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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Aug 16. 2019

전설은 네 시간만에 탄생했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1957)



매년 8월이면 충북 제천에서 열리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간다. 많은 영화제들이 매년 관객을 그곳으로 향하게 하는 특별한 관람 경험과 추억을 선사하는데, 제천의 경우 청풍호수를 곁에 두고 영화와 공연을 함께 즐기는 ’원 썸머 나잇’ 프로그램이 특히 아름답다. 


올해도 산의 능선이 병풍처럼 스크린을 에워싼 청풍호에서 우크라이나 무성영화와 라이브 연주를 함께 듣고 왔다. 이 경험을 잊지 못해 내년에도 제천을 찾을 것이다. 영화제의 메인 상영관인 제천 메가박스 앞에서 맛볼 수 있는 ’빨간오뎅’도 마찬가지로 그리울 것이고.

그러나 올해의 영화제에서 가장 강렬하게 마음을 ’찌른’ 순간은 따로 있었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마일즈 데이비스, 쿨 재즈의 탄생>이란 다큐멘터리를 보던 순간이다.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 마일즈 데이비스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한 이 작품은 한 인물의 일생을 조명하는 전기 다큐멘터리의 전범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느껴졌다. 


자기 자신과 음악 이외에는 거의 모든 것에 무심했던 남자,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하던 순간에 몇번이고 재기한 불굴의 뮤지션, 흑인들의 스타일 아이콘, 매너리즘에 빠지는 걸 극도로 경계하며 매 순간 앞으로 나아갔던 혁신주의자…. 

마일즈 데이비스

<마일즈 데이비스, 쿨 재즈의 탄생>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재즈 뮤지션의 다양한 얼굴을, 성실하게 수집한 자료 영상과 믿을 만한 취재원들의 목소리로 솜씨 좋게 엮어낸 수작이었다. 국내 개봉은 미정인 듯한데 언젠가 왓챠에서도 보게 될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처음 보게 된 마일즈 데이비스의 모습이 있다. 프랑스 감독 루이 말의 서정적인 스릴러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사운드트랙을 작업하던 당시의 기록 영상이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첫 영화음악 작업으로 화제가 된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는 지금까지도 유수의 영화·음악 매체들이 선정하는 ’올 타임 베스트 오리지널 영화 사운드트랙’ 목록의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곤 한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열렬한 팬이었던 영화의 조감독이 마침 프랑스 투어 중이었던 데이비스에게 영화음악 작업을 제안했고, 그가 제안을 받아들이며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협업이 이뤄졌다.  


다큐멘터리에서 마일즈 데이비스는 루이 말 감독에게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주요 장면을 보여달라고 한다. 그리고는 트럼펫을 들고 즉흥적으로 영화의 장면에 반응해 멜로디와 선율을 만들어나간다. 다가오는 모든 우연에 몸을 맡기고, 명민한 감각으로 리듬을 타며 선율을 가다듬는 그의 모습은 이 모든 상황이 리얼타임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믿기 어려울 만큼 신묘하고 감탄스럽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영화음악 작업에 참여한 시간은 총 네시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가 루이 말과의 협업을 통해 완성한 결과물은 위대한 예술작품을 만드는 데 반드시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라는 점을 일깨운다.

Jeanne Moreau and Miles Davis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사운드트랙의 특별함은 영화의 초반부터 드러난다. 여자주인공 플로랑스 역을 맡은 잔 모로가 파리의 밤거리를 걷는 대목이다. 완전 범죄를 꿈꾸며 연인 줄리앙과 모의해 남편을 죽인 플로랑스는, 약속 장소에 줄리앙이 나타나지 않자 술집과 밤거리를 배회하며 하릴없이 연인을 기다린다. 살인의 증거를 가지러 돌아간 줄리앙이 엘리베이터에 갇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날카롭게 공기를 찢으며 퍼져나가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트럼펫 선율은 욕망에 사로잡혀 잘못된 선택을 한 연인들의 불안정하고 공허한 심리를 대변하는 한편, 스릴러 장르를 표방하는 이 영화에 서정성을 덧입힌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를 생각할 때면 어김없이 머릿속에 맴돌던 재즈 선율에 이제는 한 남자의 초상이 겹쳐질 것 같다. 트럼펫을 들고 결연하게 우연과 맞서며 영화의 공기를 채워나가던, 어느 위대한 뮤지션의 초상이. 



이 영화, 지금 보러 갈까요?


장영엽 / 씨네21 기자


존 파울즈와 에드거 앨런 포를 사랑했던 영문학도였으나, 2004년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를 본 뒤 영화로 소통하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2008년부터 <씨네21> 기자로 일하고 있고, 공저로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인>을 썼어요. 스트리밍 플랫폼에 상주하는 미드·영드 덕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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