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배상 (1944)
나는 <이중 배상>을 스물여섯 살 때 처음 보았다. 그 때 나는 소설가가 아니었고, 소설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 있긴 한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는지 몰라서 약간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글은 하나도 안 쓰고 영화만 주구장창-이 표현이 틀렸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이 단어를 쓰는 걸 멈출 수가 없다!-봤다.
날씨가 좋은 밤이면 서울아트시네마가 있던 낙원 상가 근처의 노천 카페에 앉아서 친구들과 노닥거리곤 했다. 뭔가가 되고는 싶은데 방법을 몰라서 자포자기했거나, 혹은 뭐가 되고 싶은지조차 알지 못했던 우리들은 까페가 문을 닫기 바로 직전까지 거기에 앉아서 시시덕거렸다.
그 시절 나는 일부러 소설과는 멀어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레이먼드 챈들러와는 도저히 멀어질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챈들러는 내가 사랑하는 단 하나의 작가였다. 그러므로 그가 각본 작업에 참여한 <이중 배상>을 보는 건 정해진 수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카페에 앉아서 우리는 <이중 배상>에 대해서도 시시덕거렸는데, 대부분은 각본 작업을 함께 했다고 알려진 빌리 와일더와 레이먼드 챈들러가 어떤 대사를 썼는지 서로 우기는 식이었다. 우리는 각본 작업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도 모르면서(지금도 모른다), 영원히 답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챈들러를 사랑했으니까, 당연히 내가 좋다고 느꼈던 대사는 무조건 챈들러가 썼을 것이라고 우겼다. 그 중 하나는 이것이다. “뭔가 잘못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내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치 죽은 자의 발소리처럼.” 나는 이 대사에 챈들러의 정수가 들어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 대사가 <이중 배상>의 거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를 아주 오랫동안 빌리 와일더의 <이중 배상>이 아니라, 레이먼드 챈들러의 <이중 배상>이라고 멋대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최근에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때 나는 좀 다른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 영화의 주인공인 네프는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와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그는 냉소적이지도 않고, 이상한 농담을 툭툭 던지지도 않는다. 결정적으로 그는 필리스의 유혹에 너무 쉽게 굴복하고 만다. 심지어 먼저 추파를 던지는 쪽은 남자이지 여자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살인자를 추적하는 사람은 경찰이나 탐정이 아니라 네프의 상관인 보험사 직원 키즈이다. 살인자를 찾는 이유는 거기에 너무 많은 돈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네프와 필리스가 ‘이중배상’을 원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그런 식으로까지 파멸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네프가 지나치게 그 여자를 원하지 않았다면, 혹은 필리스가 지나치게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면…그랬다면…하지만 이런 가정은 무용하다. 인간은 언제나 무언가를 지나치게 욕망하고야 만다는 것, 그것을 멈추지 못한다는 것, 그게 바로 이 영화를 비롯한 다른 필름 느와르를 관통하는 주요한 테마이다.
이 영화는 빌리 와일더의 다른 훌륭한 영화인 <선셋대로>처럼 모든 일이 끝난 후, 주인공이 살인을 자백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결말을 아는 상태이지만 재미가 반감되는 일은 결코 없다. 그건 훌륭한 각본과 빌리 와일더의 연출 덕분이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이상한 슬픔을 느끼고 당황할지도 모른다. 대체 왜 살인자의 전모를 보면서 슬픔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누군가의 잘못된 선택과 예정된 파멸을 바라보면서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제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이 영화에서 누가 어떤 대사를 썼는지는 내게 더 이상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었다.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는 일도 좀처럼 없다. 인생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이 어떤 시절은 그런 식으로 불현듯 끝나버리고 만다. 그래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이런 식으로 우기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 이 대사는 챈들러의 것임이 틀림없다고 말이다.
뭔가 잘못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내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치 죽은 자의 발소리처럼.
이 영화, 지금 보러 갈까요?
손보미
소설가
2009년 <21세기 문학>,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단편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우아한 밤과 고양이>, 중편 <우연의 신>, 장편 <디어 랄프로렌>을 출간했죠. 망드를 즐겨보는 고독한 빵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