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2013)
자정 라디오 생방송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 새벽 2시 반의 서강대교엔 적막과 어둠, 쌩쌩 지나는 차들만 있을 것 같지만, 아주 가끔 사람이 있다.
대교의 한 가운데 혼자 멍하니 서서 한강을 바라보는 사람을 발견할 때 마다 덜컥 겁이 난다. 저 사람은 왜 지금 저기에 서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저러다 뛰어 내리면 어쩌지.
차로 지나가는 그 몇 초의 순간에 온갖 상상을 해보지만 난 그 옆을 그냥 지나쳐 갈 뿐이다. 누군가 새벽의 한강에 흘려 보내고 싶은 게 있을 때, 보면 좋을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비슷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나 어떤 때는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마르셸 프루스트
영화는 마르셸 프루스트의 이 문구로 시작된다.
폴은 어린시절 부모님을 잃고 두 명의 이모와 살고 있다. 폴은 촉망받는 피아니스트로 어린시절 사고로 죽은 부모를 목격한 후 말을 잃었지만 부모의 죽음장면에 대한 기억도 같이 잃었다.
폴의 꿈속에서 엄마는 천사 같은 사람이지만 아빠는 항상 고함을 치는 사람이다. 폴은 몇 장 남지 않은 부모의 사진에서 아빠만 오려내고 엄마만 간직할 정도로 아빠에 대한 미움이 크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건물 위층에 사는 프루스트 부인의 집에서 폴은 어린시절로 기억여행을 하게 된다. 프루스트 부인이 주는 마들렌과 차를 마시고 어릴적 갖고 놀던 모빌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을 듣던 그 시간으로 최면에 빠지듯 들어가게 되는 것.
다시 돌아간 과거에서 폴의 부모는 폴이 기억하던 그 모습과 다르다. 부부의 사이는 좋았고 둘은 프로레슬링 선수였는데 레슬링 연습을 하느라 어린 폴의 눈에 사이가 안 좋아 보였던 것일 뿐.
이모들이 블루칼라였던 아빠를 싫어했기 때문에 폴에게 아빠에 대한 나쁜 인상을 심어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폴은 점차 밝은 표정을 찾게 된다. 하지만 뭔가 달라진 폴의 모습에 이모들은 불안에 빠지고 프루스트 부인을 괴롭히기 시작하는데...
프루스트 부인은 폴에게 마지막으로 기억여행을 떠날 수 있는 마들렌과 차를 선물하고,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떠난다. 부모님의 죽음을 목격했던 그 시점으로 마지막 기억여행을 떠나는 폴.
끔찍해서 기억에서 지우고 말까지 잃게 됐던 폴이 그 순간을 다시 보면서 또 충격에 빠지지만 폴은 점차 스스로를 치유해간다. 만약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 잠시 돌아가 그 순간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대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갈 것이다.
괴로웠던 순간들은 실제로 잊거나 잊으려 노력하기 마련이다. 영화 속 폴처럼, 나쁜 일을 겪으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기억을 잃는 해리성 기억상실을 겪기도 한다. 이 영화는 그런 아픈 기억을 피하지 말자고 한다.
프루스트 부인이 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
“나쁜 추억은 행복의 홍수 아래 가라앉게 해. 그 수도꼭지를 트는 건 네 몫이란다"
나쁜 추억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 속에서 스스로 지워버릴 순 있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내게 영향을 준다. 가장 건강하게 나쁜 추억을 없애는 방법은 더 좋은 추억들을 많이 만들어서 덮어 버리는 것이라고 이 영화는 말한다.
사실 행복한 일들을 많이 만들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그나마 행복했던 기억들도 이상하게 밤만 되면 잘 떠오르지 않고 안 좋았던 기억들만 계속 곱씹게 되는 게 사람인데...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나면, 어딘가에 분명 프루스트 부인같이 다정한 누군가가, 그가 건네주는 향긋한 차와 마들렌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 차를 마시고 마들렌을 먹고 나쁜 기억을 정면으로 마주하면 폴처럼 치유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
영화가 줄 수 있는 많은 것들 중에 하나가 달콤한 꿈이라면, 비록 헛된 희망이라 할지라도 가끔은 그런 달달한 게 필요하니까.
마포대교에 붙어있던 자살예방 문구들이 올해 7년 만에 다 지워졌다고 한다.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문구들이 오히려 사람들을 자극하거나 기만한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었고, 오히려 마포대교가 ‘자살 명소’처럼 돼버리는 역효과가 나기도 했다고 한다. 어쭙잖은 위로의 문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자살 방지 난간과 장치를 더 강화하기로 했다고 한다.
퇴근길에 지나가는 서강대교엔 애초에 자살방지 문구들이 없다. 그 새벽에 거기 홀로 서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시커먼 한강물에 나쁜 기억만 다 흘려 보내기를...
나쁜 기억을 행복한 기억으로 덮을 수 없다면 차라리 그냥 그 기억을 잊어버리는 게 나은 걸지도.
이 영화, 지금 보러 갈까요?
최유빈 / KBS 라디오 PD
매일 음악을 듣는게 일 입니다. 0시부터 2시까지 심야 라디오 '설레는 밤 이혜성입니다'를 연출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