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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치노트 Apr 23. 2023

독립 시계 제작자가 만든 토노의 명가, 프랭크 뮬러

그야말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고등학생쯤이었나, 동화를 읽을 나이를 훌쩍 넘겨 굳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완역본으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고전적이면서도 혼란스러운 스토리로 만든 특유의 로맨틱하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1865년에 쓰였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세련됐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강렬하면 질릴 법도 한데, 삽화와 언어유희 등 곳곳에 공을 들여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새로웠고요.

Franck Muller의 설립자 Franck Muller. (사진=Franck Muller 제공)

시계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브랜드를 꼽으라면 단연 프랭크 뮬러(Franck Muller)가 아닐까요. 1910년대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이 유행시킨 고전적인 토노(Tonneau·육각형에서 옆면을 곡선으로 처리한 술통 모양) 케이스를 고집하지만 다이얼은 해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혼란스럽게 디자인하는 브랜드기 때문입니다.


기술 방향성도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데요, 4년에 한번식 오는 윤년뿐만 아니라 100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예외적으로 윤년이 아닌 해'까지 계산하는 태엽시계를 만들어 전통 기계식 시계 제작자들의 길을 개척하더니 몇 년 전엔 가상자산(코인) 지갑을 탑재한 손목시계를 만들기도 했죠.

윤년뿐만 아니라 100년에 한번씩 오는 예외적인 평년까지 계산하는 AETERNITAS 5. (사진=Franck Muller 제공)

프랭크 뮬러는 지난달 갤러리아명품관이 팝업스토어를 연다고 밝혀 언론의 주목을 받았는데, 사실 시계 애호가들 사이에선 이미 잘 알려진 유명 브랜드입니다. 사실 이 정도로 뚜렷한 색채와 상상을 뛰어넘는 퀄리티를 보여주는데 안 알려지는 게 이상하겠죠.


프랭크 뮬러는 1958년생인 스위스 제네바 출신인 프랭크 뮬러가 자신의 이름을 따 1992년에 설립한 브랜드입니다. 회사는 자신이 처음 시계를 만든 제네바의 한 시골에 설립했고요. 건물 역시 1905년에 지은 맨션을 복원해 사용했습니다.


뮬러는 이탈리아인 어머니와 스위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다양한 문화 속에서 규율과 창의력을 함께 중시하며 자랐다고 합니다. 고집스러운 전통과 파괴에 가까운 혁신을 한데 담는 그의 성향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조심스럽게 추측할 수 있는 점입니다.


뮬러는 제네바 시계 학교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뒤, 스벤 안데르센(Svend Andersen)이라는 파텍필립(Patek Philippe)의 전 숙련공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GPHG 수상 목록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앤더슨 제네바(Andersen Geneve)'의 설립자죠. 뮬러는 시간이 날 때 박물관이 소장한 오래된 시계를 복원하면서 브랜드에 취업한 친구들이 접할 수 없는 경험을 쌓고, 이 과정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고 합니다.

뚜르비옹은 1801년 브레게가 처음 생산했지만, 사람들이 이를 시계 정면에서 볼 수 있게 한 것은 프랭크 뮬러다. 사진은 브레게의 초창기 뚜르비옹 시계.(사진=Breguet 제공)

교양있는 이들과 교류하면서 안목을 넓히는 것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훗날 프랭크 뮬러의 상징인 '토노 카벡스(Tonneau Curvex)' 역시 '당신다운 시계를 만들어보라'는 한 애호가의 조언을 듣고 만들었다고 하고요.


1983년, 프랭크 뮬러는 자신의 시계를 직접 만들기로 합니다. 1986년엔 바젤 아트페어에 '프리 오실레이션 뚜르비옹(Tourbillon)'이라는 시계를 선보이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당시 스위스 대통령이 직접 프랭크 뮬러의 시계를 직접 보러 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실 프랭크 뮬러 이전엔 뚜르비옹을 백케이스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프랭크 뮬러 본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걸 처음으로 정면에서 볼 수 있게 한 것도 프랭크 뮬러라고 합니다. 이 말이 맞다면 뚜르비옹의 미적인 가치에 주목해 새로운 뚜르비옹의 시대를 연 셈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프랭크 뮬러는 독립 시계 제작자이자 컴플리케이션 시계의 거장으로 떠오릅니다.

크레이지 아워 기능을 더해 숫자가 불규칙하게 뒤섞여있는 프랭크 뮬러의 시계. (사진=Franck Muller 제공)

프랭크 뮬러는 사실 2002년 밀레니엄 힐튼 호텔에 국내 최초로 부티크를 연 적 있습니다. 프랭크뮬러의 대표 기능 중 하나인 크레이지 아워(Crazy Hours)가 생겨나기 1년 전에 이미 한국에 들어왔던 거죠.


크레이지 아워를 적용한 프랭크 뮬러의 시계들은 다이얼의 숫자 인덱스가 뒤섞여있습니다. 12시 방향 인덱스에 12시가 아닌 8이 써있고, 이후에도 1시 방향부터 1, 6, 11, 4, 9, 2, 7, 12, 5, 10, 3 순으로 무작위 배치되는 식이죠.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이 시계는 시간이 바뀔 때마다 아워 핸즈(시침)가 제 시간을 찾아 점핑합니다. 방금 말씀드린 다이얼 숫자 배치를 예로 들면, 시침은 12시에 8시 방향의 숫자 12를 가리키는 식입니다. 2시가 되면 6시 방향에 있는 2로 점프하고요.

Centurion Edition. (사진=Franck Muller 제공)

2019년엔 'Encrypto'라는 모델로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다이얼 한가운데엔 비트코인 마크가 그려져 있고, 시계엔 코인 월렛을 삽입해 비트코인 등을 보관할 수 있습니다. 12시 인덱스에 그려진 QR코드로 잔고 확인과 송금 등도 가능했고요.


사실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분도 많겠지만, 개인적으론 당시 시계 시장에서 코인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큰 손'으로 떠올랐던 점을 고려하면 시장에 발빠르게 대처했다고 생각합니다.


프랭크뮬러는 이번 워치 앤 원더스에서도 뚜르비옹을 앞세운 제품을 발표했는데요, 직경이 20m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뚜르비옹을 적용한 '기가 뚜르비옹(Giga Tourbillon)' 신제품을 공개했습니다. 큰 뚜르비옹과 4개 배럴(메인스프링이 들어가는 통으로 보통 랫챗휠 밑에 위치)로 파워리저브가 9일이나 되는 시계입니다(프랭크 뮬러는 세게에서 가장 작은 뚜르비옹인 11.6mm 'Lady Tourbillon'을 2008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신제품은 21만1000 스위스프랑으로 한화 약 3억70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 Bonnie Tyler의 'Total Eclipse of the Heart'를 들으면서 썼습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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