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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Aug 21. 2019

K에게

1.


어떤 -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이 집이 아니란 것은 우스우면서도 슬픈 일이다. 예컨대 우리 아버지는 평생을 불면증에 시달려왔는데, 그가 유일하게 맘편하게 잘 수 있는 곳은 내 외할아버지(그의 장인)집이다. 침대도 없고 빛도 들지 않는 딱딱한 바닥에서 너무도 편안하게 그는 잔다. 어떤 공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나의 공간에는(물론 나의 것은 아니나) 고양이가 있고, 플레이스테이션 4가 있고, 술이 있고, K가 있었다고 하자.


사람이 어쩌다 사람을 만났고 사람이 어쩌다 사람과 친해졌는지 따위는 돌이켜보면 중요하지 않거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일이라, 처음 보았을 때 K는 경상도 사투리가 심한 건방진 후배에 불과했는데, 어쩌다 친해졌는지는 굳이 따져보면 머나먼 땅끝에 사는 내게 있어 하룻밤을 보낼 곳이 하나 더 생겼음이라.


2.


너는 - 그랬나? 내 착각인가? - 적어도 너의 부모님은, 내가 너를 구해 주었다고 한다, 아니야, 내가 너에게 구해졌다, 외로움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어떤 철학자가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너는 나를 죽음에서 구해준, 삶으로 되돌려준 셈이다.


3.


북해의 바다로 K는 간다. 그가 대마초나 피우지 않기를. 여섯 명의 일원에서 자신을 잃지 않기를. 그의 고양이가 - 고양이지만 아주 개 같은 새끼다 - 그를 그리워하기를.


4.


그리고 당신이 글을 쓰기를! 어딘가에 계속해

서 닿아 있기를! 마침내 성공해 잘나가는 목재상을 차리기를! 아니면 로또에라도 당첨되던가. 내가 너를 그리워하는만큼.


5.


버번 병은 쉬이 깨지지 않을 것이다. 버번 병이 깨지려면, 결핵에 걸린 총잡이가 단숨에 들이킨 이후 말잔등에서 무심히 내던져야만 한다. 45도, 90 proof. 천사가 몇 모금 빨아먹더라도. 아무 말도 없이, 머나먼 북녘의 바다로.


고맙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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