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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May 18. 2019

뱃사공

1.


옛날 옛적에, 뱃사공이 하나 살았다. 얼굴엔 자글자글 주름이 얽히고, 허리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구부정해졌지만, 아직 노를 잡은 두 팔뚝은 말랐으나 힘이 있었고, 굳게 잡은 손은 밤이고 낮이고 쪽배 위에서 물길을 가르곤 했다.


객에 대해선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칼을 찬 젊은 군인, 불안한 표정을 한 젊은 연인, 술에 취한 고관대작, 지팡이를 짚은 늙은이, 피곤하지만 들떠 보이는 소금장수, 아이를 업은 어머니.

모두가 동전 두 닢을 내면 배에 올라탈 수 있었고, 모두가 저편이든 이편이든 뭍에 닿았다. 사공은 그저 묵묵히 노를 저을 따름이었다.


언제부터 그가 사공 일을 시작했는가, 하는 것은 옛날 옛적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라, 사공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강가에 작은 오두막에 역시 작은 세간살이를 들여놓고 객이 없다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다, 객이 오면 삯을 받아 노를 저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사공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강물은 거짓말도, 입바른 말도, 달콤한 말도 쓰디쓴 말도 하지 않았으니, 기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강물이다, 하고 사공은 생각했다. 강물은 그저 흐르고 또 흐를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건넌다 - 그와 객과 쪽배가 올라타도 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날이 궂으면 가끔 성을 낼 따름이었다, 다만 그뿐이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2.


흐르는 강물과도 같았던 어느 날, 잘 차려입은 젊은이가 배에 오두막으로 와 사공을 찾았다. 흑단과 같은 머리칼에 새하얀 피부, 얼굴선이 부드러웠다. 학과 같은 몸짓으로 떠다니듯 다가와 젊은이는 사공에게 뱃삯을 물었다.


동전 두 닢이오, 하고 무뚝뚝하게 사공은 대답했다.


좋소이다, 젊은이가 대답했다. 조용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날따라 풍랑이 조금 있어 작은 쪽배는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흔들렸으나, 젊은이는 의연한 표정으로 태연자약하게 흐름에 따라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배를 자주 타 보았나, 사공은 혼자 생각했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건너편에 닿은 젊은이는 가볍게 쪽배에서 뛰어내렸다. 희게 빛나는 이가 햇빛에 눈부셨다 – 그러나 그런 감상도 잠시뿐, 사공은 다시 노를 저어 저 건너편으로 향했다.


다음 날, 젊은이는 또다시 웃는 얼굴로 사공의 오두막을 찾았다.


동전 두 닢이오.


그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매일같이 배를 타야 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 칼을 찬 장수도 창을 든 병졸도 아니다, 봇짐도 매고 있지 않으니 장사치도 아닐 것이다. 순방 중인 관료나 여행 중인 귀족 자제인 듯도 하였으나 첩첩산중에 볼 것이라고는 없다. 다만 젊은이는 언제나처럼 동전 두 닢을 건넬 뿐이었고, 사공은 아무 말 없이 강을 건널 뿐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의 조용하고 힘있는 목소리를 다시 들을 일 없이, 출렁이는 뱃전 위에서 젊은이와 늙은 사공은 묵묵히 저편을 바라볼 뿐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한 해가 지나도록.


강물 위를 떨어진 꽃잎이 가득 메운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동전 두 닢을 받고 사공은 젊은이를 태웠으나, 문득 객이 사공에게 말을 붙였다.


노인장은 함자가 어떻게 되시오.


함자라는 어려운 말을 사공은 알지 못하였으나, 짐작으로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알았다.


이름이랄 것도 없소.


하하, 하고 맑은 목소리로 청년은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이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사공은 대답이 없었다.


사공 노릇을 한 지는 얼마나 되었소.


그것도 모르오.


허, 재미있는 늙은이로세.


젊음에서만 나오는 당찬 말이었으나, 그런 말에 일일이 대꾸하기에도 사공은 늙을 대로 늙어 버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강물은 그저 흐른다.


읏차, 하고 젊은이는 배에서 뛰어내린다. 학과 같은 가벼운 몸놀림이다.


사공 어르신.


예.


곧 큰 전쟁이 날 거요, 하고 젊은이가 본 적 없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공은 대답 없이, 뭍에 노를 대고 힘차게 밀어 나아간다. 꽃잎을 가르고 쪽배가 두둥실 떠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젊은이는 발길을 돌렸다.



3.


전쟁에 새로울 것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있고, 누군가에게는 없어서, 그것을 탐내 언제고 일어난다. 땅은 피를 빨아들여 다시 곡식을 키우고, 그걸 거두어 인간들은 다시 태어나고 자라 전쟁터에서 죽는다. 그런 광경이라면 지겨울 정도로 보아 왔다. 앳된 얼굴, 들뜬 얼굴, 두려운 얼굴, 지친 얼굴, 굶주린 얼굴, 취한 얼굴, 위엄에 찬 얼굴, 비굴한 얼굴, 넋이 나간 얼굴, 모두가 동전 두 닢을 내고 이편에서 저편으로, 저편에서 이편으로 오고 가고, 사공은 노를 젓는다.


사공은 죽지 않는다. 불사를 뜻하는 게 아니다. 전시에 강을 건널 유일한 방도를 생각 없이 죽여 버릴 정도로 멍청한 군인은 없다. 다만, 겁에 질릴 대로 질린 눈을 한 병사 몇 명이 칼을 들이댈 때는 많다. 그럴 때면 사공은 그저 앉아 버린다. 동전 두 닢을 내지 않으면, 배는 건너지 않는다. 다만 그뿐이다.


가끔은 시체가 상류에서 끝없이 떠내려 와 노를 젓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강물은 노한 듯이 몸을 뒤틀고, 사공은 군말없이 물러난다. 그리고는 시체를 건져 강둑에 묻는 것이다. 고된 일이다. 강과 사자死者에 대한 공양이라 생각하고 사공은 몇 번이고 강 중턱과 강둑을 오간다.


젊은이가 마지막으로 저편에 내려선 지 몇 해가 흘렀다, 아마 일곱 해는 족히 되었을 것이다. 강물은 끊임없이, 아무 말도 없이 흘렀지만, 상류에서는 피와 시체가, 재와 고름이 멈추지도 않고 흘러들어왔고, 강둑에는 묘를 세울 자리도 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강물은 시간과도 같아서, 언젠가는 모두 바다에 다다를 것이다, 라고 사공은 생각했다. 원망도 증오도, 고통도 기억도 남김없이 끌고 간다.


4.


까마귀가 강물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사공은 항상 까마귀가 싫었다. 시체를 덮쳐 눈알을 파먹는 불길한 새다. 그러나 함부로 쫓아 보낼 수도 없다. 까마귀가 없다면 강에는 시체의 둑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사공은 더는 사공으로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두려웠다.


강물 위를 맴돌던 까마귀가 솔개에게 쫓겨 간다. 드문 일이다. 무리를 지은 까마귀는 봉황의 눈알도 쪼아 먹는다. 굶주림에 돌아 버린 솔개로군, 사공은 생각했다. 역시나, 솔개는 처절한 울음을 뱉으며 쫓겨 나간다, 그러더니 저편의 나무로 떨어진다. 그 모습에 사공은 문득 가여운 생각이 들어, 평소보다 서둘러 노를 저었다.


어디쯤 가 있나, 저 소나무일텐데.


솔개는 보이지 않았으나, 나무 둥치에 기대고 쓰러져 있던 것은 일곱 해 전의 젊은이었다.



좋은 옷차림에 신선 같은 얼굴을 한 그때의 홍안의 청년은 아니었다. 낡은 옷은 죄다 해지고 찢어져 맨살이 들여다보였고, 피와 고름이 얼룩져 있었다. 희고 걱정 없어 보이던 얼굴은 검게 타고 그을음과 먼지가 잔뜩 끼었고, 다리 한 쪽은 곪아 잘라냈는지, 전장에서 잘렸는지는 모르지만 사라진 채로.


좋은 곳으로 가시게.


강둑에 무덤을 파고 시체를 밀어넣을 때면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었으나, 이번엔 강둑으로 밀려온 시체도, 강 중간에 걸린 시체도 아니기에 거둘 의리는 없다고 뱃사공은 생각했다.


그보다도, 솔개가 어디로 갔는지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솔개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많은 새가 있지만, 저거야말로 진정한 새라는 느낌이다.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끊임없이 하늘을 유유자적하게 맴돌 뿐이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로도 갈 수 있다. 사공은 솔개가 부러울 때가 있었다.


거기 누가 있소.


목구멍에서 피가 끓는 소리로 젊은이가 말했다. 피가 잔뜩 고였다면 뱉어 내야 한다, 그럴 힘도 없다면 속이 곯았거나 죽어가는 것이다. 저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한다. 사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뭍의 일은 버겁다, 어서 솔개를 찾아 돌아가자. 심하게 쪼이지만 않았다면 곧 다시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거기 아무도 없소.


대답 대신 사공은 젊은이의 앞으로 다가갔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젊은이는 사공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이다. 어딘가 부드럽고 가볍던 선은 사라지고, 상처와 흉터로 얼룩져 있다.


많이도 죽였나 보군요.


아아, 사공 어르신인가. 보자, 칠 년 만인가.


그쯤 되었소만.


아직도 쪽배를 타시오.


예.


세월이 지나고 강산도 변했는데 어찌 아직 강을 건너신다는 말이오.


사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이 없는 것은 여전하시구려.


.......


아무런 질문도 없고.


나리도 별 말씀은 없었소만.


재밌는 늙은이로군, 하고 젊은이가 웃음을 터뜨린다. 누런 가래가 피와 함께 터져나온다. 곱던 얼굴이 원망과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다. 숱하게 보아 온 얼굴이다, 그러나 볼 때마다 익숙해지지 않는다.


사공, 나를 저편으로 데려가 주시게.



동전 두 닢이오.



5.

조심스럽게 젊은이를 부축해 사공은 쪽배에 싣는다. 호흡과 맥박이 거칠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그렇다면 하류 쪽으로 더 내려가 빈 강둑을 찾는다. 다만 그뿐이다. 이름 모를 묘가 하나 더 늘어날 테고, 강물은 아무 말도 없이 흐를 것이다.


나는 간자였소.


젊은이가 열에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 매일같이 강을 건넜지. 품에 넣은 두루마리에는 땅의 형태나 사람의 수, 군사의 배치 따위를 빼곡히 적어 두었소. 그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 믿으며.


사공은 그저 노를 저었다.


그러나 보게, 세상 꼴이 어찌 되었는지. 수천, 수만의 사람이 죽었소. 내가 죽인 것도 아마 수십 수백은 될 거야. 다리도 한 짝이 날아가고.......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다, 사공은 생각했다.


이보게, 사공. 뭐라고 말 좀 해 보시게. 어찌 질문 하나 없는가. 노인장도 전쟁통에 고생 깨나 하지 않았겠는가. 원망도 있을 터.


저편을 바라본다. 다행히도 강둑에서는 아무도 기다리는 자가 없다. 닿자마자 명복을 빌어 묻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배는 천천히 강물을 가르고 나아갔다.


노인장, 내가 무엇을 하는 이인지 궁금한 적은 없었는가.


없었소.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가?


없었소.


그저 동전 두 닢을 내면 배를 건넌다, 이뿐인가.


그렇소.


노인장의 쪽배에 탄 것은 나 같은 간자였을수도, 자객이었을 수도 있소. 천인공노할 살인귀가 타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런데도 동전 두 닢을 내면 배를 건넜는가.


.......


노인장이 신도 부처도 아닐진대, 배에 누가 타는지 일일이 알 수도 없는 노릇이었겠지. 하물며 나처럼 신분을 꼭꼭 숨긴 이라면 더더욱. 헌데, 노인장이 신도 부처도 아니거늘, 어찌하여 사람의 목숨을 동전 두 닢으로 매겼단 말인가.


.......


노인장이 건너다 실은 한 명의 목숨이, 수천 수만의 무고한 넋을 앗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노인장의 손에는 아무런 피도 묻어 있지 않다는 것인가. 강둑에 만든 무덤도 사실 공양이 아니라 속죄일지도 모르지.


.......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당신은 누구요.


허, 재미있는 늙은이로세. 간자라고 하지 않았는가.


사공은 묵묵히 노를 젓는다, 그러려고 한다. 그러나 굳게 잡은 손에서 사공은 처음으로 피로감을 느낀다. 세월을 진 어깨와 등은 갑자기 굽어지고, 좁은 뱃전에 디딘 두 발과 다리가 물결을 따라 흔들린다. 무어라 대답하기에 노인은 이미 늙을 대로 늙고 또 지쳐 버렸기에.


저 멀리 바라본 하류의 강물은 유유히 흐를 뿐이다. 굽이치고 이지러지면서, 뜻모를 말과 노래를 하며. 물끄러미 사공은 강물을 내려다보지만, 오직 자신의 얼굴만을 발견할 따름이었다. 강물은 거짓말도, 입바른 말도, 달콤한 말도 쓰디쓴 말도 하지 않았으니, 기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강물이다, 하고 사공은 생각했다. 강물은 그저 흐르고 또 흐를 뿐이다, 그리고 나는 강물이 되고 싶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천천히, 또 빠르게 흐를 뿐인 강물이.


그러나 사공은 흐른 적이 없다, 다만 건널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공은 생각했다.


단 한 번도 강의 끝까지 가 보지 못했구나.



이보시오, 나으리.


음.


사공이 되어 보시겠소.


여러 나라를 다녔지만 외다리 병신이 사공 노릇을 한다는 소리는 내 들어보지 못했네.


사공은 묵묵히 노를 저었다. 저 편 강둑에 닿으면, 다시는 강을 건너지 못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6.


옛날 옛적에, 뱃사공이 하나 살았다. 얼굴을 가로지른 큰 흉터가 하나 있었으나 묘하게 부드러운 선을 하고 있었고, 희미한 미소에는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다리가 하나 없는 병신이었으나, 굳게 노를 잡은 두 팔뚝에는 힘이 있어서, 힘차고 또 부드럽게 밤이고 낮이고 쪽배 위에서 물길을 가르곤 했다.



19년 4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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