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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Jun 03. 2020

은행은 누구에게 대출을 해주나?

태양의 후예(2016)



“대체 왜요? 갑자기 왜요? 와서 사인만 하면 된다던 대출이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건데요?”
(송혜교, 강모연 역)
“죄송합니다만 고객님. 지난번에 대출 상담받으셨을 때에는 해성병원 VIP 병동 교수셨는데, 지금은 그냥 의사면허 있는 창업 꿈나무시잖아요. 그러니까 사실상 무직이신 거죠.”(유아인, 은행 창구 직원 역)
“그러니까, 제가 병원을 그만두면 대출이 안 된다는 말씀이세요?”(강모연)
“예, 그렇습니다. 고객님.”(직원)
“그럼 저 이제 어떻게 해요!” (강모연)
“그걸 저한테 그러시면 어떡해요. 네, 다음 고객님~!” (직원)


우르크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귀국한 강모연. 그는 저질 이사장 밑에서 더 일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굳히고 이사장 면전에 사표를 내던진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병원 개원을 서두른다. 


하지만 뜻밖의 암초를 만난다. 빌딩 계약까지 마쳤고 계약금까지 지불했는데, 은행에서 약속한 대출을 못 해주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다. 병원을 그만두는 순간 강모연은 대형병원 VIP 병동 교수가 아니라 무직자니까!


물론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다. 실제 대부분 시중은행들은 개원을 목표로 하는 의사들을 ‘고소득이 예상되는 전문직’으로 보고 꽤 넉넉한 대출을 제공한다. 그렇다고 “태양의 후예가 현실을 왜곡했다!”며 열 올릴 이유는 없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드라마 속 이야기가 사실임을 전제로 한 가지 살펴볼 대목이 있다. 진화심리학자 레다 코스미데스(Leda Cosmides)와 존 투비(John Tooby)가 제시한 은행가의 역설(banker’s paradox)이라는 정치경제학 이론이 그것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우정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 우정의 네트워크는 공교롭게도 힘이 센 자들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강했다.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부족에서 누구와 더 친해야 사는 게 편해질까? 당연히 힘이 세고 사냥을 잘하는 사람과 친해야 이익이다. 


그렇다면 사냥을 잘하는 용자(勇者)는 누구와 친해야 사는 게 더 편해질까? 당연히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추장 같은 권력자와 친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우정의 네트워크는 사회적 강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정작 그들의 도움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코스미데스와 투비는 이를 ‘은행가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영장류 조상 중 수렵을 잘 못 하는 사람일수록 간절한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다”라는 게 두 사람의 설명이다


은행도 마찬가지다. 은행이란 돈을 빌려줘야 이익을 남기는 곳이다. 그렇다면 은행은 누구에게 돈을 빌려주려고 할까? 당연히 돈을 제때 갚을 수 있는 사람을 먼저 고른다. 신용도 좋고 자산도 많은 부유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예를 들면 해성병원 VIP 병동 강모연 교수님 같은 사람 말이다. 


반면 빈곤한 데다 신용도 안 좋은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돈을 떼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냥 의사면허 있는 창업 꿈나무 강모연 씨(라고 쓰고 무직자라고 읽는)’ 같은 사람 말이다. 


이는 매우 슬픈 이야기다. 사실 은행의 도움이 절실한 쪽은 당연히 사회적 약자들이다. 하지만 은행은 더 절실한 사람을 더 빨리 외면하고, 덜 절실한 사람에게 더 좋은 금리로 돈을 빌려준다. 이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은행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제2금융권을 거쳐 결국 사채에 손을 댄다. 


인류는 늘 이렇게 살아왔다. 강자는 강하다는 이유로 더 많은 도움을 받았고, 약자는 약하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소외를 당했다. 


결국 강모연은 자존심 다 굽히고 다시 해성병원으로 돌아간다. 이것도 참 슬픈 이야기다.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소신을 굽히고 강자에 빌붙어야 살아남는 현실 말이다. 이런 현실을 좀 바꿀 수는 없을까?



태양의 후예, 지금 보러 갈까요?


이완배 / 민중의소리 기자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네이버 금융서비스 팀장을 거쳐 2014년부터 《민중의소리》 경제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두 자녀를 사랑하는 평범한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가치 있는 행복을 물려주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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