 개고생을 하는데 저 새끼들 배부르게 먹이려고 그 무거워빠진 밥통 들고 나르라고? 똥통도 치우고? 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어.      


국군의 아름다운 전통 - 까라면 까 - 가 더 먹히지 않는 지점에 다다르자 마침내 제비뽑기를 할 상황까지 왔는데, 그 상황을 모면하게 한 것은 얼마 전부터 마침 부대에 머무르게 된 군종병 최준호였다. 덩치가 산만하고 하루만 면도를 하지 않아도 산적처럼 수염이 나 ‘곰’이라 불렸던 그는 덩치만큼이나 신앙심도 커서, ‘이 불쌍한 북의 동포’들을 위한 봉사에 선뜻 자원했던 것이다. 이 결정이 내려진 순간 모두가 - 남과 북의 군인들 - 기뻐했고, 이는 요 며칠 사이의 지난한 데모와 그 진압 과정 중에 임시로 밥통과 반찬통을 나르던 취사병들 역시 마찬가지여서(식당과 포로수용소까지의 거리는 꽤 엄청났기 때문이다), 북한군 포로들에게 배식할 밥에 예전보다는 침을 덜 뱉게 되었다.

      

민주적 절차를 통한, 제2차 한국전쟁의 첫 협상이 – 그것도 수뇌부 간이 아닌 전장의 포로수용소에서 - 이루어진 역사적인 아침, 마침내 우리의 군종병은 첫 임무에 나섰다. 밥통을 한 번에 두 개씩이나 들고 나르는 그의 성자와도 같은 모습에 모두가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창원 중령은 비로소 콧속을 간질이던 똥내가 사라진 것만 같은 감격에 무심코 눈시울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이는 북한군 포로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오랜만에 맡는 쌀밥의 냄새에 먼 고향마저 떠오르게 했던 것이다.     


얼굴 가득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군종병은 쿵, 하고 밥통과 반찬통을 철조망 안에 내렸다. 포로들이 함성을 지르며 정신없이 식판에 달려들었는데, 그들을 제지한 것은 특무상사 김원철이었다.      


좀 기다리라우, 동무들. 우리 고귀한 투쟁의 결과물에, 비열한 남조선 자본주의자 승냥이들이 독이라도 타 놓았을지 어티 알겠네? 내 먼저 먹어 보갔어.      


그 모습을 철조망 너머로 내다보던 보초가 분통에 차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를 띤 군종병이 그를 제지했다.     


아닙니다, 형제여. 우리는 다 같은 민족이고 하느님 아래 모두 한 가족이지 않습니까. 어찌 그런 사악한 짓을 하겠어요. 밥은 많이 있으니 양껏 드시고, 모자라면 더 말씀하십시오. 주걱 주십시오, 제가 퍼 드리겠습니다.      


하느님 어쩌고 하는 소리에 김원철은 순간 빈정이 상했지만, 그보다는 허기가 앞섰기 때문에, 됐소, 내가 퍼겠소, 하며 주걱을 빼앗아 들고 정신없이 잔뜩 밥을 퍼 담았다. 자, 이제 이 식판을 요 작은 걸상에 올려 놓고, 사람이 개새끼도 아니고 상에 놓고 밥을 먹어야지, 기리티 않아? 아, 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이밥 좀 보라, 저 반찬은 어떻고, 김치에도 고만 고춧가루가 새빨갛구나 기래, 냄새부터 맡아 보아야지, 아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깃국이 다 나왔구나, 저 기름 동동 떠다니는 것 좀 보아, 우리 어머니께도, 이미 돌아가셨구나, 참, 그래도 먹여 드리고 싶구나야, 이제 한 숟갈 먹어 보아야지, 아니다 김원철이, 부하들이 보지 않네, 독이 들었을지 모르니 천천히 먹어 보아야지, 명심하라우, 천천히 뜨라, 천천히.......     


하며 그가 입으로 숟가락을 가져가려는 순간, 억센 손이 그것을 저지했다.     


기도하셔야죠, 형제님?     


뭐이라?     


기도를 빠트리셨습니다.     


기도는 예미, 간나새끼, 일 없다.     


순간 억센 손이 그의 머리를 덮쳤고,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은 방금까지만 해도 그토록 황홀해 마지않았던 밥알과 고깃국물 속에 처박혔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사건에 모두가 말문을 잃었다. 더러는 숟가락을 땅에 떨어트리기까지 했다.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는 너무 놀라 앞에서 지나가던 중대장에게 경례하는 것도 잊었다.     

물론 가장 당황한 것은 얼결에 뜨거운 국물에 빠진 김원철 특무상사였다. 뜨겁고 숨이 막혀 정신없이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들짐승에게 모가지가 물린 것 마냥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어 걸상 위 식판에 머리를 그저 처박고 있을 뿐이었다.      


쌍간나새끼가, 이게 무슨 짓이네?     


얼굴에서 뜨거운 국물을 뚝뚝 흘리며 김원철은 부르짖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여전히 온화한, 그러나 어딘가 섬뜩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곰 같은 사내의 얼굴이었다.      


기도를 하지 않으시면 밥은 줄 수 없습니다.      


기도같은 소리 하고 앉았구만 기래. 요 방자한 미추과이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인 거 모르네?      


그의 얼굴이 두 번째로 처박혔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더 이상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느님의 이름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이 종간나새끼.......하며 김원철은 걸상을 뒤엎고 - 고깃국물이 흙바닥에 스며드는 것을 보니 마음이 좀 아프긴 했지만 - 분노에 가득 차 간악한 승냥이에게로 달려들었지만, 단숨에 목이 붙들려 공중으로 몸이 붕 떠오르는 통에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거 안 놓네? 요 나약한......     


그러나 이 정신나간 사내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오른손으로 열심히 성호를 그으며 알 수 없는 기도를 주워섬길 뿐이었다.     


하느님 아버지, 이 형제를 용서하여 주시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고......     


마침내 그가 땅에 다시 발을 딛었을 때, 차마 숨이 막혀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 우리의 군종병은 다시 밥통과 반찬통을 들고 어느덧 철조망 밖으로 나가려 하고 있었다.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보초에게 까딱 인사를 하며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초 또한 얼이 빠져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5.      


그날 밤, 김원철은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배고픈 것도 배고픈 것이었지만, 모멸감과 굴욕감이 그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위대한 수령 동지의 군대에서 배고픔을 참고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을 헤쳐왔다, 땅굴도 파 보고, 비무장지대에서도 오래 복무하지 않았는가, 몇십년을 고생해 특무상사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번 전쟁에서도 남조선 병사들의 목을 몇이나 따지 않았나, 비록 잠깐의 미숙함으로 지금은 포로수용소에 와 있지만, 그래도 여기서도 내 지도는 동무들을 투쟁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런데 요 씨알머리없는 개간나에게 이 무슨 굴욕이냐, 있지도 않는 신이나 찾는 저 나약한 야소쟁이에게 모가지가 붙들려, 아아,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그것도 부하 동무들 다 보는 앞에서, 이게 무슨 볼썽머리없는 꼴이냐.     


동시에 강한 분노가 치밀었다.

    

다들 일어나 보라.  

   

하나둘씩 내키지 않는 듯 몸을 일으키는 그의 부하들에게 사정없이 발길질을 하며 그는 모두 일으켜 앉혔다.     


동무래, 왜 아까 가만 보고만 있었네?      


모두가 서로 눈치만 보며 쭈뼛거릴 뿐이었다.      


대답해 보라우. 리병훈이, 네놈은 대장 동무가 당하고만 있는데 그저 보고만 있네?     


리병훈 또한 그의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보라, 동무들, 우리가 투쟁해서 얻어 놓은 것이 겨우 남조선 제국주의자 승냥이들의 간계였을 따름이야. 아까 전부 듣지 않았간? 기도를 하라니! 우리의 충성은 오직 인민과 수령 동무와 당에 바치는 거 아니나? 이 사악한 야소쟁이, 나약한 아편쟁이 함정에 우리를 또 몰아넣지 않았나! 잘 들으라. 불굴의 가열찬 총포탄 정신으로 우리는 다시 투쟁이다. 알아듣갔어? 고 간나새끼는 여기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라우. 다시 또 투쟁, 투쟁이야! 알갔어!     

예에, 하는 맥빠진 대답이었지만 그는 자못 흡족해했고, 비로소 잠에 들 수 있었다. 아까의 고깃국이 눈앞에 여전히 아른거리긴 했지만.     


한편 그때, 헌병대장 김창원의 사무실에서는 조촐한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김창원이 군종병에게 맥주캔을 건넸다.     


아휴, 마시라구, 마셔. 술 먹으면 안 되나?     


아닙니다,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는 적절하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괜찮아, 괜찮아. 야, 너 가서 문 잠그고, 어디 전화 오면 나 잠깐 나갔다 그래. 그래, 빨갱이 새끼들에게 본때를 제대로 보여주셨다면서?     


아닙니다, 그저 주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모습에 마음이 좀 아팠을 뿐입니다.     


그게 그거지, 참, 하느님 아버지 덕에 내 체증이 싹 내려갔어. 빨갱이 새끼들, 밥 달래서 줬더니 안 먹겠다면 말아야지. 줘도 지랄이야 줘도, 그렇지 않아? 야, 병사야, 니도 와서 한 캔 해라. 모자라면 피엑스 가서 더 사오면 되니까. 그리고 자네, 힘든 일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라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선에선 해결해 줄 테니까.      


예에, 하고 그는 또 온화로운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럼 내일도 또 가는 거지?      


그렇습니다. 형제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까지요.     


그래, 복음 좋지, 가서 열심히 하라고!     


기쁜 마음으로, 김창원 또한 잠에 빠졌다.      


다음날, 특무상사 김원철이 김창원을 보기로 했다는 말을 전하러 온 병사는 또 겁에 질려 조심스레 대장실의 문을 열었지만, 의외로 흔쾌히 그러마는 말에 당황해, 언제 또 기분이 바뀔지 모르겠다는 불안으로 재빨리 말만 전하고 달아났다.     


때는 오후 2시, 흙바닥에 밥알과 김치가 너부러져 있었고, 그 모습에서 어제 일이 다시 일어났음을 짐작한 김창원은 흡족한 미소를 만면에 띠고 김원철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친척 양반. 어째 밥이 좀 입맛에 맞으시나? 우리 취사병 애들이 밥 하나는 또 기가 막히게 짓거든, 오늘 점심이 아주 괜찮더라고, 많이 좀 드셨나 그래?      


대장 양반 나하고 지금 농지거리 하는 겝니까?   

  

아뇨, 농지거리는 무슨, 내가 우리 애들한테 신신당부했는데. 제네바 협약에 따라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해라, 우리 손님들 밥 곯는 일이 없도록 하라구.      


고 주둥이 닫으라! 쌍간나새끼, 우리랑 지금 장난하자는 겁메? 철부지마냥 짤까닥대니 거 재미가 좋소?     


왜요, 왜요, 아이구 참, 쌍간나새끼라니 입이 좀 험하시네그려. 친척 아저씨한테 욕이나 하라고 가르치는 게 북조선 예법이오?     


집어치우라! 당장 그 미추과이 야소꾼 여기 다시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라. 그 날까지 우리 일당 동무는 모두 투쟁할 것이야.      


그래, 그래, 맘대로 하세요. 투쟁을 하던, 데모를 하던. 밥 달라는 대로 줬더니 이제는 반찬투정까지 하시네. 아니, 뜨끈뜨끈한 밥 갖다 줬는데 밥상머리 뒤엎는 게 이게 말이야 똥이야. 허허.      


내 두고 보갔어. 우리는 불벼락 같은 정신으로 -      


불벼락 좋아하시네. 내 보기엔 오래 못 가. 어이, 거기, 그래도 떨어진 거 주워먹으면 안 되지.  

   

김원철이 휙 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뒤에 앉아 있던 상등병 하나가 침을 뚝뚝 흘리며 땅에 떨어진 코다리강정 조각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어, 그는 재빨리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종간나새끼, 정신 똑바로 차리라! 띠커운걸 뭐하러 주워 먹네? 니가 꽃제비 새끼나?     


깔깔 웃으며 김창원은 수용소의 철조망 문을 열고 나갔다. 보초에게 건네는 친절한 인사와 함께.     


열불이 터진 김원철은 다시 투쟁의 방법을 강구했다. 똥물 엎기, 군가 부르기, 남조선 병사들 야유하기, 투쟁, 투쟁......이런 제기, 또 무엇이 있나. 그도 배가 고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6.     


곰은 지치지도 않았다. 결사항전으로 스크럼을 짜 입구에서 저지한다는 방법은 김원철과 그의 투쟁 용사들이 생각해도 현실성이 없었다. 굳건히 짠 포로들의 진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신의 사자 앞에 주춤대더니 흩어져 버렸다.      


다들 정신 차리라!      


주변의 동요와 공포를 느끼면서도 김원철은 필사적으로 소리쳤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빈터 가운데 홀로 덜렁 선 그는 절망감 속에 이 거구의 사내에게 돌진했으나 곧 부드럽게 몸이 붕 들려 거칠게 옆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형제님, 죄송합니다. 제가 힘 조절이 미숙해서 그만......     


하고 너털웃음을 짓는 그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에 인민군 특무상사는 이를 갈았다. 그러나 대놓고 맞설 용기는 없었다. 승냥이 같은 심보만큼이나 손아귀 힘도 무시무시했기에.     


잘 들으라, 고조 저 밥에 손톱이라도 대는 놈은 내 가만 두지 않갔어!     


예에, 하는 맥빠진 대답만이 울렸다. 공포가 가시고 나니 비로소 곰이 가져온 식량이 눈에 띄인 것이다. 어디 눈에 뿐인가, 코에 닿는 따뜻한 밥의 향기가 정신을 고만 노곤하게 만들었다....... 요 형세라면 얼마나 갈지 모르겠구만, 하고 김원철은 생각했다. 배고픔이, 공포와 상사에 대한 존경심을 언제 능가하게 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북에서라면 달랐다. 공포가 너무 커, 굶주림마저 집어삼켜 버렸다. 이것은 말 그대로 죽고 사는 문제였다. 공포 속에 죽거나, 공포 밖에 죽거나. 후자의 경우 그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그의 부대에서 탈영병이 나온 적이 있었다. 강에서 미간 사이에 큰 구멍이 뚫린 채로 그는 발견되었다. 이 일로 그의 부대 전체는 말로 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많은 머리가 굴렀고, 많은 시간 허리를 펴지 못했고, 많은 지방을 거쳐, 많은 자아비판을 통해 그는 그런 생각을 버렸다. 대신 공포를 배웠다. 공포가 어떻게 사람을 굴복시키는지를, 공포가 어떻게 인간의 기본적 욕구마저도 집어삼키는지를. 공포가 그의 일부분이 되고, 그도 공포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는 그 공포를 존중했고, 신뢰했고, 또한 사랑했다....... 그런데 요 간나새끼들 좀 보라. 배때지가 불러 나약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아무도 식사 안 하시렵니까?     


일 없다, 하고 김원철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하고 군종병은 유쾌히 대꾸하고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작은 책 한 권을 꺼내 들고 태연히 읽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적개심에 가득 차 김원철은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 사뭇 목가적인 풍경은 얼마 가지 못했다. 굶는 데라고는 이골이 난 그들이었지만 눈앞에 둔 밥을 두고 가만있을 정도로 참을성이 좋진 못했다. 어느 밤, 모두가 주린 배를 안고 누워 있을 때, 리병훈이 또 말을 걸었다.     


상사 동무.......     


아무 말 말라.    

 

좀 들어 보시라요.......

    

고만 하라우, 알겠네?     


글쎄 밥은 먹어야 하지 않갔습네까, 눈앞에 밥을 두고 가만히 보고만 있슴메?     


내 닥치라 했디. 고만 하라.     


동무......     


에이, 간나새끼. 내 고만하라 하지 않았어!     


리병훈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배신은 이레째에 일어나고야 말았다. 한국군이나 미군에 비하면 현저히 열악한 신체조건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북한군의 정신력 때문이었고, 이는 분명 대단하다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쫄쫄 굶으면서도 김원철은 초인적인 자세로 부하들을 감시했고, 그 때문에 불벼락이나 맞아 죽을 야소꾼은 감히 인민군에게 쌀알 한 톨 내주지 못했다(적어도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특무상사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밤에 그는 돌아갔고, 부하들의 야속한 눈길을 애써 무시하며 그는 잠에 들었다. 이레째, 너무 늦게 일어난 것이 실책이었다. 주린 배를 안고서도 어쩐 일인지 그는 오랜만에 푹 잤고, 푹 자고 일어나 보니 모두가 정신없이 주둥아리에 밥을 처밀어넣고 있었다. 그 모습을 곰은 흐뭇하게 바라보았고, 한없이 자상한 미소로 급한 그들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형제님들, 천천히 드세요, 천천히. 밥은 아직 많습니다.      


어안이 벙벙해 그 모습을 김원철은 그저 쳐다보았다.     


네놈들 뭣들 하네.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들 귀가 먹간? 뭣들 하냐고 내 묻지 않았나?     


일어나셨습니까, 형제님. 여기요, 형제님 밥도 퍼 두었습니다.     


일없다, 저리 치워라, 하고 그는 분노에 차 식판을 들어 내던졌다. 비틀거리며 그는 정신없이 숟가락을 놀리는 한 병사에게로 향했다.      


야, 이 쌍간나 새끼야, 니는 상급자 말이 우습니? 내가 무어라 했니, 손톱이라도 이 야소꾼이 주는 밥........     


야소꾼 운운하기가 무섭게, 다시금 너무나도 익숙한 손길이 그의 목을 덮쳤고, 익숙한 흙바닥에 김원철의 얼굴이 꼬라박혔으나, 그의 분노는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 나약한 도야지 새끼들이, 이 나약하기 그지없는, 네놈들이 그러고도 위대한 인민군이야,     


고래고래 그는 공화국이니, 당이니, 수령이니, 인민이니 하는 말을 주워섬겼다. 허나 머뭇거리던 병사들은 군종병의 온화한 미소에 다시금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    

   

오병이어 한 소년이 드렸던 보리떡 다섯 개

오병이어 한 소년이 드렸던 물고기 두마리

거기에는 완전한 나눔이 거기에는 참된 기쁨이

나누는 사랑에는 자기 것 찢기는 희생과 아픔 있지만

그곳엔 평안과 기쁨이 있어

그곳엔 감격과 확신이 있어     


김원철의 지치고 굶주린 목소리는, 우렁찬 가락에 이윽고 묻혀 버리고 말았다. 힘없이 꿈틀거리며, 그는 마침내 의식을 잃었다.     


여드레째 되는 날, 모두가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김원철은 여전히 배고픔을 택했다.    


      

7.     


...너희는 모두 이를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흰 쌀밥이 식판 위에 담겼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기름기가 도는 국물이 뜨거운 김을 내며 쏟아졌다.     


아멘, 아멘.     


얌전히 밥이나 처먹지, 온갖 지랄들은 다 하고 있구만 기래.      


식사가 끝나고 나면 미사가 시작되었다. 김원철의 눈에는 정신나간 기도놀음에 불과했지만.군종병 최준호가 사뭇 위엄있게 두 손을 하늘로 높이 쳐들면, 북한군 포로들은 머리를 푹 쳐박고 중얼중얼, 손을 모으고 줄을 길게 서서 앞(이라봤자 금 그어 놓은 흙바닥의 저편)에 갔다 돌아왔다 무릎을 꿇고 야단이었다.     


그 모습을 김원철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때리고, 욕을 퍼붓고, 살살 구슬리고, 불같이 화를 내고, 걷어차고, 수령 동지와 당에 대한 충성과 고향에 있는 가족과 부대에서 기르던 염소나 개새끼마저 들먹여 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공포는 더 이상 그들을 붙잡아 두지 못했다....... 처음에는 물론 배고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것들이 그들을 붙잡아 두고 있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며 그의 말에 복종하는 시늉이라도 했던 그들이, 이제는 낯선 눈빛으로 김원철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텅 비어있음과 동시에 무언가로 가득 꽉 차 있었다.


그것이 연민이었는지, 동정이었는지, 김원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오직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눈빛 속에 이제는 완전한 타인만이 들어앉아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제 김원철은 두려워졌다. 그는 더 이상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노래를 부르며 신을 찾았다. 익숙한 사투리가 낯선 이름을 부르는 모습에 그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리는 놈이 있었다. 땅에 고개를 처박고 쉴새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놈도 있었다. 서로 손을 붙들고, 끌어안으며, 알 수 없는 눈빛을 하고 서로에게 미소 짓는 그들이 너무도 낯설었다. 그리고 곰 같은 사내가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를 한가득 지으며 그들 모두를 보듬었다.   

  

반대급부로 그는 점점 말라만 갔다. 낮이면 최대한 야소꾼의 무리에서 떨어져 네모난 철망 속 한 구석으로 파고들어 갔다. 밤이면 한때 그의 옆에서 싸웠던 동지들이 조금씩, 말없이 가져다 준 작은 자비로 허기를 채웠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 덕에 아직 그는 살아 있나니. 한때 위엄 넘치는 군인이었던 조선인민육군 특무상사 김원철은 이제 비쩍 마르고 눈이 움푹 들어간 비참한 사내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그의 유일한 희망은 언제 있을지도 모르는 포로 교환 행사였다. 운이 없어 어쩌다보니 수용소 보초를 벌써 한 달이나 서게 된 한 병사는, 긴 머리는 떡이 지고 삐죽삐죽한 수염이 잔뜩 자란 채, 기이하게 눈을 빛내며 날이면 날마다 포로교환이 언제쯤 있을 것 같냐고 물어 대는 이 사내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남한군 헌병대장 김창원 중령이 포로수용소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아, 오랜만이다, 이 빨갱이 놈들아, 이제 예수쟁이들이라 불러야 하나, 거 다 좋은데 찬송가는 좀 낮에만 부르라고, 꼭두새벽부터 시끄러워 죽겠어. 자, 니들이 기뻐할 만한 소식이 있다. 포로 교환 예정이 잡혔다. 3일 뒤다. 내가 손을 좀 썼지, 니들 얼른 집에 보내 치우려고. 계속 여기 붙들고 앉아 있는 것도 귀찮기도 하고 말야. 질문 있나?      


방금 들은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 김원철은 귀를 후비고 다시 물었다. 대장 동무, 그게 참말임메?     


아이고, 이거 우리 친척 어르신 아니신가. 그럼 참말이고말구. 어때, 돌아가게 되니 좋지?    

  

기리티, 기리티요, 이거 감사합네다, 정말 감사합네다. 뭐하네, 어서 감사드리지 않구.    

 

아, 드디어 집에 돌아간다. 이 썩어빠진 반동분자들을 뱃속까지 싹싹 긁어내 제대로 사상교육을 시켜 주리라. 아니, 그럴 기회도 없을지도 모른다. 네놈들은 가자마자 총살행이다, 나는 이야기가 다르지, 수령동지께서 끝까지 당에 충성을 지킨 나를 높이 사 인민 영웅으로 삼으실 게야. 온갖 기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일 없습네다.      


뭐이? 방금 게 누구네?      


당황한 김원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창원이 눈빛으로 그를 저지하고 다시 물었다.      


누구야, 방금.     


리병훈의 손이 올라갔다.      


우린 안 돌아갑네다. 남조선에 남아 복음의 뜻대로 살겠습네다.      


이번엔 도무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 반동분자 새끼들, 다들 대가리에 총탄이라도 맞았네? 이게 무신 소리간? 조국과 인민을 버리겠다 이 말이네? 야야, 헛소리 말라!      


하느님 아래는 조국도 인민도 없소, 상사 형제.     


형제는 뉘가 네 형제나? 니 멫살이나 먹었네? 내가 네놈 오마이 젖이나 빨 동안 벌써 군에 있었디, 요 건방진 간나새끼가.......     


그러나 그들은 조용했다.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알 수 없는 무력감에 그는 김창원에게로 향했다.     


대장 동무, 이 어티 좀 해보시라요, 이짝에서 가지 않으면 저짝에서도 못 오는거 아닙네까, 위에서 명령을 이리 벌써 내렸는데 요 반동분자 놈들, 포로놈들 몇 마디에 계획이 다 틀어진다는 거이 말이나 되는 소립네까, 대장 동무.......     


아니, 뭐 상관없는데. 귀순자 생기면 나야 좋지. 포로 정신교육 잘 시켰다고 칭찬이나 들으면 들었지. 그리고 뭐 포로야 다른 부대에도 많으니까 거기서 데려가면 된다구. 어차피 머릿수 채우는게 목적이니까.    

 

대장 동무......     


됐고, 그럼 전원 귀순으로 친다. 야, 병사야, 쟤네 명단 적어 놔라.      


망연자실해진 김원철은 다리에 힘이 풀려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귀에는 이름을 묻는 소리가 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싶었다. 뒤에서는 한때 동료였던 자들이 서로를 다독이며 북돋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어느덧 찾아온 원수 중의 원수는 힘찬 목소리로 알 수 없는 설교를 지껄이고 있었고, 김원철은 무의식중에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다시 한 번, 또 다시 한 번, 붕 떠 날아가 바닥과 원치 않는 전면 접촉을 겪었다.......


그날 밤, 한동안 모든 대화를 거부하던 특무상사가 리병훈에게 달려들었다.      


동무래, 동무래 죄다 돌았나?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제발로 걸어들어왔는데, 그걸 차버리겠다, 이 말이네? 고향 땅이 그립지 않아? 동지들이, 령도자의 품이 그립지 않아?     


일 없소, 하고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방금 어떤 놈이간? 쥐굴서 대가리 똑똑히 들고 말하라.     


일 없다 하지 않소,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놀라 김원철은 말을 잃었다.    

 

사랑으로, 믿음으로 우리는 살겠소. 우리는 새 희망을 얻었소. 하느님 아바이는 들어 주시오.      


믿음? 시방 믿음이라 했나? 저걸 왜서 믿네? 저것을 네가 얻은 것이나? 네놈이 흘린 땀이, 네놈이 흘린 피가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니? 받은 것도 없는 저들이 네게 무엇을 주겠니, 리병훈이, 대답을 해 보라, 저들이 네게 무엇을 주겠니, 무엇을 주었니.      


나는 북에서도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소, 하고 리병훈은 속삭이듯 말했다.

    

니 무어라 했니, 받은 것이 없어? 다시 줴쳐 보라, 다시 줴쳐 보아, 받은 것이 없다니, 굶어 죽고, 말라 죽고, 들판에 남새나 산에 나무 껍질이나 벳겨 먹던 우리를, 위대하신 령도자께서 구해 주셨지 않았나, 강성대국을 주셨다, 굶주림에서, 처절한 나락에서 구해 주셨다. 희망을 주셨다. 민족에게 긍지를 주셨다.    

  

그건 형제가 받은 가짜 믿음이오. 가짜 이념이고, 가짜 선전에 다름없소.      


가짜 믿음은 네놈들 믿음이야, 그깟 쌀밥 고깃국에 속아 있지도 않은 신을 믿는단 말이나? 그깟 눅거리에 오고 가는 믿음이라면 없느니만 못하디. 그렇지 않나? 대답해 보라우. 쌀밥에 고깃국 말고, 대체 무엇이 너희를 돌려놓았어. 나약한 겁쟁이 새끼들, 바지에 오줌이나 지리는 아새끼 같구나야. 왜, 엥엥거리며 에미나이 부르듯 하느님을 불러대고 나니 겁이 좀 덜하나? 대답해 보아, 오돌오돌 떨어대는 꼬라지가 볼만하구나야.      


광포하게 그는 비웃음을 터뜨린다. 그의 눈길을 피하며 리병훈이 다시금 속삭인다.    

 

특무상사 형제의 믿음은 가짜요. 당도, 공화국도, 수령도 할일없소. 인민군도 전쟁도 마찬가지요. 북에서 삶은 헛살이에 다름없소. 하느님 나라만이 영원하오.      


이 쌍간나 새끼가, 방금 무어라 지껄였어, 분기탱천한 김원철은 대뜸 리병훈의 멱살을 잡았다. 순간 둘레에서 잠잠히 듣고만 있던 북한군 병사들이 우르르 일어나 김원철의 팔다리를 붙잡았다. 바라지도 않던 헹가래를 타고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네놈이 내 피땀을 부정할 터이냐, 내가 보낸 세월을, 내가 싸웠던 나날을 부정할 셈이냐, 내 충성을, 내 긍지를 네놈이 부정할 터이냐, 대답을 해 보라, 대답을 해 보라 하지 않았어, 하고 그는 처절히 부르짖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세차게 김원철을 내동댕이치고는, 그들은 낯설게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차가운 흙바닥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는 마침내 결심했다.      



달아나야겠다고.     



8.      


달아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이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제대로 지켜진 적은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챙길 물건도, 데려갈 사람도 없었다. 길게 자란 머리와 수염이 좀 거슬릴 뿐이었으나, 곧 얻게 될 자유에 비하면 사소한 방해였을 뿐이었다. 모두가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하고, 그는 조심스럽게 철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보초 역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기절시켜 총이라도 뺏어 들까 싶었지만, 괜히 일이 커질까 싶어 그만두었다. 밤이 다 지나고 나서, 아침 느지막이 한 명이 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 주는 것이 그에게도 편했다. 앞에 난 문을 지나, 수용소 뒤쪽으로 슬금슬금 기어나온 뒤, 그제야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어데로 간담. 헌병대 뒤편에 야산이 있었다. 꽤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부대 밖으로도 이어질 것이었다. 다만 철조망이 문제였다. 산속에 잘 찾아보기만 한다면 허술한 부분이야 분명 있기 마련이었으나, 최근 들어 특수부대 암습이 잦다 보니 언제 어디서 순찰조가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님 보급품 속에 몰래 숨어들어갈까. 아니다, 전쟁 중에 군수물자 관리는 더욱 철저한 법이었다. 제기, 이거 대갈빡이 안 굴러가는구만 기래. 어쩐다, 어쩐다. 밤은 아직 한참 남아 있었지만, 맘이 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야산으로 가자. 옛말에 산 속으로 도망가면 나랏님도 못 찾는다 하였으니. 내 자란 곳도 산골이 아니었나, 요까짓 산에서 백날이라도 숨으라면 숨어 있겠다. 그러려면 일단 가서 공구를 좀 챙겨야겠다, 요 창고가 어디에 있담. 그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는 순간, 어둠 속에서 번쩍하고 불똥이 튀었다. 뒤를 돌아보니, 한껏 빨아들인 담뱃불 속에 빛나는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그가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군홧발이 그의 얼굴에 날아들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쇠창살 속이었다. 김창원이 무심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다 깨어난 그를 보고 말했다.      


아이고, 일어나셨어요.     


대장 동지, 이거 뭔가 오해가 있었습네다, 잘 들어보시라요, 내가......     


됐고, 준비나 하쇼.     


예?     


준비나 하라고. 전시 포로 탈영이면 즉결처분이야. 인데, 기강도 잡을 겸 해서, 본보기로 삼으려고.

     

아닙네다, 거 잘 들어 보시라요.     


들은 척도 않고 김창원이 말을 이었다.     


참 이것도 웃겨. 누가 니 잡아왔는지나 알아? 니가 대가리에 똥 양동이 처박은 걔야 걔. 담배나 필까 싶어서 나왔는데 뭐가 기어다니고 있더래. 처음엔 산에서 무슨 짐승이 기어 내려온 줄 알았다는구만. 자고 있는데 밖에서 웬 정신나간놈이 문을 쾅쾅 두드리데. 어디 감히 오밤중에 대장을 깨워, 새벽부터 연병장이나 뛰게 할까 싶었는데, 이런 큰 공을 세웠네 그려. 휴가라도 챙겨줘야겠어.     


아니, 동무.......     


담배 피우나?     


예?     


담배 피우냐고.     


예, 핍네다.     


자, 하나 펴라.     


한동안 둘은 말없이 담배 연기만 뿜었다.     


왜 그랬냐?     


뭐 말입메?     


그냥, 눈 딱 감고 기도 까짓것 몇 번 하고 얌전히 밥이나 얻어먹었으면 좋았잖아.     


김원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그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게, 왜 그러지 않았을까. 기도가 뭐 그리 어렵다고.      


마지막 소원은 없나?     


거, 머리나 좀 깎고 싶습네다.     


지금? 우리 깎새 지금 딴 부대 출장 가있다.     


제기, 간지러워 살 수가 없습네다.     


조금만 참아라.     


조금만 참으면, 그럼 나는 어티 됩네까,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김원철은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불규칙하게 연기를 뿜어내는 꽁초를 세차게 비벼 끄고는, 김창원은 목례를 건네고 일어섰다.      


다음 날 아침, 김원철은 그 어떤 때보다도 우울하게 눈을 떴다. 검은 선글라스에, 흰 밧줄을 둘러 맨 뻣뻣한 헌병 두 명이 영창의 철창 앞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광이 번쩍거리는 군화가 눈이 부셨다. 문을 열고, 앙상한 그의 팔을 양쪽에서 한 명씩 단단히 붙들었다.      


거, 살살 잡으라.      


둘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연병장 뒤편에, 각종 자재를 쌓아 두는 작은 언덕이 있었다. 작은 숲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그 곳이 헌병대의 비공식적 처형장이었다. 그곳으로, 그들이 그를 이끌었다. 머리칼이 자꾸 쏟아져 눈을 가렸다. 흙바닥에 신발을 질질 끌며 그는 걸었다. 공터 한복판에 기둥이 서 있었다. 기래, 내 죽을 곳이 저기네?      


팔 벌려.      


벌린 양 팔에 흰 밧줄이 단단히 묶였다.      


이거야 꼴이 우습게 되었구만, 하고, 김원철은 씁쓸히 웃었다.      


하늘은 억울할 정도로 푸르렀다. 사방은 조용했고, 기분 좋은 바람이 그의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 햇빛이 검은 잎 사이로 뚫고 들어와 그의 눈을 가렸다 – 숲으로 둘러싸인 공터 어귀에서 익숙한 행렬이 다가왔다. 엄숙한 노래를 부르며 어깨에 총을 멘 무리를 보고, 김원철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간나새끼들, 날래 끝내라우.     


여덟 개의 총구가 그의 머리로 향했다. 여덟 개의 총구가 불꽃을 뿜었다. 여덟 개의 총알이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야소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아버지, 이 어린양을 용서하소서. 이 어린양을 바른 길로 이끄소서. 아버지, 우리 나약한 인간을 용서하소서, 저 길 잃은 어린 양이 회개하고 당신의 품속에서 안식을 찾게 하소서.      

고만 주둥이 안 닫네,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시간이 도무지 날 것 같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그는 그 앞에 선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짧게 자른 머리, 검게 탄 얼굴, 표정 없는 얼굴, 두려워하는 얼굴, 겁에 질린 얼굴, 확신에 찬 얼굴, 그 모든 친숙한 얼굴들, 동시에 낯선 얼굴들을 그는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해질 수 있는지를.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     


머릿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이봐.     


게 누구요?     


나다.     


나가 누구요?     


아버지다.     


거짓부렁 말라. 울 아바이 옛적에 돌아가셨디.     


그 아버지 말고.     


그쪽은 아바이가 둘이네?     


뭐 아무렴 어떠냐.     


김원철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것은 낯선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여덟 개의 총알을 바라보며, 그는 잠시 침묵했다.     


왜 불렀소. 저 짝에나 가서 붙지.     


저들은 믿지 않는다.     


나도 믿지 않소.     


낯선 목소리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너는 믿는다.     


그래, 왜 불렀소.     



천천히 다가오는 총알을 바라보며, 낯선 목소리가 나직이 말했다.      



때론 한 그릇의 따뜻한 밥이, 얄팍한 믿음보다 나은 법이다. 그러나 동시에, 너의 믿음은 너를 정의한다. 나는 너희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너는 선택했고, 저들도 선택했다. 그러나 그 선택을 지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제와 뭐 아무렴 어떻소.     


낯선 목소리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다 – 그것은 한참 동안 이어진다, 김원철은 짜증스럽게 그것을 듣고 있다. 동시에 후련하기도 하다, 이는 낯설디 낯선 감정이다, 마침내 인정받았다는 것은, 그가 간절히 추구했으나 결국 얻어내지 못한 것을, 마침내 얻어내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하면서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는 그 순간 이교의 신에게 인정받은 순교자와도 같다.      


마침내 웃음을 그친 목소리가 말한다.      


갈 때 가더라도 밥은 먹고 가지 그랬느냐.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기리티, 하느님 아바이. 갈 때 가더라도 밥은 먹고 갈 걸 그랬소.     


여덟 개의 총알이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     



17년 5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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