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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코뿔소 Jan 27. 2020


많은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처음엔 눈이었죠. 아세요? 추운 날에 하늘에서 내려, 소복하게 쌓이는 얼어붙은 물이에요. 모르신다고요? 그러시겠죠. 사실,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저도 딱히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다음엔 뭐였을까요. 잘은 기억나질 않네요. 그래서 무서운 것일 테지요. 잊어버리고, 잊어버렸단 사실마저 잊어버리고 나면 무엇을 잊어버렸는지는 무엇을 해도 결코 다시 떠올릴 수 없으니까요.


눈이란 것은, 쓸자 하면은 골치아픈 것이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어요. 한참을 쓸고 나 뒤를 돌아다보면 그새 소복하게 쌓여 있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저는 그 고요함이 좋았어요. 세상이 하얀, 새하얀 눈에 온통 뒤덮이고 나면 들리는 소리는 슥, 슥 하고 비질하는 소리와 라이터가 치익, 하고 켜지는 소리뿐이었거든요. 그 모든 소리를 조용히 덮었답니다. 말도 안 된다고요? 소리를 덮는, 모든 소리를 그저 삼켜 버릴 뿐인 소리란 게 한때는 진실로 있었답니다. 그뿐인가요. 담배 연기가 하늘로 솟으면 눈과 얽혀들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사라지곤 했지요. 이쯤하면 되었다 싶어 잠시 앉아 내리는 눈을 바라보자면 어느덧 머리와 어깨에 눈이 잔뜩 쌓여 몸은 식어들곤 했어요. 그러면 이제 방으로 들어가 물을 올려 차를 한 잔 타 창밖을 내다보지요. 그런 세상이 있었어요. 당신은 모르겠군요. 눈은 더 이상 오지 않아요. 오더라도 세상의 모든 더러움과 아픔 위에 내리지는 않아요. 그저 까맣고 때로는 무서울 정도로 눈이 부신, 샛노란 빛깔의 눈만 내릴 뿐이니까요. 그것은 눈이라고 할 수 없어요. 아무렴, 아니고말고요.


자아, 불가에 몸을 녹이세요. 이 정도 추위는 제게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혹은 반대일지도요. 눈이 오면 세상은 더욱 따뜻해진답니다, 따뜻해졌어요. 모든 추위에는 일말의 따스함이 있었지요. 모든 악한 이에게 선함이 있듯이, 모든 선한 이에게 악함이 있듯이, 아니, 있었듯이요.


지금의 추위는, 그저 추위일 뿐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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