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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Oct 10. 2019

늙은 꿈

1.


여주를 다녀왔다. W와 Y와. 가볍게 일만 좀 하면 된다는 말에는 나도 속아 버려서, 늘어선 깨를 베고 또 베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엔 숫제 지쳐 버려 무사처럼 낫을 잡고 단칼에 휘둘러 베어 버렸다. 그 와중에 Y는 낫에 손이 베여 버렸고.


농사일은 고된 일이다. 맑은 공기, 노동의 즐거움, 땀흘린 뒤에 먹는 밥이니 뭐니 해도 허리는 펴지지 않고 허벅지에는 쥐가 나 나중엔 걷지도 못할 정도가 된다. 저걸 또 이제 묶어다 세워 놓고 바짝 말려서 깨 또 털어야 하는데 어느 세월에 다 한담.


쌍욕의 전문가 84세 김택영 옹은 우리 외할아버진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일을 못하니 어쩌니 알아듣기도 힘든 강원도 사투리로 쌍욕을 퍼부었고 우리는 악덕 농장주의 채찍질을 견디며 그옛날 노예의 심정을 잠시나마 맛보았다. 염병할 영감재기.


2.


밥을 먹다 말고 할아버지가 서라벌예술대학이 아직 있냐고 물었다. 아직 있겠죠, 뭐. 하고 대충 대답했다. 워낙 돌아다니고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양반이라 한번 놀러가자는 얘기인줄 알았는데, 갑자기 옛날 이야기를 꺼내더라. 자기도 거길 가고 싶었다고.


화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정색을 하며 못 가게 했단다. 딴따라나 될 생각이냐고. 그 시절에는 다들 그랬다고. 이후 할아버지는 농사를 짓고 강원도 산골 면장을 지내고 화투를 잘 치며 나만 보면 얼른 공장이라도 들어가서 결혼이나 하라고 잔소리를 해 대는 노인이 되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상상도 해 본 일 없는 외손자가 되었고, 할아버지한테 배운 것은 쌍욕과 화투뿐이다.


밤에는 외할머니와 이야기를 했다. 이제는 취직도 했겠다, 월급 타면 맛있는 거 사 드릴 테니 뭘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그런 게 없단다. 할머이는 좋아하는 것도 먹고 수운 것도 음써. 할마이 아무리 그래도 좋아하는 게 하나쯤은 있잖소. 할마이는 그런기 없대두. 글쎄 돈 걱정 말고 말해 보라니.

음써, 할마이는 그런 게 음써.


나는 어딘가 서글퍼졌다.


3.


집에 돌아와서, 두분의 딸(그러니까, 내 엄마)에게 이야기를 했다. 여주 집 가면 할아버지가 그린 그림이 아직 쌓여 있단다. 나는 왜 본 적이 없을까.


번역회사에 취직을 했다. 연봉은 높지 않은 중소기업이지만, 항상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대기업은 죄다 떨어졌고(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열심히 다녀볼 생각이다.


월급 타면 색연필이랑 회나 한 접시 떠서 사가야겠다, 하고 올라오는 길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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