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2019)
아주 오래전에 후배가 취미로 단편을 써보고 있다면서 주인이 어떻게 신체적인 어려움을 겪다가 죽는데 그런 병이 있냐고 물었다. 난 그냥 없다고 했다. 애절한 죽음 병 이런 병명이라도 만들어야 할까. 영화나 책에서 일반 질환이나 정신질환에 대한 묘사는 사실보다는 허구에 가까울 때가 많다. 어떤 캐릭터를 만들어놓고 그것에다가 병을 끼워 맞추는 형국인데 영 잘 맞지 않는다.
뭐 작품에 사실이 어디 있냐. 한 번도 제대로 총 쏘는 모습을 못 보는데 한국 영화에서도 총 쏘는 게 마구 나오고 그러니 말이야. 그래도 뭐 좀 그럴싸하게 묘사하는 노력이 있으면 “애썼구나” 칭찬하고 싶고 병이 생긴 과정을 설명함에도 영화적으로 아주 간결하게 잘 표현된 경우 감탄이 나오는데 아쉽게도 우리 영화에서 그런 감동을 경험한 적은 별로 없다.
그러다가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소설을 읽었으면 좀 더 비교가 될 텐데 암튼 나는 영화로만 작품을 접했다. 뭐랄까 이 기분은. 사실과 허구에 있어서 이 영화는 나에게 만족과 아쉬움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엔딩 그래딧에 세브란스병원 김경란 전문의 이름이 뜨길래 만족을 준 부분에 그의 공이 있으리라 생각해서 기분이 좋았다. 후배 만세~!
우선, 영화의 포인트라 할 수 있는 빙의 장면. 주인공은 시댁 식구들 앞에서 친정어머니로 빙의하고, 친정어머니 앞에서는 외할머니로 빙의한다. 그런 병이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없다고 해야겠다. 물론 정체성 변형의 해리 현상이 교과서에 언급되어 있긴 하다. 그러한 현상은 다중인격에서 혹은 무당이 굿을 하면서 보이는 신내림 현상 등에서 예를 찾을 수 있긴 하지만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며, 우울증 환자에게서는 그렇게까지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작품의 전개를 위해 우울증에는 나타나지 않는 해리 현상을 쑤셔 넣은 그런 꼴이라는 말씀.
우울증이 심한 경우에는 비현실적인 정신증 증상이 동반될 수 있긴 하지만 허무망상이나 피해망상 혹은 일시적인 환각 경험 등이며 빙의와 엇비슷한 증상은 없다. 정신질환의 다양한 증상에서 가장 극적인 증상이 해리 증상이기 때문에 작품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현실은 그와 반대로 해리 증상을 보기 힘들다.
해리 증상을 일차적으로 드러내는 질환을 가리켜 해리 장애라고 하는데 해리 장애 자체가 정신 질환 중에 매우 드문 병이다. 해리 증상을 상대적으로 더 잘 나타내는 질환은 급성 스트레스장애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같은 트라우마 반응이다. 트라우마와 해리 모두 신비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데, 과거의 고통을 현재에 적나라하게 다시 재현시킨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경험과 반응은 과거형이 될 수 없고 언제나 현재형이 되는 것이다.
어쨌든, 극적인 묘사를 위해 되지도 않는 해리 현상을 우울증에 욱여넣은 용기에 관하여는 아쉬움이 있으나 영화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가려운 등 긁듯 만족스럽게 보았던 두 장면이 있었다.
첫째는 어머니의 반응이고, 둘째는 정신과 의사의 조언이다. 영화에서 어머니는 주인공인 딸과 이야기를 하다가 돌연 자기 어머니로 빙의하는 딸을 마주하게 된다. 빙의한 딸이 하는 말들은 어머니가 정말로 자기 어머니에게 직접 들으면 좋았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마치 심리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으며, 나를 포함해 상당수의 관객이 그 순간에는 어머니의 희생적인 삶에 잠시 집중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후로 어머니의 태도는 내가 생각한 그런 ‘허구적인’ 맥락에 치우치지 않고 냉정한 현실에만 발을 디디고 있다. 오로지 하나, 자기 딸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빙의한 상태에서 한 말의 내용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 부분이 현실적이어서 나로선 좋았다.
둘째로, 정신과 의사는 주인공에게 감정을 표출해보라고 조언한다. 주인공이 다른 존재를 빌어서 표현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표현할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심리적인 해석에 따른 것이다. 빙의로까지는 아니지만 이러한 식의 기전은 아주 흔히 보는 마음의 현상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하며 그러지 않고 쌓이면 마음의 병이 된다. 목소리는 기꺼이 들으려는 한두 사람 앞에서 먼저 내는 것이 좋고, 거기에서 용기도 얻고 말하는 요령도 훈련되어야 한다. 그다음엔 생소한 사람과 여러 명 앞에서도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때로는 앞으로 더 말할 기회가 없을 것처럼 비장하게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 만남도 그러하고 헤어짐 또한 꼭 기약대로 흘러가지 않으니 말이다.
“내 말이 당신에게 도달된다는 것, 그것은 작은 기적입니다.” 오늘도 기적을 일으키자.
82년생 김지영, 지금 더 알아 볼까요?
최의헌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에서 개인의원과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강의나 글은 다소 유쾌할 수 있으나 진료실에서는 겁나 딱딱하다고 하니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