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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Nov 28. 2019

기술에 대한 잡설


1.

전에도 말한 적 있는 것 같은데, 나는 히어로 영화를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아이언맨은 그나마 마음에 드는데, 수트 따위야 악마나 물어가라고 하고 - 나야 놀이기구도 못 타니까, 그따위 것 타 봤자 날아다니는 시간보다 수트 안에서 토사물 긁어내느라 하루 온종일 보낼 것이다 - 부러운 건 그 인공지능 비서다. 자비스였나. 세상이 하도 좋아져서 스마트폰에 구글 어시스턴트였는지 날을 잡고 말을 걸어 봤는데 멍청한 놈이 하나도 못 알아듣더라. 강변 테크노마트에서 할부 원금 0원을 주고 산 보급형 핸드폰이라 그래선지는 모르겠지만.


2.

스마트폰, 접는 스마트폰, VR, 자율주행차. 세상은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바빠지고 가까워지고 좁아진다. 인간이 설 자리는 하루하루 사라져만 간다. 꼰대냐고? 아직 그 정도로 나이를 먹진 않았다. 그래도 나는 매일 내가 너무 늦게 태어났다는 생각을 한다. 나한테 필요한 건 맥주랑 치약뿐이다. 악기도 기원전부터 있었고, 고대 그리스에는 이미 세계(라봤자 지중해 일대지만)에서 인정한 도서관이 있었다. 약자는 죽어도 할 말 없다라는 정치관은 좀 두렵긴 하지만, 어쨌든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기술 한정이다.


3.

그 '기술'의 발전 덕에 어쨌든 나는 먹고 산다. 얼마나 더 먹고 살지는 모르겠다. 점점 많은 영역이 좀먹혀 간다. 번역은 특히 더 그렇다.

세상은 가까워진다. 좁아져 간다.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익숙해져 가고 안락해져 간다. 시계도 볼 줄 모른다. 기다릴 줄 모른다. 배우고 익힐 생각을 하지 않는다. 좋다면 좋은 현상이다.


4.

나는 세상이 더 불편해졌으면 좋겠다. 게임 중독자지만, 게임이야 없어도 아무려면 어떤가. 기계에 대한 증오로 세상을 때려부수고 암흑으로 회귀하고 나면 무언가, 우리가 오래도록 잊어 왔던 무언가를 발견할 지도 모른다. 혹은, 기다리며, 있지도 않은 무언가를 믿고 기다리다 우리는 침묵과 권태 속에 죽어갈지도 모른다.

그 끝에 절망과 외로움만 남는다 해도 나는 농사를 짓고 싶다. 손에 흙을 묻히며, 땀을 흘리며 잡초를 키우다 절망해 죽어버리고만 싶다. 기계와 발전을 부수고 서로를 바라보며 도우면 오죽 좋으랴! 세상은 무서워져만 간다. 접는 스마트폰이 다 무엇이냐. 세상의 어딘가에선 당장 먹을 밥이 없어 죽어가는 이들이 있는데.


5.

서로에게 눈을 돌리자. 연민하지도, 동정하지도, 분노하지도 말자. 희망찬 내일을 믿는 행위 따위는 관두자. 모두 그만두고 멈춰 버리자. 멈춰서, 멈추고 나서야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자, 싸우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살을 맞대며 살아가며 사랑하자. 내려놓고 노래를 부르고 기다리며 하늘을 보며 땅을 믿으며,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에 의지하며, 그럼에도 내일을 다시 한 번 기대하자. 죽이고 살리며 야만 속에서 이성을 꿈꾸자.


6.

나는 그저 외로울 뿐이고, 문명의 발전을 오만한 입장에서 내려다보고 싶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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