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소리(2016)
영화 속에서 버럭 화부터 내는 아저씨들을 안 좋아한다. 잘못도 지가 하고 화도 지가 내는 아저씨들이, 그 와중에 자기연민까지 하는 광경은 더더욱 안 좋아한다. 어떻게 저런 장면을 보면서 즐길 수 있지?
한국 사람들은 아저씨들의 무례와 책임회피에는 놀랄 만큼 너그럽다. 살아온 세상이 거칠어서 그렇다, 무뚝뚝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서 그렇다, 겉으로만 저렇지 사실 속정이 깊은 사람이다, 기계처럼 쉬지 않고 일하다가 끝내 고장나서 그렇다…
사람들이 운전에 서툰 중년 여성이나 한국에 돈 벌러 온 이주노동자,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살겠다는 성소수자들도 그렇게 열심히 이해하려 노력했다면 한국사회의 다양한 문제는 진작 해결됐을 텐데. 유독 아저씨만 극진한 이해를 받는 광경을, 굳이 내 돈 내고 들어간 극장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로봇, 소리> 속 해관(이성민)도 얼핏 보면, 그렇게 정붙이기 어려운 아저씨다. 그는 딸 유주(채수빈)가 뭘 하고 싶어하는지도 관심이 없을 만큼 무심하고, 딸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기가 옳고 안전하다 믿는 경로를 강요하며 윽박지르던 극히 보수적인 아저씨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고 이성적인 대답을 하는 빈도보다, 자신의 판단을 앞세워 먼저 언성부터 높이고 보는 전형적인 아저씨. 심지어 또 사는 곳은 대구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경남이지만 정서로 보나 지리로 보나 여러모로 TK 권역인 동네에 본관을 두고 있는 사람 입장에선, 이 정도면 삼진아웃 감이다.
상대 말 안 듣지, 언성 먼저 높이지, 게다가 징글징글한 우리 동네잖아? 해관을 쉽게 미워할 수 없는 건, 오로지 그가 실종된 딸을 찾아 10년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해소되지 못한 채 10년을 묵은 해관의 절박함은 지구 상의 모든 전화통화를 도감청하는 미국 국가안보국의 인공지능 정보위성 ‘1989-037B-S19’을 만나며 실마리를 찾는다.
자신이 감청한 정보가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구역 폭격의 빌미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S19는, 그것이 자신의 책임이라 판단하고는 지상과의 통신을 두절한 채 궤도를 이탈해 지구로 추락한다.
대한민국 서해 굴업도 해변에 떨어진 S19를 발견하고, 1989년부터 지금까지 인류의 모든 전화통화를 모니터링하고 기록해 둔 S19의 능력을 목격한 해관은, 어쩌면 S19가 딸 유주를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한다.
해관은 아프간에 가야 한다는 S19에게 ‘소리’라는 이름을 붙여주고는 소리를 살살 꼬드긴다. 딸을 찾게 도와준다면 관세청에서 일하는 동기들 빽으로 널 아프간으로 보내 주겠다고.
“인간은 자신의 약속 73.4%를 지키지 못한다.” 소리의 말 앞에서 해관은 화를 내며 “골 때리네, 이게.”라고 말한다. 보통 아저씨들이 화부터 낼 때는 정곡을 찔렸다는 뜻이다.
소리가 맞다. 국민이 위험에 처하지 않게 최선을 다 하겠다는 국가의 약속, 불법 도감청을 하지 않겠다는 정보기관의 약속, 전쟁 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는 걸 우선으로 삼겠다는 군부의 약속 같은 건 좀처럼 잘 지켜지지 않는다.
인류가 끝까지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책임감을, 인공위성 소리는 한사코 아프간에 가서 민간인의 생사를 확인하겠다는 고집으로 지켜낸다. 책임 있는 사람들이 약속을 제대로 지켰다면, 어쩌면 유주는 지금 여기에 있었을지 모른다
결국 해관은 소리를 꼬드기려고 뱉었던 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소리의 윤리적 결단을 돕는다.
유주가 있을 땐 유주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했던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 하지 못했고, 유주가 사라진 뒤엔 자기 슬픔에 사로잡혀 아내 현숙(전혜진) 옆에 있어줘야 했던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다 하지 못했던 해관은, 소리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 비로소 윤리적 주체로 거듭난다. 책임을 지는 사람만이 ‘어른’이 된다.
위성을 빼앗아 고급 정보를 캐내려는 국정원 요원 진호(이희준)는, 그런 해관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언성부터 높인다. “야, 이 또라이 새끼야! 너 그 위성 가지고 왜 그래, 씨발 도대체!”
우리는 안다. 해관이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살아나 내일을 향해 걷는 동안, 진호 같은 이들은 시시하고 무책임한 아저씨로 늙으며 자기 연민이나 일삼을 것이다.
이제 한달 보름 뒤면 명실공히 30대 후반이 되는 나는 <로봇, 소리>를 보며 중얼거리는 것이다. 늙을 때 늙더라도, 책임을 다 하는 어른이 되자고. 얼 빠진 채로 시시하게 늙지는 말자고.
'로봇, 소리', 지금 보러 갈까요?
이승한 / 칼럼니스트
열 두살부터 스물 세살까지 영화감독이 되길 희망했던 실패한 감독지망생입니다. 스물 넷부터 서른 여섯까지는 TV와 영화를 빌미로 하고 싶은 말을 떠들고 있죠. 자기 영화를 왓챠에 걸었으면 좋았으련만, 남의 영화를 본 소감을 왓챠 브런치에 걸게 된 뒤틀린 인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