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계 노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워치노트 May 29. 2022

현광훈 작가, 금속에 시간을 더할 때

카메라에서 시작한 워치메이킹 개척기

내가 만드는 시계는 작고 복잡한 부품들과 톱니바퀴의 조합으로 만들어지고 겉은 시계 다이얼과 케이스로 덮여진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여느 시계와 다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시계를 밖에서 보지 않는다. 시계의 안쪽에서 무수히 많이 반복되는 톱니들의 사이에서 시간의 흐름을 주목한다.

- 현광훈 작가노트, 2021.09.30


현광훈 작가의 전시에 다녀왔다. 전시를 드물게 여는 작가는 아니지만, 이런 전시를 여는 작가는 드물다. 그가 손 댄 금속엔 시간이 깃든다. 시간을 나타내는 시계,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오토마타, 그 속에서 한 순간을 잡아내는 카메라, 그리고 이 모든 금속에 시간을 불어넣는 도구까지 따뜻한 원목과 함께 작품으로 등장한다. 작품들은 멈춰있는 순간에도 숨을 고르는 것 처럼 보일 정도로 살아숨쉬는 듯 하다. 생명체였던 나무가 삭고 무생물인 황동에 나란히 녹이 낀 날엔 그것대로 생의 이후를 생생히 보여줄 것 같다.


사진=oldschoolwatch


현 작가는 시계 매니아들 사이에선 대표적인 국내 워치메이커 중 하나로 알려졌다. 실제로 여러 시계를 만들어온 데다, '시계 업계의 오스카'로 불리는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GPHG)의 아카데미 멤버로 심사위원 자격을 갖고 있다. 국내에서 이 자격을 갖고 있는 건 현 작가까지 네명 뿐이다. 워치메이커로 다이얼과 케이스 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나사까지 직접 만드는 장인 정신으로도 유명하다.


Mechanical Instant Film Printer, Cherrywood & Brass, 2020. 사진=oldschoolwatch

처음 현 작가가 관심을 가졌던 건 카메라였다고 한다. 대학에서 교양으로 사진 입문 수업을 듣다가 핀홀 카메라를 직접 만들면서 관심갖기 시작해 작업실까지 열었다. 어느 날 일일이 시간을 재면서 촬영해야 하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고민하던 중 현 작가의 눈에 기계식 시계 무브먼트가 들어왔다. 시계의 심장으로 타이머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현 작가는 유튜브에 'watchmaker' 등을 검색해 화면 속 장비를 사들이고 독학했다. 국내 워치메이킹 업계의 개척자가 탄생한 순간이다. 눈길을 끄는 점은 현 작가가 자신의 노하우를 sns 등으로 적극 공유한다는 것. 그에게 쏟아지는 존경이 개척때문만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이유다.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앞서 소개한 현 작가의 작가노트 뒷부분이 색다른 의미로 와닿는다.


톱니바퀴들은 대칭과 반복을 이루며 저마다 각자의 속도로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절대적인 질서와 규칙에 의해 움직이는 시계안의 세상은 완전함에 가깝다. 그 안에서 나는 초침의 톱니바퀴가 한바퀴를 돌아 분침을 밀어내어 1분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기도 하며, 톱니와 톱니 사이의 간극에서 멈춰진 시간을 보기도 한다. 나의 시계는 오로지 나에 의해 만들어진 내가 꿈꾸는 완벽한 세상을 투영한다.

 

Large Dephting Tool, Brass & Walnut, 2020. 사진=oldschoolwatch

스쳐 지나갈 법한 현 작가의 워치메이킹 툴도 고요한 개척의 역사가 남긴 유물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현 작가가 만든 Dephting Tool은 두 톱니 간 거리를 재는 도구다. 미술비평가들이 남긴 평을 보면 더 좋겠지만, 사실 현 작가의 스토리만 덧붙여도 이 툴은 나름대로 관객들에게 여러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해당 작품에 대한 현 작가의 작가노트 정도는 덧붙여도 좋을 것 같다.


시계는 복잡한 부품과 톱니바퀴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또한 그 톱니바퀴들은 정밀하고 오차가 없어야한다. 어찌 보면 사람이 손으로 그것을 오차 없이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정밀한 톱니바퀴를 만들 수 있는 도구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도구는 내 손의 연장선에 있으며 내 의지를 구현하는 행위의 최종 단계에 존재한다. 그러한 도구를 만드는 일은 나의 작업의 시작점이며, 그것들은 나의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 넘게 해준다.

-현광훈 작가노트, 2020.05.31



(왼쪽 상단, 시계방향) 스털링 엔진, 퍼페추얼 캘린더, 오토마타: 날개짓하는 새, KTW M Pendulum, 손목시계, 글씨쓰는 손. 사진=oldschoolwatch


매거진의 이전글 시계의 이면과 내면_예거 르쿨트르 리베르소 스토리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