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어마어마한 주당이다. 그가 얼마나 술을 잘 마시는지 알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런 탓인가, 가족이 모여 외식을 할 때 그의 얼굴에서 심심함을 찾을 수 있다. 아버지 만큼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심심할 법도 하다. 나는 감히 그에게 범접할 수 없고, 엄마는 술을 잘 안 하며 누나는 아끼는 편이다. 그러니 심심할 수밖에. 종종 외식을 마치면 동네 아저씨를 불러 한 잔 하러 가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아버지의 간을 물려 받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내가 아버지 만큼 마셨다면 그의 얼굴에서 심심함을 찾거나 외식을 마치고 다른 길로 새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누구나 다 그렇듯이 나도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걸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다. 맹세컨대, 27년 살면서 그가 취하고 주사 부리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가끔 집에서도 술을 마시는데, 그의 안주는 대부분 두부 한 모와 김치다. 그는 두부 한 모와 김치만 가지고도 술을 2-3병 마시는 사람이다. 그 정도 마시고 나면 거실에서 아주 멀쩡한 정신으로 TV를 조금 보다가 방에 들어가 잠을 청한다. 그는 언제 취하는 걸까.
엄마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토는 몇 번 했다고 한다. 토했다 해서 취했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고, 그가 성인이 될 즈음 동네 야산에서 소주를 잔뜩 마시고 취했다고 하는데, 그 양이 소주 패트병으로 몇 병이라고 했던 것 같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나중에 다시 물어보겠다.
그래서, 아버지의 주량에 관한 이야기를 한 건 미안함 때문이다. 처자식들 데리고 외식하러 나가서 기분 좀 내볼까 했지만 술이 성에 안 차고, 돈은 돈대로 쓰고 살아온 그의 인생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내가 술을 조금 더 잘 마셔서 그의 얼굴에 만족감이 뜬 채로 넷이서 같이 귀가하면 어땠을까. 혹은 2차를 내가 같이 갈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미안함이다.
기껏 자식이라고 귀하게 키웠더니 벌이도 변변찮은 마당에 술도 잘 못한다. 게다가 이놈은 또 뭐가 좋다고 그 멀리 프랑스까지 갔는지. 과연 이놈이 스물 여덟 먹고 한국에 돌아와서 잘 살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키우긴 했는데 영 시원찮다.
그 와중에 술이라도 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다. 온갖 미안함이 마음 속에서 다 떠오르니 그거라도 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끝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 이곳에 떠나온 것도, 떠나는 날 출근하는 아버지 뒷모습에 비몽사몽한 채로 인사한 것도, 이곳에서 연락을 뜸하게 하는 것도, 미안한 것이 너무 많다. 나는 아직도 2019년 6월 17일의 아침을 후회한다.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떠나온 것을 후회한다.
당신이 살았던 젊은 시절과 다르게 살고 있는 지금의 젊은이들이, 당신의 아들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저 부모라는 이름으로 이해하려 애쓰고 응원해주는 마음에 미안하다. 나는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당신의 젊음을 다 앗아간 나는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내가 잘 사는 것이 과연 보답일까.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