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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왓챠 WATCHA Nov 21. 2019

우울증 환자의 연인이 된다는 것

마릴린 먼로와 함께 한 일주일 (2011)



<마릴린 먼로와 함께 한 일주일> 을 처음 본 것은, 영국의 어느 시골 마을의 작은 극장에서였다. 그날은 입김이 나올 만큼 추웠고, 영국이 늘 그렇듯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날과 꼭 비슷했던 어느 겨울 날, 나는 한국에서 남자친구와 이별을 맞이했다. 그 날 역시 몹시도 추웠다. 


그를 만나기 위해 카페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오늘 나에게 헤어지자고 하겠구나. 너무 많이 인용되어 고루할 지경인 문장이다만,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자리에 앉자, 남자친구는 무거운 입술을 떼며 역시나 내게 이별을 고했다. 그는 눈물 짓고 있었다. 나는 왜 우리가 헤어져야만 하는지 그에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충분히 예상이 갔기 때문이다. 



그와 이별하기 며칠 전, 나는 집 근처 카페에 그와 마주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다. 그때 이미 그와의 이별을 예상한 것이냐고? 아니 전혀! 애초에, 그날의 나는 스스로가 왜 우는지 그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게 가능하다는 걸 나도 그때 처음 알았다. 정말 그냥, 눈에서 굵은 눈물이 펑펑 솟아 올랐다. 


무슨 슬픈 영화나 누군가의 죽음, 하다못해 울만큼 귀여운 강아지 영상이라도 보다가 운 것이라면 이해라도 갈 텐데 그런 전조 증상 하나 없이 갑자기 눈물이 투두둑 터져 나왔다. 남자친구는 그런 나를 보고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자친구는 허둥지둥 티슈를 가져다 주며 왜 우는지 그 이유라도 말해달라며 그는 나를 달랬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나조차도 그 이유를 모르겠는데 도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공공장소인지라 엉엉 악을 쓰며 울지는 않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당시의 남자친구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상상도 안 된다. 자기 앞에서 갑자기 아무 말 없이 울기 시작하는 여자친구라니.)


당시만 해도, 나는 그 눈물의 의미를 몰랐다. 정확히는, 스스로가 뭔가에 매몰 되어 있어 있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좀체 알 수 없었다. 그와 헤어진 후에도 이런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의 폭포는 계속 되었고, 나는 그 이유를 월경 주기로 인한 호르몬분비와 우울증에서 찾았지만 이내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뿌리 깊은
외로움이었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썩 안정적인 연애상대는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굉장히 발랄하고, 유쾌하고, 에너제틱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늘 감정이 오락가락 널을 뛰었고, 기분이 좋을 때는 한없이 좋았지만 고양된 감정은 높이 오른 만큼 추락하는 속도도 빨랐다.


하지만 또 실컷 울고, 화내고 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깔깔거리며 웃곤 했다. 재미있게도, 그런 나의 예측할 수 없는 성향을 많은 남자들은 매우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연인들의 말을 토대로 생각했을 때, 그들에게 있어 나는 굉장히 자극적인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한때 나는, 그들의 판타지를 채워주는 것이 일종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전세계적으로 회자되는 세기의 배우나 불멸의 아이콘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사람에게만큼은 그 정도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마치 메소드 연기자처럼 말이다.


나는 그들의 반응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마릴린 먼로의 남편이자 극작가인 아서 밀러가 자신에 대해 쓴 글을 읽고 엉엉 울던 장면에서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여러분 작가 만나지 마세요.)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랬다.



그렇게 하면 그들도 내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리라 믿었다.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마치 마릴린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어떤 무한한 사랑을 주는 존재가 깊은 수렁 안에 갇혀 있는 나를 구원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연하지만, 그런 존재는 없었다. 나는 채워지지 않는 관계에 늘 허덕였다. 한 사람이 온전한 애정을 줄 수 없을 것 같으면 다른 이를 찾았다. 영화 속 마릴린이 남편을 두고 주인공인 콜린 클락에게 단 일주일간의 위안을 찾았듯이.


하지만 아무리 수 십 수 백 개의 바가지로 물을 부어봤자 밑 빠진 독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제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도 '외로움'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충족되지 않는 감정은 공허함을 불렀고, 그것은 나를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끌어 내렸다. 



아마 나에게 이별을 고한 애인은, 그것을 눈치챈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나에게 무한한 애정을 주고 싶어했다. 나를 채워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애정을 빨아들이기만 했다. 아니, 빨아들이지조차 못했다. 가는 채 사이로 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그의 사랑은 나를 통과만 할 뿐이었다. 


그럼 당연히 지치기 마련인데 애인은 스스로를 탓했다. 자신의 애정으로 행복해야 마땅할 내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에 그는 매우 실망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마음이 내 두 볼을 타고 흘러 내렸던 게 아닐까.


결국, 답은 하나뿐이었다. 이제는 나 자신을 정비할 차례였다. 나의 마음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책임져야 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그 답을 찾는 중이다. 나는 여전히 우울증을 앓고 있고, 끔찍한 고독에 시달리며 가끔 이유 없이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곤 한다. 


그럼에도 분명, 다시 사랑을 하려 한다. 다만 상대에게 갈구하는 애정은 이제 그만두고, 우선은 이런 나를 온전히 인정할 것이다. 우선 나부터, 나를.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구원은 셀프”라고.



이 영화, 지금 보러 갈까요?


민서영 / 작가


책 <썅년의 미학>을 쓰고 그렸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나 하지 않는 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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