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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May 19. 2019

귀하의 도서가 연체중이오니

유령의 노래

https://youtu.be/JJaCwW4HyVs

<요루시카 - 구름과 유령>



1.     


그 책을 연체한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 누구나 그렇지 않나? - 다만 귀찮아서였어. 그렇잖아. 어차피 도서관에 빌리는 책은 레포트에 참고문헌 한 줄 덧붙이기 위해서지, 실제로 읽는 일이 있어? 아마 없을걸. 나는 소설은 사서 보는 편이기도 하고.      


평소 책이라곤 잘 읽지도 않던 당신이 – 책은 오히려 내가 당신에게 이것저것 떠안기곤 했었잖아, 어린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못하며 감상을 기다리면서 – 한껏 들뜬 얼굴로 읽어보라 권했던 책.      


도서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았었는데. 빌려 놓고 훌훌 넘겨보고는 읽지는 않았어, 왜 그랬었는지는 모르겠어.     

어떤, 문학이라는 희미하고 독단적인 영역에 있어서 근거도 없는 자부심 같은 게 아니었을까,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모자랐던 내가 그나마 잘할 수 있었고, 나누고 싶었던 일이었으니까.      


하여튼 간에, 빌려는 놓고 잊어버렸어. 당신도 굳이 읽었냐 묻지도 않았으니까, 가방 한 구석, 책상 한 구석 어딘가에는 있었겠지.     


어디에서 찾았더라.         

 

2.     


그러던 차에 알림이 하나 왔어,     


귀하의 도서가 연체중이오니 확인 바랍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는데, 한 일주일쯤 뒤에 다시 보니 무슨 제재가 걸려 있더라고. 내가 다시 책을 빌릴 수 있는 날은, 2999년 1월 1일이었어. 17년의 어느 여름의 일이야. 순간 아득해지더라고. 2999년, 지금으로부터 982년, 천 년에 가까운 시간.      


그 시간을 살아낼 사람이 있을까? 도서관이 그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기나 할까? 책의 종이도 다 닳아 해지지 않을까? 10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작은 스마트폰 화면의 더 작은 글자로 함부로 규정해도 되는 걸까. 그토록 긴 세월을, 아무런 생각 없이. 상상조차 닿지 못할 머나먼 미래를 간단히 선고하는 일은 무책임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꼬였네, 하고 당신은 말했었지만. 괜히 오기가 생겨서 더 반납하기 싫더라구. 하루, 이틀, 세 달, 해가 바뀌도록, 무시무시하게 늘어가는 연체료가 같은 책을 박스로 살 때까지 책은 돌아가지 못했네, 백 년 동안의 고독, 아니, 천 년 동안의 고독을 씹으며.      

    

3.     


그토록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책을 들여다보지 않았던 건, 돌이켜보면 신기한 일이네. 왜였을까. 밤하늘의 구름은 참 오래도록 올려다보곤 했었는데. 머나먼 해변에, 북적이는 거리에, 고적한 산속에도, 느긋이 몰아치는 강에도 가 보았지만, 대부분은     


그때의 그 벤치에서 조용히 담배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 걸 보고만 있었어, 연기가 끝까지 오르면 구름이 되지 않을까 하는 한심한 생각을 하면서. 언제선가, 어째선가 찾았던 책은 결국 끝까지 펼쳐보지 않은 채로.           


4.     


당신에게 2999년 1월 1일의 풍경을 말해준다면, 믿을까?      


무엇이 생겨나고 사라졌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하기에 천 년은 너무 길어, 지나치게 길어, 한 인간이 온전히 담고 전하기에는 너무나도 길어. 그래도 듣고 싶어?     


글쎄, 많은 부분 잘 기억나지도 않네. 끊임없이 죽이고 미워하는 게 인간이라면, 보듬고 끌어안는 것도 인간이지. 지나간 천 년과 당신이 보지 못한 천 년이 무엇이 다르겠어, 한 인간이 그 속에 없다면, 차마 떠올리기도 어려운 아득한 단위일 뿐인데.           


5.     


천 년이라는 시간은, 한 인간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길어, 너무도 길어서

당신의 목소리도, 잡았던 손의 감촉도, 미소마저도

잊어버릴 수밖에 없더라, 동시에 생각하는 거야, 나는 어째서, 무엇을 위해서 남아 있는 걸까.      


쌓이지도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내리는 눈송이 사이, 고작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일 정도로 짧은 호흡 사이, 아무 의미도 없는 단어와 단어 사이, 억지로 자아낸 문장과 문장 사이의 그 좁은 공간에서,      

나는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까. 당신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까.     


모르겠어, 의미도 잊어버린 희망을 반납하고 나면 아마 저편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한 2999년 1월 1일의 아침, 놀랍게도 도서관은 아직 서 있었어. 못 보던 건물들이 세워졌고 기묘한 복장의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어딘가 바삐 걸어가곤 했지만, 가파른 언덕은 그대로였고 심지어는 은행나무도 앙상하지만 당당히 팔을 펼치고 있더라. 기억나? 가을만 되면 신발 밑창에서 똥냄새가 난다고 투덜거리곤 했잖아.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동안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어, 그럴 수도 없겠지만. 안에 들어가니 사무적인 얼굴의 로봇이 더욱 사무적인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누군가가 나를 발견해 준 일도, 말을 걸어온 일도 정말로 오랜만이라 당황해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더라. 원체도 낯을 가렸지만,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던데 천 년이 지나도 사람이 바뀌기도 쉽진 않은 일이구나, 하고 생각하던 차에 조바심 내는 기색도 없이 로봇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군.     


저기, 책 반납하러 왔거든요.     


학번과 성함이?     


아마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고려 시대 개성 아랫골 살던 갑돌이 갑순이 이름이나 나이를 우리가 알 수는 없잖아? 하지만 놀랍게도 잠깐의 타이핑 끝에 로봇은 내 신원을 파악했어, 놀라워라, 기술의 발전. 난 기술이 항상 싫었지마는.     


연체 1건이 있으나 금일부로 제재는 해제되었습니다.     


연체료는요?      


놀랍지, 그 상황에서도 연체료가 얼마나 나왔을까 걱정부터 드는게.     


연체료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제재와 동시에 효력이 사라졌나 봅니다.      


다행이네요.     


다만, 정확히는 금일 24:00시에 효력이 해제되기 때문에, 그럼 그때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럴게요, 그럼.          


6.     


어려울 일은 없었지, 고작 24시간 따위, 지금까지의 세월은 기다림의 연속이었는걸. 그런데 말야, 천 년의 기다림보다 열다섯 시간의 기다림은 더욱, 뭐랄까, 기다림답더라.     


역 앞에서 당신을 기다릴 때처럼, 어제도 보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더욱 낯설고 떨릴 당신의 미소처럼, 무슨 말을 할까,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까, 당신의 손을 잡게 되면 나는 어디를 보아야 할까, 그런 종류의 기다림.     

마침내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어서 그랬을지도 몰라, 만약 저편이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그래서 이게 내 마지막 기록이 되지 않을까 싶어. 이제는 더 썩을 폐도 없으니 담배를 계속해 피우면서도 한 시간 뒤 로봇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리네. 삼십 분, 십오 분, 오 분이 되도록.      


말한 적은 없지만 한 구절은 우연히 떨어져 펼쳐진 페이지에서 읽었어, 나머지 이야기들은 당신을 만나면 마저 들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그가 말했다.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1)     



이제, 안녕.          



 *1)「자갈」, 『디어 라이프』, 앨리스 먼로 지음, 장연희 역. 142쪽. 파주 : 문학동네, 2013.


19년 3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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