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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Jan 27. 2020

변기

자취를 하고부터 일종의 결벽증 같은 것이 생긴 것 같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오래 본 친구인 W가 그랬으니까. 여기에는 일종의 혐오가 있다. 생명에 대한 혐오가 그나마 가장 가까운 말일 것 같다. 머리카락이나 피부의 조각, 내가 방금까지 주둥이에 넣었고 곧 다시 흘려보낼 음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어딘가 역겨워진다. 화장실에 슬어 있는 곰팡이나 ‘여기라면 못 찾겠지?’ 하며 붙어 있는 먼지나 머리털 따위를 보면 서둘러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변기란 좋은 물건이다. 정말로 신이 내렸다고밖에는 할 수 없다.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도 모르지만, 적절한 크기나 부피를 가지고 있다면 그저 처넣고 레버를 당기면 시원한 소리를 내며 쓸려내려간다. 음식물도 먼지도 머리카락도 배설물도 욕망도. 


세상에도 이런 구멍이 하나쯤 필요하지 않을까? 혐오도 증오도 분노도 무기도 절망도 생명도 모두 처넣고 물을 내린 다음 악취가 올라오겠다 싶으면 락스를 조금 붓고 뚜껑을 닫아 놓는 것이다. 30분쯤 뒤에 환기팬을 켜고 물을 내린다. 막히면 골치가 아프고 집주인한테 - 집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 눈치야 조금 보이겠지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고, 누가 그걸 처리할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은 보다 청결해지고 보다 심심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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