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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Aug 15. 2019

52가, 보이텍에게.

읽기 전 약간의 배경설명
 
2차대전 중 자유 폴란드군은 나치의 폴란드 침공 당시, 나치에 대항하기 위해 폴란드에 쳐들어온 소련군에 쫓겨 고향을 버리고 떠나 영국군에 합류한다.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 많은 나라를 거쳐 마침내 이탈리아의 몬테카시노 전투에 참전, 승리에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전후 공을 인정받은 것은 폴란드에 남아 나치와 싸웠던 공산당 계열의 빨치산들이었고, 자유 폴란드군은 이에 반발해 평생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거나 못한다. 돌아간 이들은 숙청되거나 추방당했다고 한다.
 
실제 보이텍은 평생 전우들을 그리워하다 1963년 노환으로 사망한다. 향년 22세(곰의 평균 수명은 25년).

https://en.wikipedia.org/wiki/Wojtek_(bear)
 
52헤르츠 고래는 2004년 이후로 발견되지 않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52-hertz_whale




에딘버러, 1963  


        

북녘의 바다는 쓸쓸했다. 늙은 불곰 보이텍은 굴 안에 웅크리고 앉아 바다 내음을 맡았다. 바람에는 많은 것이 실려 온다. 그러나 실려갈 수는 없다.      


낮에는 간만에 슈테판이 찾아왔다. 옛 전우는 많이 늙었고 또 슬퍼 보였다.      


보이텍, 보이텍 하사, 너도 그 시절이 그립지 않니, 그러나 돌아갈 수는 없어, 심지어는 고향에도 말이다.     

 

사육사의 눈을 피해 슈테판은 담배 몇 개비를 창살 너머로 집어던져 주었다. 냄새 때문에 불은 붙일 수가 없었지만, 보이텍은 주둥이로 받아 소중히 씹었다. 고기 대신에 담배랑 맥주나 넣어 주세요,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말이 하고 싶었다. 아니다, 그 전에 할 말은 많이 쌓여 있어, 고맙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 그립다는 말, 전할 수만 있다면 옛 전우들에게.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대신 보이텍은 멋들어지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늙다리 슈테판이 낄낄거리며 경례를 마주 받았다. 그가 떠나갈 때의 헛기침에는 희미하게 울음이 섞여 있어서 보이텍은 슬퍼졌다. 안녕, 슈테판, 다음에 또 봐. 전할 수만 있다면.     


바람에는 많은 것들이 실려 왔다. 열 몇 번의 겨울을 보내며 보이텍은 낯선 것과 반가운 것, 두려운 것과 궁금한 것, 그리운 것과 잊어버린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두었다. 새로운 것은 끊임없이 실려왔으나, 이제는 둔해진 코가 다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며칠 전부터 그를 신경쓰이게 하는 것은 맡아본 적 없는 낯선 냄새였다. 비린내, 머나먼 온도, 외로움, 울음 따위가 섞여 있는. 밤이면 그것은 흐느끼듯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들으면 보이텍은 괜스레 울적해져서, 우울함을 떨치기 위해 괜스레 힘차게 옛 군가를 흥얼거렸다.         

 

Siekiera, motyka, piłka, linka,

tutaj Prusy, tam Treblinka

siekiera, motyka, światło, prąd,

drałuj, draniu, wreszcie stąd.

도끼, 괭이, 톱, 차단봉

여기는 프러시아, 저기는 트레블린카

도끼, 괭이, 불 켜, 교류 전기

뛰어라, 개새끼들아, 저 멀리 얼른 달아나라     


피와 연기 냄새가 역겨우리만큼 코 끝에 풍기고, 비명과 울음이 터져나올 때에, 하나가 작게 군가를 부르면 곧 많은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가사를 따라할 수는 없었지만 주둥이를 크게 벌려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면 가락은 함성이 되었고 하늘과 땅에 크게 울렸다. 포성마저 덮어버릴 듯이. 혼자여서, 또 늙어 버려 이제는 저 흐느낌조차 덮을 수가 없구나, 보이텍은 생각했다.  

    

Siekiera, motyka, piłka, alasz

przegrał wojnę głupi malarz,

siekiera, motyka, piłka, nóż,

przegrał wojnę już, już, już.

도끼, 괭이, 톱, 보드카

멍청한 환쟁이는 전쟁을 지고 말았네

도끼 괭이, 톱, 칼

방금 전쟁에 져 버렸네     

져 버렸네, 져 버렸네......    

      

씩씩한 목소리로 다섯 절을 모두 흥얼거리고 나서도 먼 곳의 노래는 끊어질 듯 이어졌다. 잠시간 그것을 듣고 있다가 늙은 곰은 잠에 들었다.        


       

하마단, 1942          


“곰이 대체 어디서 났어?”     


근무를 서고 돌아온 파벨 코발스키 상병은 소란의 원인을 알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캠프는 소란스러웠다. 좋은 의미로. 군인, 민간인 너나없이 불가에 몰려들어 함성을 지르기도 하고, 감탄을 내뱉기도 했다. 불가에는 어린 곰 한 마리가 보드카 병에 든 연유를 게걸스레 핥고 있었다.     


“곰이 어디서 났냐고?”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상병은 옆에서 멍청한 얼굴로 빙글대고 있는 야쿱의 옆구리를 개머리판으로 세게 찔렀다.     


“아야!”     


악마한테나 물려가라, 야쿱이 투덜거렸다.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파벨은 곰 쪽을 가리켰다.   

  

“곰 어디서 났어.”

“곰이 어딨어. 저건 큰 개야.”     


파벨은 기가 차서 한숨을 내뱉었다.     


“멍청한 주정뱅이 놈아, 술독에 빠져 눈알마저 삐어 버렸냐? 곰하고 개도 이제는 구분을 못 해?”

“곰이든 개든 아무렴 어떻담.”     


새끼곰은 배가 부른지 등을 깔고 드러누웠다. 곧 수많은 손이 달겨들어 어린 짐승을 어루만졌다. 놈은 신경쓰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어미의 손길을 대신하려는지 엉겨붙어 재롱을 피울 따름이었다.     


“아나톨 중위가 사 왔어.”

“곰을? 어디에서?”

“기차역에서.”

“누구한테서?”

“어디서, 누구한테, 누가, 질문도 참 많군. 왜, 네 똥구멍이 어딨는지는 안 궁금하냐?”     


야쿱이 빈정거렸다.      


“아야! 그만 찔러!”

“빈정대지 마라, 일병.”

“예, 그럽죠.”
 

“저건 이레나 아가씨 아니야?”

“이레나가 귀엽다고 데려가자 졸랐다는군. 둘 다 어미가 없으니 그런가.”

“어미가 없었나?”

“그럼요, 어미가 없었으니 데려왔죠, 어미가 있었으면 벌써 찢겨 죽었겠지요, 곰이든 우리든 간에. 어미야 죽었겠지 뭐. 웬 이란 꼬마가 갖고 있었다는데.”

“아나톨도 멍청하군.”

“빈정대지 마라, 상병.”     


곰이 맥주도 먹을까,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며 야쿱은 불가로 휘청대며 걸어갔다. 한심한 놈, 파벨은 생각했다. 밤이 깊어져 갔다. 사막의 추위는 뼛속까지 스며든다. 밤근무를 서다 보면 많은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손에 입김을 불며 상병은 등에 총을 메었다.          


“파벨.”

“이레나.”     


볼레슬라프 장군의 종손녀가 새끼곰을 품에 안고 다가왔다. 무겁지도 않은가, 파벨 코발스키 상병은 생각했다.  


“무겁지 않으신가요.”

“귀엽지 않아요?”

“곰은 사람을 찢어 죽이는 거 아시죠?”

“아직은 아무도 찢지 않았네요.”

“아가씨, 저희는 피난민입니다. 말이 좋아 군대지, 언제 어디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단 말이에요. 저런....... 짐승까지 끌고 다닐 여유는 없어요.”

“알아요.”     


세상 모르고 곰은 여인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상병은 바라보았다. 사막의 밤은 뼛속까지 치민다. 파벨은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그러시군요.”

“그래요.”

“이름은 지어 주셨나요?”

“아직은.”     


미소를 지으며 이레나가 새끼곰을 쓰다듬었다. 이리저리 보채는 것이 문득 애처로웠다. 별이 떠오르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텐트로 돌아갔다.      


“그럼.”

“곰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제 텐트에서 재우려고요. 설마 밤새 찢어죽이기야 하겠어요.”     


피는 못 속이겠구나, 파벨은 속으로 웃었다. 가서 잠이나 자자, 알렉시는 근무에 잘 들어갔으려나. 콧노래를 부르며, 그는 걸었다.          


Stary niedźwiedź Mocno śpi.

Stary niedźwiedź Mocno śpi.

늙은 곰이 깊이 잠들었네

늙은 곰이 깊이 잠들었네    

 

My się go boimy

Na palcach chodzimy

늙은 곰이 무서워

발끝으로 걷는다네   

  

Jak się zbudzi,

To nas zje.

Jak się zbudzi,

To nas zje.

놈이 깨어나면

우리를 먹어치우리

놈이 깨어나면

우리 모두를 먹어치우리    

           


에딘버러, 1963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귀를 가득 메우면 늙은 곰은 눈을 떴다. 그러나 굴 밖으로 나가지는 않는다. 재잘거리는 어린 목소리는 언제나 신경에 거슬렸다. 창살에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가득 들이밀고는 손가락질을 한다. 돌을 던지는 일도 있다. 왜 그가 알지도, 원하지도 않는 인간들이 우리에 몰려드는지 보이텍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인간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인간들은 더더욱.      


어린 인간들을, 불곰은 무서워했다. 곰은 인간보다 빨리 크고, 인간들은 곰보다 여리고 쉽게 상처받는다, 어린 인간들은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한번은 어떤 나라의 왕자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두 눈을 빛내며 그는 보이텍 스스로도 모르거나 잊어버린 낯선 이야기를 끊임없이 토해냈다. 그 말에 대꾸해 주었어야 하나, 하고 이제 늙어버린 곰은 돌이켜본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다신 겪지 못할, 돌아오지 않을 잃어버린 삶을 겪어보지도 못한 이가 대신 이야기해 주는 것은 어쩌면 고마운 일일지도 모르나 – 보이텍은 어쩐지 싫었다. 가끔 찾아오는 반가운 눈빛이, 냄새가, 모습이 두서없이 기억을 헤집어 드문드문 꺼내는 이야기가 오히려 좋았다.    

  

제22 포병보급중대. 상병 슈테판. 대위 안토니. 일병 얀. 중위 스타니슬로프. 병장 요제프. 중대장 안토니 헤우코프스키. 보급계원 파트릭. 헨드뤽. 주정뱅이 죄르지. 꾀돌이 보르치에흐.     


상병 보이텍, 병장 보이텍, 마침내 하사 보이텍. 제22포병보급중대.      


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보이텍, 일어났니?’ 귀를 쫑긋 세운다. 낯선 억양과 말투에 익숙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간들이 모두 돌아가기까지 보이텍은 드문드문 꿈을 꾼다. 내일은 그래도 굴 밖으로 나가야 해, 사육사가 애원했기 때문이야. 이제는 나도 늙었어, 보이텍, 너도 늙어 버렸단다. 그리움과 외로움 속에.

     

그런데, 그런데, 나는, 돌아갈 고향 없이 무엇을 그리워하는 거지, 바르샤바, 크라쿠프, 포즈난, 그단스크, 슈체친.      


고향, 기억도 나지 않는 사막의 산의 고향.     


제22포병보급중대, 상병 보이텍. 함께 피우던 담배, 목욕과 맥주 한 박스. 달콤한 꿀과 마멀레이드.     


흐느낌이 다시 들려왔다. 보이텍은 따라 울었다. 낮게 울리는 으르렁댐에 동물원의 숱한 짐승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안녕, 나 여기 있어, 보이텍이 여기 있어, 돌아갈 수 있을까, 늙어버린 전우여, 그대는 돌아갈 수 있을까. 그 불가로, 싸움터로, 고향으로. 슬픈 눈으로 부르던 그 고향으로.     


슈테판이 담배를 던져 주었네. 불이 붙진 않았어도, 찬찬히 씹다 보면 옛 추억의 맛이야.          


안녕, 안녕, 거기 누구 있나요?        

  

먼 바다에서 흐느낌이 말을 걸어왔다. 막 잠에 들려던 늙은 불곰은 귀를 쫑긋 세웠다. 이제는 헛것까지 듣나 보지. 밤이면 불침번을 서던 병사가 가끔 사라지는 일이 있었다. 두고 온 애인이, 어머니가, 자식이 손짓한다고 했다. 대부분은 독일군에게 당한 것이었지만. 잘린 목을 보란 듯이 던져 놓았다. 그제고쉬, 그제고쉬, 그제고쉬 이 새끼야. 잘린 목을 침통한 얼굴로 묻었다.    

  

보이텍, 이리 오렴. 그저 맥주 맛이 좋았다. 하나 더, 하나 더. 이 멍청한 곰, 이건 그제고쉬에게 바치는 잔이야.

 

하나 더, 하나 더. 인간의 표정은 복잡하다. 우는 듯 웃는 듯, 오스카가 입술을 오므리고 맥주병을 불었다. 휘- 휘- 휘-. 보이텍은 신이 나서 춤을 추었다. 군인들이 말리려 달려들었으나 그 무렵엔 아무도 젊은 보이텍을 당해낼 수 없었다.           


휘-휘-휘-.    

       

목소리가 늙은 보이텍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 나도 여기 있어요. 당신도 거기 있나요?        

  

휘- 휘- 휘-.

휘- 휘- 휘-.

휘- 휘- 휘-.           



테헤란, 1942          


“이름은 뭘로 하지?”     


8월, 제2수송중대 – 후일 제22보급중대로 개편되는 - 의 병사들은 어쩌다 떨어진 곰을 둘러싸고 토론이 한창이었다.     


“알로지.”

“그건 네 주정뱅이 애비 이름이잖아.”

“뭐 어때, 어제 맥주 좀 줘 보니 아주 잘 먹던걸.”

“진짜로?”

“내 잼도 죄다 먹어치웠어. 아껴 둔 건데.”

“그럼 암브로지.”

“우리 마을에 그런 이름 가진 할매가 하나 있었는데, 뱀에 물려 죽었어.”

“암브로지는 남자 이름 아냐?”

“맞아.”

“곰이 뱀도 먹냐?”

“몰라.”

“바르텍.”

“바질례이.”

“볼렉.”     


이름 없는 새끼곰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달콤한 냄새가 난다. 더 줘, 더 줘. 투명한 병에 든 달콤한 젖.

      

“잘 먹네.”

“곰은 얼마나 빨리 크지?”

“우리 마을에 보이텍이라는 영감이 있었는데, 숲에 똥을 누러 갔다가 곰한테 물려죽었더랬지.”     


낄낄낄, 웃음이 터졌다. 이름값 되게 못하네, 하고 누군가 말했다. 그럼 보이텍 어때? 곰이 곰한테도 물려죽나? 몰라, 그래도 보이텍 영감이 알면 기뻐할 거야, 근데 보이텍이 누구라고? 보이텍은 우리 마을 살던 영감인데 숲에 똥 싸러 갔다가 곰한테 물려죽었어. 곰 싸러 갔다가 똥에 물려죽었다고? 낄낄. 어쩌면 이 곰이 보이텍 영감일지도 모르지. 주님, 용서하소서. 근데 누구 빵 좀 남아? 내 건 아까 이놈이 다 먹어치웠어. 멍청이, 니 먹을 것도 저깟 곰한테 줘? 이봐, 보이텍 영감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 착한 영감이었다고. 근데 이 곰 어디서 난 거야? 아나톨이 줬어. 아나톨이 누군데? 아나톨 몰라? 본부중대장. 몰라. 아나톨 몰라? 삐쩍 마르고, 성격 더러워 보이는 중위 있잖아. 모른다고.     


시끄러워, 귀 따가워. 배고프단 말야, 달콤한 거, 달콤한 거 줘. 새끼곰은 두 발로 힘차게 서서 크왕, 하고 부르짖었다.     


“어쭈, 요놈 봐라.”     


털이 덮인 억센 손이 새끼곰을 높이 들어올렸다.     


“Wojtek. 너는 보이텍이다. 즐거운 전사. 싸움을 즐기는 행복한 전사. 너는 보이텍이야. 뭐 해, 새끼들아. 잔 들어.”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손이 말했다. 짐짓 엄숙한 태도로 군인들이 맥주병을 들어올렸다.    

  

“보이텍을 위하여! 똥 누러 가다가 잡아먹히지 않기를!”         


      

에딘버러, 1963          


누구세요, 안녕, 거기 누구 있나요.     


목소리가 흐느꼈다. 어째서 목소리가 들려오는지 몰랐지만, 무심결에 불곰은 그 방향을 향해 머리를 높이 들고 주둥이를 열었다.     


나는 보이텍이야, 행복한 전사 보이텍.     


한참 뒤에 대답이 돌아왔다.     


안녕, 안녕하세요, 그런데 전사가 무엇이죠.     

나도 모르겠어, 내가 아는 것은 이름뿐이야.     

전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이름이네요. 안녕하세요, 보이텍.     

그래, 안녕.          


먼 데서, 물속을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보이텍은 그런 목소리를 단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보이텍, 행복하나요, 당신은?          


글쎄. 나는 행복한가? 보이텍은 생각했다. 두 단어를 가진 이름이지만 두 뜻을 모두 모르겠다. 알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다고.          


아니.     

나도 그래요, 보이텍. 나는 슬퍼요.     

어째서 슬프지?     

왜냐하면 아무도 내 노래를 듣지 못하거든요.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해요. 그런데 지금은 조금 행복하네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주, 아주 아주 오랜만이에요.     

반가워.     

나도 반가워요! 그래, 반가워요! 인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었군요. 당신은 어떤 고래인가요?     

고래? 너는 고래인가?     

그래요, 나는 고래에요.     

미안하지만, 나는 고래가 아니야.     


목소리는 다소간 풀이 죽은 듯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다른 고래들은 나를 보아도 그냥 지나가거든요. 말도 통하지 않으니까요.     

안됐군.     

고마워요, 보이텍, 당신은 참 친절하군요.     

고마워.          


고래가 무엇인지 보이텍은 알지 못했다. 목소리는 저편의 바다에서 들려왔고, 냄새로 보아 며칠 전부터 그를 신경쓰이게 했던 존재임은 확실했으나, 어떻게 이 창살 너머까지 닿는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물속에 잠긴 배일지도. 전우들은 머리에 무엇인가를 쓰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으니까. 웅웅, 울리는 것도 어딘가 닮은 데가 있는 것 같았다.          


너는 배인가? 혹시 물속을 다니나?     

배가 아니에요. 물속을 다니기는 하지만요. 물속을 다니는 배는 고래와 비슷하긴 하지만 고래는 아니에요,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그렇구나.     

나는 기뻐요, 보이텍, 내가 배가 아니라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누군가와 이야기할 수 있어서 정말로 행복하네요. 내가 배가 아닌 것만큼이나 당신은 고래가 아니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동물이지요?     

나는 곰이야. 한때 큰 개인줄로만 알았는데 개는 아니었어.      

곰!          


목소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빗방울이 떨어지듯 맑은 목소리였다.     

      

곰! 재미있는 소리가 나네요. 곰, 곰, 곰.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분명 멋진 동물일 거예요.     

고마워.     

내가 고마워요, 보이텍. 당신은 어디 있나요?      

나는 -         

 

나는, 어디에 있지? 사막을 지나, 산을 지나, 바다를 건너. 아무튼 멀리.      

    

나도 잘 모르겠어.      

그렇군요, 보이텍.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일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럼, 물론이지.          


어쨌든, 나는 어디에도 갈 수 없으니. 보이텍은 생각했다.        

  

고마워요, 보이텍. 아, 혹시, 물고기를 좋아하나요? 나는 먹지 않지만, 몇 마리 몰아다 줄 수 있어요.     

고맙지만, 받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마음만 받겠어.     

그렇군요, 그러면 내일 또 이 시각에 찾아올게요.    

그래, 내일 또 봐.     

안녕, 보이텍!           


낮고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바다를 향해, 보이텍은 잠시간 숨을 들이마셨다.      


         

팔레스타인, 1943  

        

“보이텍 10연승!”     


웃통을 벗어제낀 병사들이 차례로 보이텍에게 달려들었다. 즐거운 듯 울음소리를 내며 보이텍은 하나둘 군인들을 쓰러뜨렸고, 쓰러진 군인들은 다정스럽게 얼굴을 핥는 보이텍의 귀를 쓰다듬었다. 큰 웃음이 왁자지껄하게 터져나왔고, 영문도 모르는 보이텍은 기운이 펄펄 나 당할 자가 없었다.     


“곰이 원래 이렇게 빨리 크는 거였나?”

“몰라.”

“알빈, 니가 한번 덤벼 봐라.”     


중대 최고의 장사 알빈도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보이텍 11연승! 뒤에서는 내기가 한창이었다. 배당이 너무 높아져 뻔한 승부가 되어 버렸지만, 얍삽한 르보브스키가 하루는 보드카와 연어 통조림으로 짐승을 꼬셔 그때까지 쌓였던 돈을 모두 딴 일도 있었다.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나라 잃은 군인들과 함께 보이텍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고, 나라 잃은 군인들은 곧 이 커다랗고 순한 곰을 깊게 사랑하게 되었다. 그것은 보이텍도 마찬가지였다. 밤이면 병사들은 불가에 둘러앉아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고향의 노래를 불렀다. 뜻모를 노래를 불곰은 들었고, 흥이 난 군인들이 춤을 추면 따라 돌았다. 맥주와 불붙은 담배가 돌았다 – 고개를 뒤로 넘기면 그것은 담배를 달라는 뜻이었다. 오냐, 보이텍, 여기 간다. 내 손은 물지 말고.       

   

Ona jedna tam została,

Jaskółeczka moja mała,

A ja tutaj w obcej stronie

Dniem i nocą tęsknię do niej.

그녀는 홀로 저편에 남았네

내 작은 제비 아가씨

나는 이 낯선 땅에 와

밤이고 낮이고 그녀를 그리워한다네         

 

낮이면 전투가 있었다. 전투가 한창일 때면 보이텍은 포탄을 날랐다. 곧 보이텍은 장교들에게는 좋은 칭찬거리가, 병사들에게는 비교 대상이 되었다. 이 새끼야, 빠져가지고는, 그거 하나 못 드냐? 보이텍 봐라, 떨어트리지도 않고 얼마나 잘 하니.      


전투가 있었다 – 긴 전투 끝에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나왔다. 개같은 히틀러 새끼.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요. 총을 닦으며, 철조망을 보수하며, 물자를 나르면서도, 그들은 고향을 그리워했다.    


       

에딘버러, 1963,         

  

이제는 아는 소리가 보이텍을 깨웠다. 옛날 꿈을 꾸던 참이었다. 옳지, 보이텍, 아냐, 오른손으로 – 아니 오른발인가 – 로 해야지. 그래, 더 들어올려서 귀에 바짝 붙여. 경례! 그렇지. 이따 배에 타서도 잘 해야 한다? 1944년, 이탈리아로 향하는 배. 보이텍은 바다를 처음 건넜었다.         

 

안녕, 보이텍! 나 왔어요.      

응, 안녕. 잘 쉬었나?     

그럼요, 그럼요. 당신도 잘 있었나요?     

나야 뭐, 언제나 같아.     

잘 됐네요. 나는 저 북쪽을 잠시 다녀왔어요. 당신 이야기를 남들에게도 해주고 싶었는데, 여전히 아무도 내 노래는 듣지 못하더군요.     

그거 유감이야.     

언젠가, 곰하고도 이야기를 했으니 고래하고도 할 수 있겠지요. 당신 덕분이에요.     

그런데 너는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하지?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어딘가 불안한 진동이 울려와, 보이텍은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모르겠어요.      

이름이 없나?     

네. 아무도 내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거든요.     

부모는?     

고래에게는 부모가 없답니다, 보이텍. 그렇지만 한 번 보고는 싶네요. 내 부모도 아무하고도 합창하지 못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서로 만났을까요?      

어쩌면 네 부모도 곰이었을지도.           


맑고 청명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보이텍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괜히 울적해지는 흐느낌보다는 나았다.     

     

그거 재미있는 생각이에요. 보이텍, 당신 부모님은 어떠셨나요? 당신의 이름은 누가 지어 주었나요?     

내 이름?     

그래요, 행복한 전사 보이텍.     

음, 인간들이 지어 줬어. 나는 인간들 손에 자랐거든.     

그거 대단하네요! 인간들은 고래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런가.      

어떤 인간들이었나요? 사냥꾼들이었나요?     

아니, 군인들이었어.      

군인이 무엇이죠?     

군인은, 싸우는 사람들이야. 아, 그래, 전사도 같은 뜻일 거야. 아마도.     

당신도 싸웠나요?     

음.      

힘들었겠네요.     

아냐, 나는 즐거웠어. 함께 있었으니까. 아, 미안.     

괜찮아요, 보이텍. 지금은 당신과 함께 있으니까. 그럼, 지금 그 인간들은 무얼 하고 있나요? 당신 옆에 인간은 들리지 않는데요.     

지금은, 없어. 나는 동물원에 있다.      

동물원이 무엇이지요?     

동물원은, 창살 뒤에 많은 짐승들을 가둬 놓는 곳이야.  

        

고통에 차 고래가 몸을 뒤틀었다. 파도가 밀려오고 바람의 냄새가 변했다. 밤에는 자는 새들이 깨어나 날개를 쳤다. 원숭이들이 끽끽거리며 소란을 피웠다.          


그거 끔찍하군요!     

동감이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죠? 인간들은, 정말로 잔혹하네요!      

글쎄, 좋은 인간들도 있어.         

 

아마도, 보이텍은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그리워하는 인간들은.   

       

그곳에서 보이텍, 당신은 행복하나요? 갇혀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에요. 바다에는 어떤 경계도 창살도 없어요. 가고 싶은 곳은, 물로 이어져 있기만 하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어요. 당신도 돌아가고 싶지 않나요?     

돌아간다고?     

그래요, 내가 데려다 줄 수 있어요!     

음, 그거 고맙네. 하지만 나는 기다려야 할 사람이 있어서.      

그런가요, 그거 부러운 일이네요.

         

화제를 돌리자, 보이텍은 애써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내가 네 이름을 지어 줄게.     

정말요! 그거 진심인가요! 정말로 기쁘네요! 고마워요, 나도 이제 이름이 생기는군요.  

잠시만 기다려, 고래 이름으로는 뭐가 좋을까. 사실 고래 이름은 처음 지어 봐.     

천천히 하세요, 보이텍. 누가 이름을 지어 주는 일은 나도 처음이에요.  


보이텍, 저 멀리 바다가 보이니? 여기는 우리 고향에서 먼 곳이지만, 그래도 바다는 하나라 어디든지 이어져 있어. 바다는 엄청나게 크단다, 이베리아 반도를 지나 도버 만을 지나서 덴마크 앞바다를 지나면 내 고향이야. 그단스크, 아름다운 항구 도시. 너에게도 보여 주고 싶구나.         

  

토마쉬.     

토마쉬!     

토마쉬. 내 옛 친구 이름이야.     

토마쉬, 토마쉬! 좋은 이름이에요! 좋은 울림이기도 하고요. 고마워요, 보이텍!     

고맙기는.          


토마쉬, 그단스크 출신의 젊은 병사. 환한 웃음을, 거칠게 쓰다듬는 손의 감촉을 보이텍은 기억했다. 포탄에 그의 살점은 산산히 부서져 찾을 수도 없었다. 그나마 남은 뼛조각을 긁어모아 동료들은 로마의 앞바다에 뿌렸다.


잘 가라, 토마쉬. 해류를 타고 그단스크에 가 닿기를.      


         

에딘버러, 1963,       

    

“안녕, 보이텍.”     


슈테판과 죄르지가 찾아왔다. 술 냄새가 풍겼다. 다정하게 주름진 얼굴로, 무섭게 늙어 버린 두 전우는 창살 너머로 손을 뻗어 보이텍을 쓰다듬었다.      


“너도 많이 늙었구나, 우리 귀여운 보이텍 하사.”     


반가움에 늙은 곰은 두 발로 일어나 둘을 끌어안으려 했다. 창살은 두 인간과 곰 한 마리가 지나가기엔 너무도 좁았다.      


kurwa, 죄르지가 침을 퉤 뱉었다.     


“이봐, 슈테판, 사육사 어디 있나?”     


사육사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경멸 섞인 눈으로 죄르지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봐요, 위험하다니까요. 왜 자꾸 달라붙냐구요. 사고라도 나면 어쩔 거에요?”  

   

지랄, 슈테판이 낄낄거렸다.

      

“우리 보이텍이 피아식별이 얼마나 확실한데. 그렇지, 보이텍?”

“맞아. 이봐, 잠깐만 문 좀 열어 주면 안 되나? 인사만 얼른 하고 나올게.”

“안 됩니다.”

“그러지 말고. 우리가 누굴 위해 싸웠는데. 너희를 위해서였어. 보이텍도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그런데, 이 따위 대우가 말이 되냔 말이야.”

“안 되는 건 안 돼요. 얼른 가세요. 그리고 지난번에 또 담배 던져주고 가셨죠? 그러지 마시라니까요.”    

 

아니, 그래도 돼. 보이텍은 고개를 뒤로 쑥 젖혔다.     


“사육사고 나발이고, 다른 일이나 알아봐. 저 봐, 담배 달라고 하잖아, 보이텍이.”     


사육사와 옛 전우들은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덩치 큰 사육사는 화를 내며 늙은 참전용사의 얼굴에 삿대질을 했다. 씨팔, 내가 파시스트랑 빨갱이들하고 목을 내걸고 싸웠는데 진짜 이러기야? 뭐라는 거야, 멍청한 폴란드 늙다리야, 말이 말 같지 않나, 꺼지라면 얼른 꺼질 것이지. 결국 슈테판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죄르지를 말렸다.     


싸우지 마, 슬퍼하잖아, 보이텍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잠시만 여기 앞에 앉아 있다 갈게, 모욕감에 떨리는 손으로 죄르지는 재빨리 사육사의 주머니에 무언가를 찔러넣었다. 잠깐만입니다, 사육사는 투덜거리며 멀어져 갔다. 우리 앞 화단 턱에 두 노인은 주저앉았다.      


우리도 이제 늙어 버렸어. 초원, 숲, 들판, 산과 강. 바닷바람은 또 얼마나 사무치는지.      

거지같은 영국 놈들.     

동감이야.      


우울한 얼굴로 두 노병은 잠자코 담배를 피웠다. 갔나? 이리 와, 보이텍.   

   

담배는 역시 불이 붙지 않으면 아무런 맛도 없다, 보이텍은 생각했다.          


     

이집트, 1944.          


“안 되오.”     


영국 제8군 수송담당관 찰스 모건 대위는 완고했다. 아무리 설득하고 따져 보아도 소용없었다.     


“저건 애완동물이잖소. 탑승할 수 없어.”     


그나마 영어가 가장 능숙했던 크리쉬토프가 나서 보아도 고집스러운 영국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보이텍은 애완동물이 아니야, 당당한 우리 전우라고. 군견도 실어 주면서 왜 곰은 안 돼?    

 

“군견은 군의 자산이고 작전의 일원이잖소.”          


말을 전해들은 자유폴란드군 2군단 제22보급중대장 안토니 헤우코프스키는 이를 갈았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제22보급중대원 전원 지금 즉시 수송선 앞 집합할 수 있도록. 헤우코프스키가 벽력같은 지령을 내렸다. 일사불란하게 전 부대원이 오와 열을 맞춰 집합했다. 신나게 연유를 빨던 보이텍은 영문도 모르고 중대장 옆으로 끌려나왔다.     


“주목.”

“주목!”     


고향을 떠나온 자유 폴란드군 병사들은 온 항구가 울리도록 복창했다.     


“제군들도 알다시피, 우리 중대에 보이텍이 처음 들어온 바로 그 순간부터 이 곰은 어엿한 부대의 일원이 되었다. 포탄 수송, 탄약 배달, 사기 진작, 일과체력단련, 거기다가 얼마 전에는 나치 스파이 새끼도 잡았지. 장군께서 계셨다면 바로 훈장이 내려왔을 거다.”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사색이 된 나치 염탐꾼은 온 바지에 오줌을 질질 흘려대며 벌벌 떨고 있었고, 보이텍은 놈을 핥고 어르고 레슬링을 하자며 끌어안고 야단이었다. 훈장 대신 거품목욕과 맥주 한 박스를 받은 보이텍은 너무도 행복해했다.     


“벼락이나 맞을 나치 환쟁이 새끼, 그리고 놈에 맞선답시고 덤벼든 빨갱이 루스키 놈들이 우리를 고향에서 쫓아내었다. 푸르른 초원, 그리운 강, 들과 산, 정든 고향땅과 가족들을 떠나와 우리는 싸우기로 맹세했다 – 낯선 사막과 산맥을 지나면서도, 우리 폴란드인들은 결연하고 또 당차게, 기가 꺾이지 않고 싸워 왔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보라. 우리의 피와 땀을 흘려 가며 지켜온 이 염병할 영국 놈들이 우리 전우를 내치려 한다. 이게 말이 된다고 보나? 뒤미트리 슈차블루고. 대답해 봐.”  

   

“개소립니다!”

“좋아. 너는 앞으로 보이텍 전속 담당이다.”

“감사합니다!”

“헨리크 자카레비츠.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말도 안 됩니다!”

“제군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이게 말이 되나?”     


Nie, 부정의 대답이 울려퍼졌다. 이탈리아를 향하는 수송선에 서두르던 영국군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이 우스꽝스럽지만 엄숙하기 그지없는 사열식을 얼이 빠져 바라보았다.     


“좋다. 중대장은 이 자리에서, 훈련병 보이텍을 이등병으로 진급시키는 바이다. 이병 보이텍. 경례!”     


보이텍은 멋들어지게 오른발을 들어 어깨 너머로 배운 경례를 해 보였다. 전 부대원들이 그에 화답했다.      


찰스 모건 대위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황당하구만. 그렇지만 그는 뼛속까지 영국인이었다.      


원칙은 원칙이다.      


“좋소. 승선하시오. 대신, 군번, 소속, 계급, 생년월일 중 하나라도 누락되면 여기 두고 갈 거니, 그렇게 아시오.”     

“그럼, 물론이지.”     


담배에 불을 붙여 보이텍에게 물려 주며 안토니가 대답했다. 승리의 미소를 만면 가득 띄우면서. 그렇게 보이텍은 바다를 건넜다. 이탈리아 반도에 도착할 즈음 보이텍은 멀미에 지쳐 전용 나무상자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보이텍! 이등병이 빠져가지고, 안 일어나? 흐뭇한 표정으로 부대원들은 나무상자를 들어 내렸다. 자그마치 여섯 명이나 필요했지만.


          

에딘버러, 1963      

    

안녕, 보이텍.      

안녕, 토마쉬.     

아, 난 이 이름이 정말 좋아요! 하루 종일 노래했어요, 토마쉬, 토마쉬. 곰이 지어준 나의 이름은 토마쉬. 아무도 들어주지 않지만 아무려면 어때, 내 이름은 토마쉬. 토마쉬, 토마쉬! 울림도 끝내준다네, 토-마-쉬.         

 

늙은 곰은 미소지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토마쉬, 바다 이야기를 해 줄래?  

바다 이야기요?      

그래, 바다 이야기. 나는 하루종일 – 겨울이 열 몇 번이나 지나도록 이곳에만 있었거든.  

그러면 안 됐어요, 나쁜 인간들. 나쁜 인간들! 바다에는 창살도 없고 우리도 없어요. 어떤 그물도 나를 가둘 만큼 크지는 않거니와, 설사 붙들린다 해도 나는 바로 달아날 수 있거든요. 좋아요, 보이텍. 나는 아무에게도, 그 무엇도 전할 수가 없었어요. 대신 많은 것을 보고 듣지요.          


바다의 이야기는 넓었다. 깎아지를 듯이 솟아오른 날카로운 절벽, 밝고 뜨겁게 내리꽂히는 세찬 빛, 꿈틀거리는 기괴한 촉수, 환하게 펼쳐진 물의 숲, 못되먹은 이빨을 가진 고기, 눈이 내리고 불이 쏟아지는 경계의 바다, 아무도 아직 찾지 않은 깊고 깊은 푸르름을, 보이텍은 즐거운 마음으로 들으며 머릿속에 그리려 했다.   

        

미안해요, 보이텍. 내 이야기가 지루한가요? 아무 말이 없네요.     

아냐, 토마쉬. 나는 한번도 겪지 못한 이야기들이라 정신없이 들었어.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응, 네 이야기는 참 재미있어. 신기하기도 하고.     

으음........     

왜?     

혹시, 당신 이야기도 해 줄래요?     

내 이야기?       

그래요, 당신 이야기. 당신의 고향은 어디였나요?     

내 고향이라.     

고래에게는, 고향이 없어요. 굳이 말하자면 바다가 고향이겠지요. 그렇지만 바다는 너무도 큰데다 끊임없이 흐르고, 마음만 먹으면 그 어디에도 갈 수 있어요. 어디에도 갈 수 있어서,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걸까요.     

나는, 그냥 어디에도 갈 수 없어.     

동물원 때문이지요? 창살과 우리가 있는, 동물원 말이에요.     

그래.      

그 동물원이 당신 고향인가요?     

아냐, 아냐.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사막의 산이었다고 들었던 것 같아. 그래, 고향이 있기는 있는 셈이지.   

그거 잘 됐네요!     

별로. 어차피 기억도 나지 않는걸. 나도 너만큼이나 고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두 짐승은 잠시 침묵했다. 고래의 말을 듣기 전에는 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것이 바람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보이텍은 몰랐다.       

   

보이텍, 당신은 그곳에서 외롭나요? 당신 혼자 있나요?     

대부분은, 그렇지. 굴 안에서만 있으니까, 나 혼자.     

그렇다면, 우리 둘 다 외로운 셈이네요. 친구는 닮은 점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그래도 보이텍과 이야기하면, 조금이나마 덜 외로운 느낌이 들어요.     

나도 그래, 토마쉬.     

엿들으려던 것은 아니지만, 아까 낯선 목소리를 조금 들었어요. 혹시 기분이 상했나요?     

아냐, 아냐. 상하지 않았어. 내 옛 친구들이 잠깐. 슈테판과 죄르지.        

  

슈-테-판. 죄-르-지. 토마쉬가 천천히 한음절씩 이름을 읽었다. 빈 보드카 병이 통 통 튀며 구르는 소리로.     

     

그들은 인간인가요?     

맞아, 인간이야.      

목소리가 굉장히 슬퍼 보였어요.     

그래. 아마도 고향에 돌아갈 수 없어서 그럴 거야.     

그들도 고향이 없나요?     

있지만, 빼앗겼어. 그래서 돌아가지 못해.     

안 됐어요. 당신도 고향을 빼앗겼지요.     

내가?     

고향은, 뭍에만 있을 수 있나요? 바다는 뭍이 아니라, 고정된 땅이 없어서 고향이라 부를 수 없는 걸까요?     

글쎄, 토마쉬, 나도 잘 모르겠어. 나는 그저 늙은 곰일 뿐이니까.     

어쩌면 당신이 그들의 고향일지도 모르겠어요.     

제법 어려운 소리를 하는군, 토마쉬.         

 

보이텍은 웃었다.          


그런가요.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혼자서만 많은 생각을 해 왔거든요. 고향에 대해서도요. 나는 고향이 없고, 보이텍은 고향을 잊어버렸고, 슈-테-판과 죄-르-지는 고향을 잃어버렸네요. 우리 모두는 고향이 없는 이들이에요. 기억이나 추억이 고향이 될 수 없다면 말이지요.      

그럴지도.     

보이텍, 나에게 슈-테-판과 죄-르-지 이야기를 해 주지 않겠어요?     

어떤 이야기를?     

당신은, 당신의 이름이 행복한 전사라고 했지요. 이제 전사가 무엇인지 나는 알아요, 전사와 군인은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에요. 당신이 싸웠던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을래요?       

   

내 이야기. 싸우는 이야기. 전사 보이텍의 이야기. 군인들이 서로의 안에서 돌아갈 곳을 찾았던 곳. 몬테카시노 산의 전투. 많은 전우가 죽어갔던 그 곳. 늙은 곰이 꿈을 꿀 때면 언제나 돌아가는 그 곳.

         


이탈리아, 1944          


“보이텍! 보이텍! 조심해, 그 쪽이 아니야! 바위 뒤로 와!”     


자랐지만 아직 어린 곰은 공포에 질렸다. 헨리크, 어디 있어. 야로슬라프, 나 무서워.     


토마쉬는 다리 위가 날아가 있었다. 피와 내장 냄새에 보이텍은 너무나, 너무나 무서워졌다. 주먹이 그의 등짝에 세차게 내려꽂혔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인간의 주먹은 곰의 가죽과 근육에는 너무도 약하기 때문에.     


“보이텍, 정신 차려. 이거 봐, 이거 봐. 내 옷깃을 봐. 이게 누구게?”     


나야, 이건 나야. 미소짓는 행복한 전사, 보이텍.      


“그래, 보이텍. 이건 너야, 제22보급중대의 용감한 병사. 일병 보이텍! 얼마 전에 진급했으면 후임들에게 모범을 보여야지. 물러나. 물러나. 여긴 우리에게 맡겨. 저 뒤로 가. 이놈아, 왜 여기까지 기어나왔어. 저기, 안토니 보여? 중대장 안토니 헤우코프스키. 저기 뒤에, 아냐, 더 가, 한참 더 가! 뛰어! 그래, 뛰어! 너는 살아야 해. 너는 살아야 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해. 이 뱃지를 보며 우리는 싸우는 거야.”     


보이텍은 뛰었다. 네 다리로 힘차게.     

 

“보이텍! 이쪽이다, 보이텍! 얼른, 들어가. 저 뒤로 더 가. 저 박스에 얌전히 숨어 있어. 이 미련퉁이야, 누가 너더러 싸우랬니? 얼른 빠져, 방해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그래, 나는 곰, 인간보다 힘이 좋아, 나는 보이텍. 미소짓는 전사. 내 계급장, 목에 걸려 있어, 나는 일병 보이텍. 멀리 카롤루스키가 손짓했다. 여기야, 보이텍, 얼른 빠져. 씨팔, 전선이 왜 여기까지 밀려. 보급부대가 싸우는 게 말이 돼? 머저리 영국군 놈들, 안토니는 어디에 있어?    

 

25파운드 야포탄. 4개 들었으니 100파운드 상자. 두 개를 한번에 들고도 나는 떨어뜨리지 않았지.       


전투가 끝나고, 지친 얼굴로 전우들은 시신을 수습했다. 아무도 울지 않았다. 다만,


다만 지친 얼굴로.           


하느님 아버지, 저희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이들에게 천국 낙원의 문을 열어주시고

남아있는 저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믿음의 말씀으로 서로 위로하며 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전투가 끝나고, 보이텍은 상병 보이텍이 되었다. 야, 누가 훈장 하나 만들어라! 보이텍, 너는 영웅이야. 아니, 영웅은 저 윗놈들이나 말하는 거겠지. 고맙다, 보이텍. 네가 날, 아니, 우리를 구했어. 


전투는 끝났다. 전쟁이, 끝났다.


1945년의 일이었다. 산에 묻은 시신도, 들에 묻은 시신도 있었다. 몇몇은 바다에 뿌려달라고 했다. 언젠가 해류를 타고 집에 돌아갈 수 있게, 고향의 뭍에 닿을 수 있도록.     

 

돌아가자, 보이텍. 기쁜 얼굴로 전우들이 이야기했다.      


집으로, 고향으로 가는 거야. 정든 집으로, 어머니의 대지 폴란드로.  

   

올라탄 배는 머나먼 북녘의 바다로 향했다. 스코틀랜드, 보이텍은 입 안에서 낯선 지명을 혀로 굴려 보았다. 스 코 틀 랜 드. 글 라  고. 스코틀랜드. 글라스고.      


싸움에서 이겼으나 져 버린 군인들은 고향을 잃었다.     

 

빨갱이 새끼들, 씨팔 스탈린, 개 같은 새끼들.      


뱃전에서, 보이텍은 울렁거리는 검푸른 바다를 겁에 질려 내려다보았다. 겁이 나니, 보이텍? 이리 와라, 맥주 한 병 하자.      


안데르스가 슬픈 얼굴로 보이텍을 토닥였다. 안데르스, 여기에 뛰어들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냐? 토마쉬가 그랬는데. 보이텍은 생각했다. 바다의 냄새는 낯설면서도 그리웠고, 바다의 색은 공포스러우면서도 따뜻해 보였다.          



에딘버러, 1963년 낮          


“보이텍!”     


곰은 굴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정든 폴란드 말이 들릴 때를 제외하고는. 오늘은 여섯 명이었다. 헨리크, 슈테판, 안토니, 알빈, 보이치에흐, 죄르지.    

 

“야, 알빈. 니 있으니까 저 끼 감히 엄두도 못 내잖아.”     


그랬다. 키가 족히 2미터는 되는 알빈은 사기꾼 르보브스키를 제외하면 보이텍을 레슬링으로 이길 뻔 했던 거의 유일한 장사였고, 이제는 백발이 듬성듬성 났어도 감히 다가가기 힘든 풍채를 갖고 있었다. 안녕, 알빈. 그래도 키가 많이 줄었군. 대담하게도 섯 군인들은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었다. 보이텍은 반가워 미칠 지경이었다.   

   

“야야, 아프다, 아파. 그만 핥아라.”     


사이좋게 전우들은 담배를 나눠 피웠다. 무용담을 서로 나누며. 맞장구를 칠 수는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보이텍은 이야기에 낄 수 있었다. 그렇지, 기억나지? 역시, 너는 항상 영리한 곰이었어, 보이텍.      


“엄마, 엄마! 저 아저씨들 보이텍 우리에 있어! 나도 들어가면 안 돼?”     


지나가던 꼬마가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빽 하고 질렀다. 이미 잔뜩 취한 군인들은 담배 연기를 우리 너머로 훅, 하고 내뿜었다. 어머니도 비명을 지르며 아이 손을 붙들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낄낄, 폭소가 터졌다. 그래, 뛰어라, 이 새끼들아.

          

환쟁이 양반은 전쟁에 졌다네

뛰어라, 개새끼들아, 부리나케 뛰어라.   

       

그 뒤로도 몇십명의 어른들과 꼬마들이 지나갔다. 에라, 술맛 떨어지게. 보이텍, 이번엔 니가 한번 해보렴.      


두 발로 우뚝 선 183cm 거구의 불곰이 울부짖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인간들이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죄르지는 거의 웃다가 탈진할 지경이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육사는 감히 다가올 생각도 하지 못했다. 병신 같은 스코트 놈.


그거 아니, 보이텍. 슈테판이 말했다.     


지금 우리 안에 있지만, 저 밖은 더욱 큰 우리란다. 머나먼 이국의 땅에 표류한 신기한 짐승 같아. 오히려 여기가 마음이 더 편해. 여기에는 너라도 있으니까.     


Sto lat. 보드카 잔이 부딪혔다.  

   

Sto lat. Sto lat. 그대와 그대 친족이 백 년은 족히 살기를. 우리는 이미 늙어 버렸지. 기억하는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아.      


보드카 병이 다 빌 때쯤, 보이텍, 하고 죄르지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틀 뒤에, 해가 지고 나면 굴 밖으로 나와 있으렴. 우리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에딘버러, 1963년 밤        

  

안녕, 보이텍!     

안녕, 토마쉬.   

잘 지냈어요? 나는 산책하다 왔어요. 왜인지 기운이 펄펄 나더라구요. 이름이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인지 몰랐어요. 마침 바다도 굉장히 따뜻해요, 이맘때의 바다는 원래 굉장히 차갑거든요, 그런데 앞으로 이틀 정도면 엄청나게 따뜻할 거에요. 고기들도 잔뜩 몰려들 거구요. 아아, 당신에게도 보여 주고 싶은데!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많은 고래들이 모인답니다. 다섯 바다의 노래를 불러요, 매우 아름답거든요. 꼭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에요. 참, 하늘을 나는 물고기를 본 적이 있나요? 내가 어렸을 때에는 새와 잘 구분하지 못했었는데. 그걸 잡아먹는 고기가 있다는 것은 좀 슬픈 일이에요. 대단한 광경이거든요,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 경계를 넘나드는 고기들. 돌고래 – 돌고래를 아세요? 나와 비슷하지만 보다 작은 고래에요. 항상 웃고 있어서 내가 울적할 때면 따라다니곤 해요. 친절해서, 무어라고 계속 말을 걸지만 대답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나와 같이 다녀 준답니다, 고마운 일이죠.     

토마쉬.     

네, 보이텍.     

이틀 뒤에, 해가 지고 나서도 저 바다에 있을 건가?      

그럼요, 보이텍. 두 땅 사이에 바다가 있는데 당신과 이야기하려고 그 아래 숨어 있는답니다.     

혹시.          


보이텍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미안해, 나도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지만, 최대한 뭍에 가까운 곳에서 나를 기다려 줄 수 있어?        

  

토마쉬가 신난다는 듯, 트럼펫 소리를 길게 내었다. 저건 돌격 나팔이지, 보이텍은 큭큭거렸다.      

    

그럼요, 보이텍! 내 유일한 친구가 하는 부탁인데 물론이지요!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있어요. 바다의 시간은 뭍보다도 길거든요!     

고마워, 토마쉬. 때가 되면 내가 해변에서 너를 찾을게. 직접 한 번 보고 싶구나, 내 친구들도 소개시켜 주고 싶고.     

정말 기대요! 토마쉬, 그러니까, 당신 친구 토마쉬도 있나요?         


토마쉬는 다리 위가 날아갔다. 피와 내장 냄새가 역겹고 무섭게 코 끝에 맴돌았다. 그나마 남은 것을 모아다 전우들은 침통한 얼굴로 바다에 뿌렸다. 해류를 타고 고향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 저희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이들에게 천국 낙원의 문을 열어주시고, 남아있는 저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믿음의 말씀으로 서로 위로하며 살게 하소서.


아니, 토마쉬는 없어. 대신 다른 인간들 몇 명이 있어. 모두 좋은 인간들이야.    

 

그렇군요! 슈테판과 죄르지, 나도 알고 있어요. 보이텍, 그 날까지 기다리고 있을게요.


즐겁게 종이 울렸다. 보이텍은 기쁜 마음으로 잠들었다. 그리고 가본 적 없는 고향의 꿈을 꾸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맑은 물과 사시사철 열리는 달콤한 과일나무가, 들을 황금으로 물들이는 밀밭이 있고, 온화한 공기가 맴도는 숲이 있다.          


      

에딘버러, 1947       

   

“보이텍!”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억양이 말을 걸었다. 낯설디 낯선 북해의 바닷바람이 갈색 털을 사정없이 가르고 지나갔다. 여기가 어디야, 이봐, 안토니, 여기 어디야.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1913년에 세워져, 세계 어디를 찾아봐도 저희 에든버러 동물원보다 더 나은 시설과 복지는 찾기 힘드실 겁니다. 그 유명한 참전영웅 보이텍 아닙니까. 최고와 최선의 시설로 책임지겠습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근처에 계시지요? 언제든지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최대한의 예의와 경의로 모실 테니까요.”

“그렇군요. 다만 한 가지 약속해 주십시오. 더 이상은 보이텍을 어디론가 옮기지 말아 주시기를.”

“물론이지요! 사실, 어디 더 좋은 곳을 찾기도 힘듭니다.”

“다행이군요.”     


이봐, 알렉시, 얀, 스취몬, 알뢰지, 슈테판, 안토니, 어디 가는 거야? 여기는 어디야? 날 두고 가지 마.     


“밥 많이 먹어라, 보이텍. 자주 올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보이텍. 안토니는 중얼거렸다.


          

에딘버러, 1948         


안녕, 보이텍.      

안녕, 노바크. 우리 언제 돌아가?      

타르노프스키가 죽었대. 숙청당했다는군. 기어코 돌아갔대? 그래. 참, 아담치크는 죽었어. 놀랍지도 않군, 그렇게 술을 마셔 대더니. 아냐, 자살했대. 언제? 한 달 전에. 근데 왜 우리는 몰랐어? 바다에 뛰어들었다더군. 산골 촌놈이? 응.     


그럴 만도 하지.     


그럴 만도 하다.      


바닷바람은 차가웠다. 토마쉬는, 바다는 모두 이어져 있다고 했었다.    


       

에딘버러, 1963         

 

“꼴 좋다, 개 같은 스코트 놈!”

“멍청아, 조용히 해! 온 동네 사람들을 죄다 깨울 셈이냐?”  

   

술병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사육사를 슈테판이 꽁꽁 묶었다. 이 새끼야, 개 같은 새끼야, 내가 왕년에 나치 배때기에 칼빵을 몇 방이나 놨는지 알아? 조용히 하래도, 헨리크가 타박을 주었다. 얼른 열쇠나 찾아봐. 야, 이거 꼭 탈영하는 기분인데, 해 본 적은 없지만. 왜 없어, 너 탈영 한번 했었잖아. 멍청아, 그건 근무 서고 오다가 술 한 잔 해서 길을 잃었던 거고.      


“찾았다!”     


슈테판이 소리쳤다. 삐이이걱,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문이 열렸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좋아, 보이텍, 이쪽이야! 뛰어! 끼이익, 하고 철문이 열렸다. 이쪽이다, 보이텍. 제발, 이 정도 담은 넘을 수 있다고 해 줘. 어려울 것 없었다. 곰은 원래 나무를 잘 탄다. 그래, 잘한다. 철조망 넘는 훈련, 기억하지? 너 어릴 적에 뭣도 모르고 기어오르다 우리가 엉킨 털 다 풀어 줬잖아. 낄낄. 이봐들, 뛰고 나니 숨이 차는데, 한 잔씩만 하고 가지?      


제대로 된 폴란드 남자는 보드카를 거절하지 않는다.     


“너, 가방에 몇 병이나 가져온 거야.”

“싸게 팔던데.”

“근데 폴란드 것보단 맛이 없어.”

“야, 따지고 보면 러시아 보드카가 제일이지.”

“아무튼.”

“항구가 어디지?”

“저 쪽. 오늘 무슨 기념일이라고 다들 집안에만 있으니, 길거리엔 아무도 없을 거야.”

“배는?”

“항구에 있대. 죄르지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옷은 다 챙겨 왔어?”

“그럼. 비싼 돈 주고 넉넉하게 사 왔지. 이게 뭐라더라, 앙고라였나, 살쾡이였나, 하여튼 무슨 털이야.”

“얼마 줬는데?”

“꽤 줬다니까. 입으면 땀이 주룩주룩 나. 스코트 놈들도 덥다고 안 입는거 내가 구해 왔지.”

“알았다. 얼른 가자고.”

“그런데 정말로?”

“그래, 정말로.”

“진짜로?”     


왜 가다 말고 멈춰, 보이텍은 으르렁거렸다. 그래, 어서 가자, 보이텍.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래, 진짜로. 너무 늦었어, 이미. 16년이나 지나 버렸다.”     


항구에 도착하자 죄르지는 단단히 취해 있었다. 안토니가 불 같이 화를 내며 호통을 쳤다. 이야, 중대장 성깔 어디 안 갔네, 병사들이 낄낄거렸지만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배 어디 있어.”

“아니, 그게, 들어 봐.”

, 어디, 있어, 이 악마한테나 물려갈 주정뱅이 놈아.”

“그게, 내가 선장하고 얘기를 다 했거든? 돈도 다 줬어. 근데 씨발 거지같은 스코트 놈이 돈만 받고 날랐단 말이야.”

“이 개 같은 새끼야, 이 머저리, 주정뱅이 새끼야!”     


바람이 차가웠다. 이럴 시간이 없어. 보이텍이 고개를 들고 울부짖었다.

          


나 여기 있어요!          



항구에서 고래가 떠올랐다. 고래는 컸다. 어마어마하게 컸다. 이집트에서 이탈리아로, 이탈리아에서 런던으로, 런던에서 글래스고로, 글래스고에서 에딘버러로 항해할 때 탔던 배만큼이나. 그 크기에 놀라 보이텍은 잠시 잠자코 있었지만, 서둘러서 토마쉬에게 달려갔다.      


이봐, 토마쉬. 혹시 나와 내 친구들을 고향까지 데려다 줄 수 있을까?    

  

대답이 돌아오기까지의 순간은 꼭 영원과도 같아서, 보이텍은 불안해졌다. 안 된다고 하면 어쩌지? 쾌활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럼요! 그런데, 인간들이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던가요?  

        

보이텍은 웃었다.    

      

아니, 아닐거야, 아마.           


갑시다, 전우여. 고향으로, 정겨운 고향으로 갑시다. 보이텍은 안토니의 허리춤을 세게 밀었다. 안토니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러나 지휘관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안토니는 곧 마시던 보드카 병을 땅바닥에 세차게 집어던졌다. 챙그랑, 하고 병이 깨지는 소리에 노병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군들.”

“예.”

“모두 승선하라. 제22보급연대 마지막 작전이다.”    

 

이거 되게 미끄러운데, 야, 좀 잘 잡아 봐, 아니 미친놈아, 날 잡지 말고. 여섯 인간과 한 마리 곰이 거대한 고래 등 위에 올라탔다. 이봐, 고래, 폴란드 알아, 폴란드? 우릴 폴란드로 데려가! 북으로 갔다가 동으로 – 아냐 멍청아, 쭉 동쪽으로 가야지, 노르웨이까지. 그래, 그래, 거기서 아래로 내려가서 덴마크를 지나면 된다고. 어디 멍청하게 너무 왼쪽에다 떨구지는 말고.    


고래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재미있네요, 보이텍. 천천히 가겠지만, 떨어지지 않게 꽉 잡아요!    

           


북해, 덴마크 근교, 1963        

  

그런데 보이텍, 당신 친구들은 정말로 유쾌하군요.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옛 전우들은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고래는, 토마쉬는, 굉장히 커서 익사하지 않고도 옛 제22보급중대는 드러누운 채로 술을 마실 수가 있었다.

          

Oj córuś, oj córuś nie wychodź za dziada

Ni na dzień, ni na noc, on ci się nie nada

내 딸아, 내 딸아, 사내하고는 결혼하지 말아라

낮에도 밤에도 아무짝에 쓸모가 없단다          


즐거워요! 정말로 즐겁네요. 춥지는 않을까요?     


대답 대신 보이텍은 드넓은 털가죽이 덮인 가슴으로 부대원들을 끌어안았다. 야야, 한판 해? 여전히 인간들은 힘이 없었다. 잘 것 같은 부대원을 보이텍은 가볍게 흔들었다. 보이텍, 아파, 그만해. 나 안 잔다.        

   

이대로 어디까지나 갈 수 있어?     


그럼요, 보이텍. 바다는 모두 이어져 있어요.


어딘지도 모를 고향을 보이텍은 알 수 있었다. 어딘가 그리운 풀의 냄새가, 숲과 산맥의 냄새가, 들의 냄새가 새까맣게 입을 벌린 바다를 건너서도 그의 코에 닿았다.

    

맡겨만 주세요, 보이텍. 그나저나 너무 빠르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메첸리키, 폴란드 북부 근해, 1963       


여기서부터는 헤엄쳐서 가셔야 해요. 물이 얕아 저는 더 들어가지 못하겠군요.     

고마워!     


토마쉬가 천천히 수면으로 떠올랐다. 이봐,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 왔어. 고래가 용케도 잠수하지 않고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뭍에는 왔네.     


알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래.”

“메첸리키다.”

“뭐?”

“메첸리키야. 그단크스 옆.”     


함성이 터져나왔다. 울음을 터뜨리는 이도, 웃음을 터뜨리는 이도 있었다. 아니, 둘 다였다. 군인들은 정든 땅에 발을 디디고 춤을 추었다, 보이텍도 따라 양 발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W moim ogródecku rośnie jagoda

Powiedz mi Maniusiu, cyś była młoda?

Ja zem była młoda jak w boru jagoda

Jak w boru jagoda, kochanecku mój

내 정원에는 블루베리가 자라네

말해다오, 마리아, 자네도 젊었던 적이 있었나

그럼요, 숲에 자라는 딸기만큼이나 어렸지요

숲에 자라는 딸기만큼이나 어렸다오     

숲에 자라는 딸기만큼이나 어렸다오        

  

한참을 춤을 추었다. 보드카가 돌았다. 땅바닥에 뒹굴고 구르며 냄새를 맡으며 전우들은 보이텍에게 레슬링을 걸었다. 돈 걸어, 나는 보이텍한테 건다. 아냐, 나는 알빈한테 걸 테야. 보이텍도 늙었으니 승산이 있어. 그럴 리가 없었다. 곰은 늙었어도 곰이다. 단숨에 모두를 쓰러트리고 보이텍은, 젊어진 보이텍은 병사들의 얼굴을 핥았다.      


해가 곧 떠오를 것이다.      


안토니가 숨을 헐떡이며 보이텍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잘 있어라, 보이텍. 저 고래한테 말 좀 잘 해줘.”


뭐라고?     


“우린 이제 돌아가야 한다. 머나먼 북해의 땅에.”     


믿을 수가 없었다. 분노와 슬픔이 동시에 치밀어올랐다. 이봐들, 레슬링 한 판은 이겨야지, 이번엔 내가 좀 봐 줄게. 가긴 어딜 가, 너희들이 그토록 바라던 고향 땅이야, 폴란드, 폴–란–드, 이름도 아름다운 바로 이 곳. 술과 노래와 기쁨에 취한 병사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련하고 머나먼 눈으로 그들은 보이텍을 바라보았고, 늙은 불곰은 그들의 표정을 읽었다. 그만둬, 제발. 무슨 생각이야.      


“짐 다 챙겼어? 순서대로 간다. 저놈의 고래가 무슨 조화인지 아까부터 가만히만 있네. 원래 고래가 저런가?”

“몰라요, 고래를 본 적이 있어야지. 나야 내륙 출신인데.”

“알빈, 자네도 몰라?”

“대구나 농어나 잡았으면 몰라도 고래는 나도 처음이요. 아, 우리 아버지한테나 물어볼까. 아직 살아 있으면 말이지만.”

“죄르지, 자네는 어디 출신이었지?”

“기억도 안 나요. 기억나는 거라곤 우리 애비가 주정뱅이었다는 것뿐이야.”     

시시콜콜한, 아무 무게도 없는 잡소리가 이어졌다.      


무슨 소리야, 헛소리 하지 말아. 아직 부를 노래가 많이 남았어, Rozwijaj się, wiunku, Nie chodź koło róży, Lipka, 한때 불가에서 새벽이 밝도록 노래하곤 했잖아. 왜 그런 표정이야, 왜 그런 태도야. 이리 와, 이리 돌아와. 해가 뜨려면 아직 남아 있어. 나와 함께 있어 줘.   

   

눈물이 사정없이 털을 따라 흘렀다. 주둥이를 크게 벌리자 포효가 터져나왔다. 제발, 부탁이야, 나를 두고 가지 마, 나를 또다시 두고 가지 마. 보이텍을 끌어안은 노병들의 눈에서도 은빛 눈물이 반짝였다. 달에 비친 그것은 어릴 적 먹었던 연유와도 같은 빛이 나서, 보이텍은 더할 나위 없이 그리워졌다.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가자, 아직이라도 늦지 않았어. 사육사는 나를 동물원의 인기 스타 보이텍이라 불렀어.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조금 투덜거리긴 해도 바로 들여보내 줄 거야. 나를 버리지 마, 한 명도 버려두고 돌아오지 않는다, 자유 폴란드군의 긍지는 어디로 갔단 말이야. 보이텍은 바다로 향했다. 중대장이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안 돼, 보이텍.”     


안토니가 목이 메여 말했다.     

 

“이건 명령이다. 늙었어도 나는 아직 너희 중대장이야. 최후의 일인까지, 군인은 임무를 받았으면 완수해야 해. 여기가 우리가 그리던 고향이야. 훌륭하다, 보이텍 하사. 자네는 임무를 끝마쳤어.”     


지휘관 명령의 무게를 노병들은 알았다. 그것은 보이텍도 마찬가지였다.

     

“소령 안토니 헤우코프스키, 마지막 명령을 내린다. 보이텍 하사, 숲으로 가 예쁜 암곰을 짝으로 맞아라. 그리고 새끼도 여러 마리 낳아라. 자유롭게 숲을 노니며 우리 고향을 수호해라, 언젠가 남은 우리도 모두 돌아가는 날까지.”     


“보이텍도 다 늙었는데 그럴 기운이나 있을까 몰라. 하다가 기운 빠져 죽는 것 아뇨?”   

  

누군가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졌다. 다들 기운들 좀 내, 다신 못 볼 것도 아닌데 왜 이리들 청승이야? 그제야 보이텍도 울부짖기를 멈추었다.      


“미안하다, 보이텍.”     


안토니가 주름진 눈으로 말했다.     


“더 빨리 꺼내 주지 못해서. 너만 여기 두고 가게 되어서.”     


다신 못 볼 얼굴들을, 냄새를, 소리를, 보이텍은 늙고 닳아 버린 귀와 눈과 코로 열심히 담았다. 거대한 곰을 노병들을 힘차게 껴안았지만 그 팔은 옛날 같지 않았다.      


잘 있어라, 보이텍. 새끼 많이 낳아라. 쏘련 빨갱이 새끼들은 곰을 좋아한댄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래, 보이텍. 이봐요 루스키, 담배 한 갑만 주쇼, 해. 보이텍, 아직도 나치 놈들이 숨어 있을지도 몰라. 보면 꼭 물어죽여라. 안녕, 보이텍, 이리 와, 한 보루 가져가. 포장도 다 뜯어 놓았어. 주머니에 걸어 줄게. 야, 보드카 남았냐? 이제 딱 한 병 남았다. 얼른 꺼내 봐. 저 고래도 좀 줄까? 아서라, 성경에 요나 이야기도 모르냐. 니 애비처럼 니도 주정뱅이라 비틀대다 꿀꺽 삼켜질걸.     


다 큰 불곰이 먹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양이었으나 전우들은 술병을 돌렸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Świeci miesiąc, świeci, z północy do rana,

Nie mogę zapomnieć, nie mogę zapomnieć mojego kochania

Nie mogę zapomnieć, mój Boże jedyny, mojego kochania

달이 빛나네, 빛나네, 자정부터 아침까지

잊을 수가 없네, 없네, 내 사랑하는 임을

잊을 수가 없네, 주여, 내 사랑하는 임을     

     

불러도 꼭 이딴 걸 불러, 하여튼 눈치도 없어, 투덜거리면서도 군인들은 하나둘 합창을 시작했다. 옛 불가에서 그랬듯이. 심지어는 토마쉬의 목소리도 섞여들었다. 휘-휘-휘. 입술을 오므리고 맥주병을 부는 소리로.


Tam się zachmurzyło, gdzie zaświtać miało,

To moje kochanie, to moje kochanie z wiatrem poleciało

To moje kochanie, mój Boże jedyny, z wiatrem poleciało

새벽이 와야 하는데 구름만 잔뜩 끼었어

내 사랑, 내 사랑하는 임이 바람에 날려가 버렸네

내 사랑, 내 사랑하는 임은 바람에 날려가 버렸어     


Z wiatrem poleciało, popłynęło z wodą,

A moje łzy w oczach, a moje łzy w oczach obeschnąć nie mogą

A moje łzy w oczach, mój Boże jedyny, obeschnąć nie mogą

바람에 날려가 버렸어, 물에 떠내려가 버렸어

내 눈에는 눈물이, 내 눈에는 눈물이 마를 새가 없어

내 눈에는 눈물이, 하느님 아버지, 마를 새가 없어요        

  

후렴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부르고 나자 노래가 잦아들었다. 몇 시간 뒤면 해가 뜰 것이다. 마지막 포옹을 나누고, 고향 잃은 군인들은 잠시나마 밟은 고향의 땅에서 고향 없는 고래의 등 위로, 하나둘씩 올라탔다.     

 

“전체, 차렷.”
 

보이치에흐가, 취해서인지, 아니면 억지로 무언가를 삼키려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잔뜩 꼬부라진 혀로 말했다. 물에 젖은 가죽이 미끄러워 발을 헛디뎠으나 용케도 균형을 잡고 부동 자세를 취하며.     


“보이텍 하사에게 경례!”     


말없이 손들이 올라갔다. 보이텍도 멋들어지게 오른발을 들어 답례를 건넸다. 토마쉬가 꼬리를 들어 물 위로 크게 내리쳤다. 깜짝 놀란 전우들은 이내 재밌다는 듯이 낄낄거렸다. 잘 있어라, 보이텍! 자유롭게 살아라! 고향 땅을 잘 부탁한다! 왁자지껄, 따로 헤아릴 수 없는 함성이.   

   

걱정 마, 다들. 슬픈 슈테판, 중대장 소령 안토니, 똑똑이 보르치에흐, 주정뱅이 죄르지, 장사 알빈, 투덜이 헨리크. 안녕, 안녕.      


마침내 토마쉬와 전우들이 자그마한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보이텍은 바다를 향해 코를 높이 들었다. 냄새마저도 바다에 묻혀 버렸을 때, 먼 데서, 맑은 빗방울이 나뭇잎을 때리는 듯한, 산허리에 울리는 깊은 메아리와 같은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보이텍.     

안녕, 토마쉬.     

아직도 해변에 있나요, 보이텍?     

그래. 너는?     


토마쉬는 잠시간 침묵했다. 잠시간, 보이텍은 숲에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나는, 토마쉬가 말했다. 머나먼 과거로부터 울려퍼지는, 모든 추억과 그리움이 – 그 짧은 만남에도 온전히 담길 수가 있다니, 신기했으나 보이텍은 잠자코 들었다.           


나는, 많은 바다를 다녔어요. 열대의 섬을 지나 북해의 빙하를 가로지르고, 불을 뿜는 산과 거꾸로 솟아오르는 빗줄기도 보았지요. 날카로운 이가 달린 상어도, 구불구불 기다란 커다란 뱀, 다리가 여럿 달린 바다의 괴물, 커다란 날개를 펴고 물속에 파고드는 새까지. 당신은 결코 보지 못할 아름답고도 처연한 광경을. 신비하고도 잔혹한 광경을. 바란다면 그 어디에도, 광활한 물이 이어져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에라도, 내가 바란다면, 나는 갈 수 있어요.    

  

그렇지만, 돌아갈 곳은 없군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당신은 말했었죠. 아니에요, 당신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답니다. 고향이란 태어난 곳도, 잊어버린 곳도 아니에요, 누군가가 당신을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곳이 바로 고향이에요,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서 배웠습니다. 바다는 드넓어요. 뭍의 모든 생명을 받아들이고도 남을 정도로 드넓답니다. 있어야 할 것도, 있었던 것도 모두 받아들여요, 바다는 모든 생명의 고향이지만 동시에 그 누구의 고향도 아니랍니다. 나는 많은 것을 보았지만 내 고향은 바다에 있지 않아요. 당신이 그래서 부러웠습니다.      

그렇기에 미안해요. 진심으로 미안해요. 나는 엄청난 죄를 지어 버렸어요. 태어나서 처음 사귄 친구에게 나는 못할 짓을 해 버렸군요. 미안해요, 보이텍.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어요. 당신의 고향을 나는 앗아가 버렸어요,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당신의 유일한 고향을 내가 빼앗아 버렸어요.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미안해요, 진심으로 미안해요.     


괜찮아. 네 잘못이 아냐.     

나를 용서해 주세요, 아니야,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그럼에도 나를, 언젠가는.     

네 잘못이 아냐, 괜찮아, 토마쉬.     

보이텍, 당신은 참으로 너그럽군요.     

아무쪼록, 내 친구들을 잘 부탁해.     

걱정마세요. 좋은 인간들이에요. 노래의 뜻은 모르지만, 나도 따라 불렀거든요.   

그래, 나도 들었어.     

만약 다음 생에 나도 곰으로 태어난다면, 저런 인간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 그럴지도. 어쩌면 내가 고래로 태어날지도 모르지.         

 

맑은 소리로 토마쉬가 웃었다. 울적함이 조금은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 보이텍도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우리 둘이 함께 있으니 드넓은 바다도 그렇게 외롭지는 않겠어요. 정말로 좋은 생각이네요.    

  

그렇지?   


보이텍.   


토마쉬.    

 

당신, 지금 웃고 있군요. 미소짓는 전사, 보이텍.     


그래. 나는 지금 웃고 있어.     


잘 살아요, 보이텍. 당신 덕분에 외롭지 않았어요. 나는, 행복했답니다.    

  

나도 그랬어, 고마워, 토마쉬. 내 친구들 소식도 가끔 전해 줘.  


물론이에요, 물론이에요. 안녕. 언젠가, 바다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아무튼, 바다는 넓으니까요. 받아들일 것은 모두 받아들인답니다.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척 많아요.     


기대하고 있을게.     


안녕, 보이텍.  


안녕, 토마쉬.       

        

소리가 멀어져 갔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부드럽게 울리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해가 곧 떠오르리라. 늙어버린 몸은 새 태양을 맞아 다시금 타오를 것이다. 바다 냄새는 정신을 바짝 일깨운다. 보이텍은 차가운 겨울 바다에 뛰어들었다. 네 다리가 본능적으로 움직였고 물이 뻣뻣한 털을 감쌌다.      


바다는 어디에나 닿아 있다. 가지 못할 고향도, 잃어버린, 잊어버린 고향도 지금 이 순간에는 닿아 있는 것이다. 돌아갈 사람들도 그리운 사람들도 기억해야 할 사람들도 저기 드넓게 펼쳐진 바다에 있다. 마침내 아침해가 떠오를 때까지, 보이텍은 먼 바다로 발을 놀려 갔다. 나는 여기에 있어, 너희들도 거기에 있어, 얼마나 떨어져 있든 간에 상관없이, 어머니의 물에 우리 모두 안겨 있어. 어디에 있든 간에.      


해가 높이 떠올랐다.    

  

마지막 임무를 받은 하사 보이텍은, 저 멀리 보이는 낯설지만 그리운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크라쿠프 포스트, 2014518일자   

       

참전영웅 보이텍 기념비 세워져     


헨리크 요르단 공원에 참전영웅 보이텍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폴란드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사랑하는, 자유 폴란드군 소속 제22보급연대의 마스코트이자 훌륭한 군인이었던 곰 보이텍은 1963년 에든버러 동물원에서 실종된 이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아직도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기억되고 있다. 이번 기념비 건립 모금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보이치에흐 나렘프스키 교수와 찰스 모건 예비역 대위는 ‘보이텍은 우리 모두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전투도 생활도 함께한 하나의 전우입니다.’ 라고 소감을 밝혔다. 보이치에흐 교수는 스코틀랜드 경시청에 의해 1963년 에딘버러 동물원 보이텍 실종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혹은 조력자로 지목되었으나 모든 혐의를 부정한 바 있다. (후략)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 그단스크 근해에서 포착     


그단스크 앞바다에 ‘52Hz 고래’가 출몰했다는 소식이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라는 별명을 가진 이 생물은, 1989년 미 연방해양대기청에 의해 처음 발견된 이후, 2004년에 마지막으로 SOSUS(; 수중음향감시체계)에 포착된 이래로 그 존재조차도 의심되어 왔다. 이번 사건에 대해 폴란드 정부당국은 허가 없는 비공식적 음향탐지에 대해 주권 침해라고 엄중히 항의했으나, 연방해양대기청은 ‘평시에도 있는 국가간 해양안보조력행위에서 발견된 부수적 사건’이라 해명했다.      


(중략)     


고래가 인간의 그것과 필적하는 복잡한 – 초음파와 낮은 주파수를 통한 – 언어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나, 놀라운 점은 일반적인 고래가 12에서 25Hz 사이의 주파수에서 의사소통을 하는 반면, 이 ‘52Hz 고래’는 평균보다 월등히 높은 52헤르츠의 주파수를 발산한다는 점에서 앞서 말한 별칭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연방해양대기청의 해리 갤러튼 박사는 이에 대해, ‘소위 말하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는 우리에게도 알려진 점이 거의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 고래가 북태평양 일대에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폴란드 북부에서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저희에게 있어서도 매우 놀랍고, 또한 10년만에 듣는 반가운 소식이라고 생각됩니다.’ 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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