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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May 21. 2019

작은 왕국들이 있다

1.      


작은, 왕국들이 있다. 왕국이 아니라, 왕국'들'이, 지금 이 순간, 이 땅 위에 존재한다.      

왕들의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다스리는 왕국 내에서는 단연 만인지상의 지위와 권세를 갖고 있다. 이 씨팔년을, 이 좆만한 새끼를, 왕은 다스린다. 정치학의 섬세한 논리와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국제사회에서 왕의 권력은 그다지 대단할 것이 없다. 다만 왕의 작은 왕국에서만 그는 절대적 군주로 군림한다, 그뿐이다. 이는 전적으로 그가 지닌 경제적 가치에서 유래하며, 우리 사회가 자랑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이를 보장한다.           


2.      


안타깝게도 나는 이 찬란한 역사적 정치 체제에 단 한 번도 속해본 적이 없다. 다만 친구나 친구의 친구들 - 운 좋게도 왕국의 신민으로 태어나 특권을 누리고 있는 – 이 전해준 자부심 넘치는 증언을 통해서만 전해 들었을 따름이다. 그들은 매우 조심스럽다. 한 왕국의 일원으로서, 자칫 국가 기밀의 유출을 범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유래한 태도일 것이다. 이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진심으로 사려 깊은 태도이며, 나아가 국가 전체의 안위와 안보까지 고려할 줄 아는 바람직한 태도라고, 나는 감히 말하겠다.         

  

3.      


왕국의 사법 체계는 관습법에 기초한다. 독자적인 사법 체계와 형벌 체계를 이룩함으로써 왕국 신민들은 안정되고 신뢰할 수 있는 보호 아래 놓인다. 이러한 체계의 제1원칙은, 왕국 밖의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명제를 담고 있다. 잘못한 자는 합당한 벌을 받는다. 공명정대한 제왕은 언제나 적합한 처벌만을 내리고, 이에 감히 불만을 표하는 불충한 자는 없다.          


4.      


가족적이라는, 순진하고도 멍청한 수식어를 이 왕국에 붙이는 것은 참으로 우둔하고도 우스운 일일진대, 그럼에도 나는 이 왕국이 진실로 '가족적'이라고 칭하려 한다. 왕은 백성들을 마치 친자식처럼 아끼며, 오로지 아버지만이 보일 수 있는 사랑으로 대한다. 매를 아끼면 아이들을 망친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들이 이 왕국에 발을 들인다면 그들은 오랜 격언이 실제로, 그것도 매우 정기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할 것이다.          


5.     


내 친구가 아버지를 죽였다. 알콜중독에,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던 그는 11월 29일, 좁은 계단을 오르다 발을 헛디뎌 실족사했다. 직접적인 사인은 부러진 경추를 통한 즉각적인 의식 상실이다. 계단에 뜨거운 물을 부은 것이 친구와 그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잘 밝혀지지 않았다.          


6.      


위와 같은 사례는, 거짓으로라도 믿음직스럽다거나 공명정대하다고는 결코 말하기 힘든, 절망스럽게도 우리가 속해 있는 국가 단위의 사법체계의 한계를 유실히 보여 준다. 동시에 후계자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한(수많은 역사가 증명하듯) 나타내는데, 굳이 글로서 남기기도 황당한 이 경우에 그는 언젠가 부왕의 지위를 세습하여 그의 나라를 또한 통치할 것이 자명했기 따름이다. ‘참을성이 없다’, ‘백년의 대계를 내다보지 못했다’고 나는 감히 논하고 싶다.          


7.     


교육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이 왕국의 교육은 순응적이며 몰지각한 대다수의 인민들에게 주어지는 공교육에 비해 몇 배는 더 효율적이며 또한 실용적이라 믿는다. 생각해 보라, 그것은 실로 삶의 지혜를 농축하여 담고 있다.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실생활에서의 활용은, 한자 뜻 그대로 ‘체득’을 돕는다.          


8.      


연구 표본을 실지로 만나 대화하는 것은 – 전문 용어로는 현장 실습이라 하는데 –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비록 연구 윤리에 위반하는 일이기는 하나 - 열의에 찬 탐구자라면 이런 기회를 거절하지는 않으리라 – 나는 애써 연민과 동정을 가장한다. 표본은 오랜 지인으로, 앞서 말한 사례와는 다른 인물이다. 유순한 표정과 눈빛 뒤에 가끔 번뜩이는 적의를 나는 경계하나, 전체적인 체념과 복종의 기색에 안심한다.      

굳이 대화의 전문을 실어 동료 연구자들과 학식 있는 독자들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겠지만은, 그가 삶에 대한 극심한 회의와 강력한 독립의 의지를 보였다고만 말해 두자. 불경하다고 나는 생각했지만 개인적 감상을 학문에 적용하는 것만큼이나 아둔한 일은 없기에 말을 아낀다(* ‘죽고 싶다’, 혹은 ‘죽이고 싶다’라는 표본의 발화는 많은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나아가 다방면의 학문에서 - 예컨대 사회학, 언어학, 경제학 -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9.     


이 짧은 보고서의 결론은, 아직 그렇지만 신성한 가부장적 체계와 관습에 기초한 오랜 역사의 권위가 다행스럽게도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적시한다;      


작은 왕국들이 있다, 그 왕국들은 존속하며 존속할 것이다. 이 당면한 과제에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은 신민들의 자각이다. 그들은 행복하다. 또한 안정적이다. 탄생과 동시에 그들은 왕국의 존속의 사명을 갖고 태어난다. 이를 위해서 개인의 행복은 전체의 행복에 (당연스럽게도) 포함되며, 여기에 의문을 품는다는 것은 가히 불경스러우며 또한 체제에 대한 도전이라 나는 믿는다. 실습과 절망을 통해 습득된 거시적이며 또한 미시적인 논리는 영구적이며 그래야만 하며, 우리 사회의 가학적이고 착취적인 형태를 위한 기초적인 토양이 된다.     



19년 4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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