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1967)
1968년 작 영화 <졸업>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파티의 주인공 벤저민에게 아버지 친구인 사업가 맥과이어가 다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며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한마디만 하고 싶구나. 딱 한마디. 듣고 있니?”
“네.”
“플라스틱.”
“무슨 말씀인지?”
“플라스틱 업계가 엄청난 장래성이 있어. 알아들었니?”
“네.”
“그거면 됐어. 좋아.”
대화가 끝나자마자 벤저민은 질식할 것 같은 표정으로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문을 닫는다. 대체 무슨 이유일까?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벤저민은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다. 학내 신문사 편집장도 했고 영예로운 상을 받은 채 집으로 돌아와 부모와 지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정작 미래가 두렵다. 그동안 제도권 교육 체제에서 모범생으로 살아왔지만, 이제 본인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 꾸려나가야 한다.
긍정적인 성격이라면 장밋빛 인생을 꿈꾸며 기대감이 부풀고 가슴이 벅찰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벤저민은 그렇지 않다.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그런 심리는 비단 벤저민에 국한되지 않는다.
<졸업>은 시대상을 잘 반영한 영화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은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사회다. 세상은 돈 잘 버는 것을 최고로 여기고, 지구 반대편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벌여져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동부 명문대를 졸업한 벤저민에게 기성세대는 자신들처럼 살아갈 것을 강요한다. 벤저민은 그들의 가치관에 거부감이 들고, 괴롭다. 싫은 건 분명한데, 문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일탈이 시작된다. 부모님 친구 로빈슨 부인과 불륜 관계를 맺는다. 계획대로 살아오던 벤저민은 이제 충동을 따른다. 그러다 로빈슨 부인의 딸 일레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로빈슨 부부는 둘을 갈라놓고, 일레인은 다른 남자와 결혼식을 치른다.
그 순간 벤저민이 식장에 난입해 일레인의 이름을 목놓아 외친다. 그러자 일레인도 주변 인물들을 살피더니 갑자기 결혼식장 밖으로 뛰쳐나간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질주라고 해야 할까? 손을 꼭 붙잡은 채 환하게 웃으며 달리던 두 사람은 지나가던 버스에 올라탄다.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정도로 많이 회자하는 이 결말을 안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면 영화 도입부에 나온 (이 글 처음에 언급한) 파티 대화 장면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영화에서 초반 10분은 굉장히 중요하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 대화는 감독의 의중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시스템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영화는 그것을 ‘플라스틱’으로 함축했다. 인류가 개발한 최고의 소재. 모든 것으로 변신이 가능하며 싼값에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상징! 인간의 편의에 맞게 한번만 쓰고도 버리기 좋은 이 플라스틱이 감독 입장에선 당시 사회를 은유하기 좋은 묘안이다.
이 씬에서 주인공을 굳이 파티장 밖으로 데리고 나가 진지하게 조언해준 맥과이어 아저씨는 단순한 꼰대가 아니다. 미래를 예견한 진짜 사업가다. 그는 비즈니스맨답게 심플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딱 한마디. 플라스틱.”
(Just one word. Plastics.)
1968년 스크린에서 튀어나온 이 단어가 작년부터 올해까지 현실 속 지구촌을 뜨겁게 달궜다. 중국이 각국에서 보내 온 플라스틱 쓰레기를 안 받기 시작하자 플라스틱은 갈 곳을 잃었다. 우리나라에서 ‘비닐 대란’이라는 사상 초유의 쓰레기 수거 거부 사태를 낳았고, 필리핀으로 불법 수출된 플라스틱 쓰레기가 컨테이너에 실려 국내로 반송돼 국제적 망신을 사기도 했다.
나 또한 방송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며 서해에서 발견된 바다거북의 위장에서 어느 비피두스 유산균 브랜드의 플라스틱 라벨이 나오는 것을 봤고, 울산에서 야생 떼까마귀가 뱉은 토사물에서 고무줄을 목격한 바 있다. 사실 바다든 땅이든 플라스틱이 넘쳐나니 동물들의 몸속에서 플라스틱이 발견되는 건 당연지사다.
이제 미세플라스틱으로 쪼개진 플라스틱은 먹이 사슬을 통해, 또 음식 외 다른 경로로도 우리 몸 속으로 들어온다. 성인 한 사람이 일주일 동안 신용카드 한 장 정도의 미세플라스틱을 누적 섭취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1968년 영화 속 단역 캐릭터는 이 정도로 플라스틱이 세상을 점령할지 알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플라스틱의 잠재성이 폭발해 이제 인류가 청동기, 철기에 이어 플라스틱기를 살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다. 만약 눈치 빠른 관객이 그때 석유화학 관련 주식을 사 놓았으면 지금쯤 큰 부자가 되지 않았을까.
<졸업>의 맨 마지막 장면은 버스에 올라타고 나서 두 사람의 표정을 비춘다. 결혼식장 대탈주에 성공한 뒤 환하게 미소 짓던 벤저민과 일레인의 얼굴에서 조금씩 웃음기가 사라진다. 벤저민은 억지로라도 계속 웃어보려 하지만, 50초 가까운 이 롱테이크 씬에서 뒤로 갈수록 두 사람의 표정은 건조해진다.
이때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명곡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가 배경으로 깔린다. 침묵의 소리. 기성의 질서를 벗어난 이들의 앞날을 어떻게 될까? 막상 일은 저질렀지만, 미래는 여전히 두렵다. 공허하기까지 한 두 주인공의 눈빛은 불안한 미래를 암시한다.
바다거북의 코에서 빨대를 빼는 8분짜리 유튜브 영상이 있다. 폰카로 찍은 건지 화질도 좋지 않은 이 클립은 앵글 변화도 거의 없이 8분 넘게 바다거북의 코에 박힌 플라스틱 빨대를 빼는 과정을 원테이크로 편집 없이 길게 보여준다. 그만큼 빨대는 잘 안 빠지고 그럴수록 피가 철철 나는 거북은 안쓰럽다. 덕분에 3,800만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고 플라스틱이 유발하는 환경 문제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제 우리는 플라스틱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스타벅스에서 종이 빨대로 커피를 마시고, 이마트에서 당연히 제공되던 비닐봉지 대신 장바구니를 챙기거나 사야 한다. 변화의 움직임은 시작됐는데 궁극적으로 어떻게 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 답은 우리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큼 불편해질 수 있을까? 별다른 편의가 없음에도 싼 것 대신 비싼 것에 기꺼이 비용을 지불 할 수 있을까? 그래, 문제는 알겠고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침묵에 잠긴다. 마치 벤저민과 일레인처럼.
졸업, 지금 보러 갈까요?
최평순 / EBS PD
환경·생태 전문 PD입니다. KAIST 인류세 연구센터 연구원이고, EBS 다큐프라임 <인류세> 등 연출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