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 속 피어난 문학, 수용소의 메시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리뷰

by 시연



줄거리

1951년, 입소 전에는 평범한 농부였던 슈호프는 독소전에 참전했을 적에 포로로 잡힌 것이 간첩으로 오인받아 조국을 배신했다는 죄목을 받고는 강제수용소에 입소한 지 8년이 되었다. 어느 때처럼, 슈호프는 아침 5시 기상시간에 맞춰 일어난다. 그는 작업을 피하기 위해 의무실에 가지만 이미 의무실 정원이 다 차서 그는 밖에 나가 일을 해야 했다. 식사시간이 되자, 그는 배급받은 빵을 감추고는 작업에 나갔다. 작업은 발전소의 집과 지붕을 만드는 것이었다. 슈호프는 자질 구래 한 작업을 마치고는 체자리의 잔심부름 대가로 자기 몫에 체자리의 수프까지 두 그릇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운 좋은 하루라고 생각하고는 잠이 든다.
"출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위키피디아




배경, 주제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그는 1945년 소련의 포병 장교로 근무하던 중 친구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내게 되는데, 그 편지의 내용 중에는 스탈린에 대한 "불손한 묘사"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소련은 스탈린의 철저한 정권 강화를 위해 비판의 목소리를 일절 허용하지 않았고, 솔제니친의 편지는 10년형을 선고받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는 실제 소련 강제수용소에서 1945년에서 1953년간 복역하게 된다.)


솔제니친이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57년부터다. 원고를 제출한 것은 1962년이었는데, 이 작품은 소련 체제의 현실과 부조리를 비판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 해 11월 소련에서 출판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적 흐름의 영향이 컸다. (그 당시의 소련은 스탈린이 죽음을 맞이하고 흐루쇼프가 등장하는 시기였기에 스탈린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작품은 수용소의 생활을 통해 스탈린 시대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되어 1963년 출간된 이후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선정되었다.


전체주의에 대한 고발의 관점은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느낄 수 있는 것이고, 그에 대한 수많은 책과 리뷰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이에 대해 초점을 맞추기보다 수용소의 삶을 살아낸 솔제니친의 태도를 바라보려 했다. 자연 속에 던져진 하나의 인간으로서 '삶을 마주하는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그리고, 생각

수용소와 같은 힘든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던 비결 같은 걸 상상했던 탓일까. 처음 책을 읽기 전 그의 생활 태도를 지레짐작했을 땐, 굉장히 올바르면서도 무정 무욕의 인물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그가 하루의 작업에서 빠지기 위해 의무실을 들락거리는 모습 혹은 15분여 채 되지 않는 식사시간 스프 두 그릇을 먹기 위해 머리를 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 예상과는 달리 그는 굉장히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책을 읽고 있을수록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고립되어있기에 외롭고, 잔인하며, 희망 따윈 찾을 수 없는 '수용소'라는 공간에서 그다지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정말 터무니없는 이유로 잡혀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다.(스파이라는 명목 하에 잡아온 이들 중 진짜 스파이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제니친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과연 이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끌려와 수용소라는 공간에 갇혀있는 것이 맞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동감 넘치기도 하며, 중간중간 소소한 행복에 휩싸이기도 한다. 삶 자체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 그러한 공간에서 1분 1초의 자그마한 행복을 누리는 모습, 생존하기 위해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는 모습은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모습이 어떻게 보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모습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느꼈다. 현재의 삶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 어떠한 우연에 의해(혹은 절대자의 의지로 인해) 세상에 잉태하게 되었고, 이는 결코 우리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와는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은, 그리고 언제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일지라도 오늘내일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은 솔제니친의 삶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개인은 또 다른 수많은 개인과의 관계망(사회) 속에서 살아가기에 단순한 행동일지라도 그에 대한 인과관계를 쉽게 예측할 수 없다.(A라는 결과를 의도한 행동은 다른 요인들에 의해 ~A의 결과를 나타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한에 가까운 변수 위에서 언제나 유효한 계획을 세울 수 없으며, 삶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언제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당장 다음 달의 생활비, 다음 학기의 성적, 취업, 노후의 삶 등) '불안한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인간을 더욱 움직이게 하고, 생존할 수 있게 도왔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와 같은 요소는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고통받는 것이다. (특히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더욱이)


솔제니친은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절망했을 것이며, 고통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살아간다. "부조리한 현실을 받아들여라", "당신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삶을 계속해서 묵묵히 살아내는 모습이 나에게 용기로 느껴졌고 힘으로 다가왔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부조리한 삶일지라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책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며, 삶의 곳곳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해서 절대적인 진리는 정해져 있지 않다. 모두 저마다의 진리를 가슴속에 새긴 체 살아간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 우리 모두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분명 존재한다. 바로 고통이다. 그 누구도 고통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 때문에 고통은 실존하는 것이다.


나는 이 고통에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필연적인 고통이고 둘째는 불필요한 고통이다. 필연적인 고통은 말 그대로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이며(불완전함, 죽음), 불필요한 고통은 나의 선택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고통이다. 이때 필연적인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묵묵히 그 상황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불필요한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 삶의 주체자는 내가 되고 나는 행동하게 된다.


안전한 방구석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그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를 꺼내도 될까 싶기도 하지만, 솔제니친에게서 이러한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묵묵히 감내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행동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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