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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Aug 03. 2020

잘, 죽을 수 있을까요?

엔딩 노트(2011)



두 달 전, 근 4년간 운영하던 서점의 영업을 끝냈다. 영업 종료 공지를 알리는 사진에 <음악으로 책장을 열던 곳>이라고 적고 첫 영업일~마지막 영업일 날짜를 덧붙여 적었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기억되면 좋겠다’ 생각해서 적은 것이었는데 그를 보고 어떤 이들은 꼭 묘비명 같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묘비명 같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쩌면 내 무의식의 발로였는지도 모르겠다. 담담하게 영업 종료를 공지하긴 했지만 열과 성을 다해 가꿨던 공간을 폐업한다는 것이 일종의 사망 선고처럼 느껴졌으니까. 영업을 종료한 뒤, 나는 밀려오는 여러 감정을 뒤로하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처리했다. 집주인과의 잔금 문제, 가구와 집기 처리, 판매금 정산 등 사소하지만 중대했던 여러 문제를 처리하다 보니 문득 이것이 일종의  장례구나 싶었다. 


치러본 사람은 알겠지만, 장례는 생각보다 지독한 현실이다. 소중한 사람이 떠난 슬픔과는 별개로 장례식장과 장지 선정, 부고 알림, 조문객 맞이, 유품 정리, 사망신고 등등 산 사람들에게 그 즉시 임무가 주어진다. 이 모든 현실적인 절차를 치르고 나서야 상실의 아픔은 순간순간 칼로 찌르듯이 불쑥 찾아와 가슴을 후벼판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감정일 뿐이다. 타인들은 각자의 삶으로 무심히 돌아간다. 결국 내가 겪지 않는 한, 폐업도 죽음도 삶도 결국은 흔한 이야기일 뿐이다. 서운할 것도 외로울 것도 없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서점을 닫고 얼마 후, 우연히 남의 죽음을 엿보았다. 다큐멘터리 <엔딩 노트>를 통해서. <엔딩 노트>는 한 사람의 죽음을 준비하는 당사자와 주변인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평생을 일만 하며 살아온 아버지가 퇴임한 지 2년 만에 암 선고를 받고 사망하기까지의 기록.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며 죽기 전 해야 할 일들을 적은 엔딩 노트를 하나하나 실행하는 이야기.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엔딩 노트마저 소소하다.‘한 번도 찍지 않았던 야당에 투표하기’, ‘손녀들과 힘껏 놀아주기’, ‘아내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 해보기’ 등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소중한 것을 깨닫는 과정마저도 너무 많이 봐 온 이야기인 덕분에 누군가는 무척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우리의 죽음’일지도 모른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삶과 죽음. 타인에게는 그저 흔한 이야기지만 자신에게는 거대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노모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 그는 “어머니와 같이 가는 게 가장 좋은데”라고 말하고 어머니는 “그럼 좋지”라고 답하며 다 같이 웃는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와 가족들은 그렇게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극 중반 내레이션으로 깔리는“전 죽을 수 있을까요? 잘 죽을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싶은 한 남자의 질문 아닌 다짐일지도 모른다.


사는 것도 팍팍한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죽는 이야기까지 봐야 하냐고 누군가는 물을 수 있다. 글쎄 꼭 봐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남의 죽음을 본다는 것은 결국 나의 죽음과 삶을 고민해보게 된다고 말하고 싶다. 나 역시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죽음을 앞둔 노인, 그를 보내야 하는 가족들의 감정을 헤아리면서도 한 편으로 나의 죽음을 생각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것을 미리 알게 된다면 나는 엔딩 노트에 어떤 항목들을 넣을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다 한 가지가 떠올랐다. 친구들에게 내 장례식에서 불러줄 노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것.


음악이 가진 가장 큰 힘 중 하나가 누군가를 혹은 어떤 시간을, 장소를 추억하게 하는 것이니까. 내가 없는 곳에서 불릴 나를 위한 노래라니! 기가 막힌 계획이라고 생각하며 설레기까지(?!) 했다. 내내 담담한 정서를 유지하던 <엔딩 노트>에서도 역시나 가장 직접적으로 마음을 건드리는 도구는 음악이다. 일본 뮤지션의 하나레구미ハナレグミ의 음성으로 전해오는 [천국님天国さん]이라는 곡은 영화에 삽입할 목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를 떠나보낸 자식의 마음이 전해진다. 


하나레구미(ハナレグミ)의 [천국님 天国さん]이 깔린 예고편

엔딩 크레딧을 멍하니 바라보며 노래를 끝까지 듣다 보니 눈물샘을 자극하는 또 하나의 사부곡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R&B 거장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의 [Dance With My Father]는 아버지와의 추억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노래다. 당뇨로 고생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건 그의 나이 고작 일곱 살 때. 함께한 시간은 너무 짧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아빠에게 받은 사랑의 순간들, 함께 춤을 추었던 시간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한 번만 더 아빠와 춤을 출 수 있다면 끝나지 않은 노래를 부를 거라는 노랫말은 아름다운 그의 음성을 타고 더 가슴 아프게 전해진다. 안타깝게도 이 노래를 발표한 2003년, 그는 뇌졸중을 앓고 있었고 2년간의 투병 끝에 사망한다.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죽어가는 아들이 부르는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투병 생활로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2004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노래와 최우수 남성 R & B 보컬을 수상했으며 현재까지도 추모 공연이나 장례식장에서 사랑과 그리움을 상징하는 노래로 많이 불리고 있다.


R&B 거장 루더 밴드로스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 곡을 만들었으며 [Now And Forever]로 잘 알려진 리차드 막스와 함께 작업했다. 아름다움으로 덧대어진 슬픔을 경험을 하고 싶다면 이 곡을 꼭 들어보길 바란다.


오늘도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고 누군가는 남겨진다. 어떤 삶은 말 없이 떠나고 어떤 삶은 노래나 영화 속에 자신의 삶을 남기기도 하고 또 어떤 삶은 엔딩 노트를 만들어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엔딩 노트는 결국 유서나 마찬가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죽기 전 하고 싶은 일의 나열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으니까. 한 인간으로서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었는지, 무엇이 풍성했고 무엇이 부족했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좌표가 될 노트니까. 그것은 홀로 떠나는 생의 마지막 길의 유일한 동반자,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또 생각한다. 죽기 직전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 미리미리 써두는 게 좋겠다고.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살아갈 이유가 가득한 유서가 될 테고, 잘 죽기 위해 조금은 잘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장혜진 / 초원서점 전 주인장


한때 음악 서점을 운영했던 사람입니다. 음악과 영화 이야기를 이리저리 섞어서 해보려고 합니다. 둘 중 뭐라도 당신에게 재미가 있다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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