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왓챠 WATCHA Sep 26. 2019

전쟁 때도 덜 죽이는 방법이 있다, <고지전>

고지전 (2011)



1990년대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을 때 “토요일 두 시에 강남역에서 봐” 식으로 어설프게 약속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이따위로 약속을 하면 강남역 어디에서 보자는 건가? 강남역이 얼마나 넓은데!


참 난감한 약속인데 신기하게도 약속이 파토가 나는 법은 없었다. 사람들은 별 고민 없이 강남역 뉴욕제과 앞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강남역에서 만나자”고 하면 이상하게도 이심전심으로 뉴욕제과 앞에 모였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이심전심의 지점을 포컬 포인트(focal point)라고 부른다. 2005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게임이론의 대가 토머스 셸링(Thomas Schelling)의 아이디어다.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는 중이라고 하자. 현장 사령관들은 전면적인 충돌을 원하지 않는다. 충돌해봐야 병사들의 목숨만 잃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받은 명령은 “진군하라”였다. 전면전을 벌이자니 병사들만 죽을 것 같고, 진군을 안 하자니 명령 불복종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진군을 해야 할까?


이 상황에서 대부분의 군대는 강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강을 기준으로 두 나라가 대치해 있다면, 강 북쪽 군대는 북쪽에서만 움직이고 남쪽 군대도 강의 남쪽에서만 군대를 이동시킨다. 양 진영 사이에 흐르는 강이 이심전심으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된 것이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아는 그곳, 그 지점이 바로 포컬 포인트다.



영화 『고지전』은 한국전쟁 당시 백마고지 전투를 모티브로 삼은 영화다. 백마고지에서는 1953년 남북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하루에도 몇 차례씩이나 고지의 주인이 바뀔 만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영화에서 김수혁(고수 역)은 북한군과 내통했다는 혐의(편지를 주고받았음)를 해명하기 위해 친구 강은표(신하균 역)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이 고지의 주인이 몇 번이나 바뀌었을 것 같냐? 아무도 모를 거야. 나도 한 30번까지는 셌는데…. 그러다보면 누구라도 똑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후퇴할 때, 이 많은 짐들을 꼭 가지고 내려가야 하나? 그래서 여기 벙커에 싹 다 묻었어.”


북한군이 그 짐을 발견했고 이때부터 두 진영 병사들의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들은 명령에 따라 하루에도 몇 차례씩 총질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 전투에서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휴전협정 당시 남북 양측 현장 지휘관들이 포컬 포인트 개념만 알았다면 어땠을까? 장담하는데 수많은 무고한 생명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전쟁 이전 분단선이었던 38선(북위 38도)이라는 분명한 포컬 포인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위에서 “적을 섬멸하라”고 지시를 해도 어차피 전쟁은 곧 끝난다. 그렇다면 38선을 포컬 포인트로 삼고 피차 그 지점을 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수 십 만 명의 목숨을 잃었다.


“희생이 있었지만 백마고지를 우리가 차지했으니 승리 아니냐?”라고 쉽게 말하지 말자. 그 고지를 얻기 위해 죽은 국군 숫자가 무려 3500명이었다.



게다가 그게 진짜로 승리이긴 한가? 치열한 전투 결과 동쪽으로는 지금의 휴전선이 38선을 넘어 꽤 북진했지만, 서쪽으로는 되레 38선 이남까지 훨씬 밀렸다. 영토를 조금이라도 넓히겠다며 수십 만 명이 목숨을 버린 전투의 결과는 38선 때나 휴전선 때나 그게 그거였다.


“너, 이 고지의 주인이 몇 번이나 바뀌었을 것 같냐?”


그렇게 자주 뒤바뀔 고지의 주인 자리를 위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단 말인가? ‘포컬 포인트만 알았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 텐데’라는 안타까움이 영화 내내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고지전, 지금 보러 갈까요?


이완배 / 민중의소리 기자


서울대학교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사회부, 경제부 기자와 네이버 금융서비스 팀장을 거쳐 2014년부터 《민중의소리》 경제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두 자녀를 사랑하는 평범한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가치 있는 행복을 물려주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조커>를 기다리며, <택시 드라이버>를 생각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